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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령 동아프리카 Deutsch-Ostafrika | ||
독일 제국의 식민지 | ||
<rowcolor=#fff> 깃발 | 휘장 | |
1885년 2월 27일 - 1919년 6월 28일 | ||
<rowcolor=#fff>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잔지바르 술탄국 | 탕가니카 지역 | |
영국령 케냐 | ||
르완다 왕국 | 벨기에령 르완다-부룬디 | |
부룬디 왕국 | ||
독일 동아프리카 회사 |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 |
<colbgcolor=#000><colcolor=#fff> 위치 |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모잠비크 | |
면적 | 995,000km2(1912) | |
인구 | 7,700,000명(1912) | |
정치체제 | 독일 제국의 식민지 | |
국가원수 | 독일 황제 | |
정부수반 | 식민지 총독 | |
수도 | 바가모요 (1885-1890) 다레살람 (1890-1916) 타보라 (1916, 임시) | |
통화 | 독일령 동아프리카 루피 | |
민족 | 독일인, 탄자니아인 | |
언어 | 독일어, 스와힐리어, 아랍어 | |
종교 | 기독교, 이슬람, 아프리카 토착 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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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5년부터 1919년까지 존속한 독일 제국의 아프리카 식민지들 중 하나. 오늘 날의 탄자니아, 르완다, 부룬디 등과 모잠비크의 키온가 삼각지대(Kionga Triangle)에 해당된다. 다른 독일의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들에게 분할되었다.2. 역사
1884년 3월 28일, 독일인 사업가인 카를 페터스(Carl Peters)는 독일 식민 협회(Gesellschaft für Deutsche Kolonisation)를 수립하였다. 이후 1885년 4월 2일, 독일 식민 협회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회사(Deutsch-Ostafrikanische Gesellschaft)로 명칭을 바꾸면서 회사를 확대했다. 카를 페터스는 현지 부족들과 협정을 맺으며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는데, 독일 제국은 그를 회유하여 회사의 영향력 하에 있던 동아프리카를 독일의 보호령으로 선포하였다. 동아프리카를 독일 제국의 식민지로 삼는 대가로 독일령 동아프리카 회사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경영권을 독일 제국으로부터 위임받았다.독일 제국은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1886년에는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영국과 충돌하여, 양국의 합의 하에 동아프리카 국경선을 확정했다. 1888년 독일 제국의 통치에 반발한 구 오만 세력과 주민들이 오만 상인인 아브시리를 중심으로 아브시리의 반란(Aufstand der ostafrikanischen Küstenbevölkerung)을 일으켰다. 아브시리의 반란 이후 독일 제국은 잔존하던 오만 제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버리고 1891년 독일령 동아프리카 회사로부터 경영권을 획득하여 직접 통치하게 된다.
1890년 7월 1일, 독일 제국은 영국과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독일어: Helgoland-Sansibar-Vertrag, 영어: Heligoland–Zanzibar Treaty)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독일령에 속했던 위투가 영국령이 되었다. 독일 제국은 독일 근해의 헬골란트섬, 잔지바르와 그 밖의 몇몇 아프리카 지역을 손에 넣었다.
독일 제국은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본토인(독일인)과 식민지인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펼쳤고, 토지를 강매하고 이권을 독점하였다. 이는 식민지 경제의 안정화를 불러왔지만 동시에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불러왔고, 결국 1905년 반란이 일어났다. 독일군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식민지 흑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 사건 이후 독일 제국 정부는 국가식민지청을 설치했고, 식민지 통치를 개선해 나갔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독일 주둔군 육군 대령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Paul von Lettow-Vorbeck)를 위시한 독일군이 탕가 전투에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전력의 차이 때문에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세한 전황은 제1차 세계 대전/아프리카 전선 항목 참조. 참고로 동아프리카를 제외한 다른 전역에서는 대부분 독일군이 패배했기 때문에 포어베크는 전후에도 독일의 영웅 취급을 받았다.
독일 제국이 패전하면서 1919년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탄자니아는 영국에,[1] 르완다, 부룬디는 벨기에에게, 모잠비크 일부 지역은 포르투갈에게 분할되었다.
3. 관련 문서
[1] 이때 탄자니아 대부분지역이 영국에 편입되면서, 우간다, 케냐하고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