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12:42:55

드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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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12년 7월 24일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과 프랑스군이 프랑스 북부의 드냉에서 맞붙은 전투.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쟁의 판도를 유리하게 바꾸는 데 성공한다.

2. 배경

1712년, 프랑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스페인 왕위를 둘러싼 전쟁에 뛰어든 이래, 프랑스군은 블레넘 전투, 라미예 전투,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이전에 확보했던 플랑드르의 영역을 모두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이 국내로 밀려들어와 릴을 공략하고(릴 공방전) 파리를 위협하는 상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래도 1710년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말플라케 전투에서 파리를 향해 진격하던 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덕분에 연합군의 공세가 주춤하긴 했지만, 이듬해인 1711년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이 다시 공세를 개시해 부섕을 공략했다. 이로서 연합군이 파리까지 진격하는 걸 저지할 요새는 오직 킹브레 요새 뿐이었고,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바닥을 드러낸 프랑스로선 도저히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듯 했다.

그러던 1711년 4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당초 연합군에 의해 스페인 국왕으로 내세워졌던 카를 6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선출되었고, 이는 오스트리아의 동맹 국가들이 전쟁을 지속할 동기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특히 1710년 10월 전쟁의 지속을 주장하던 휘그당이 선거에서 패하고 토리당이 집권한 영국은 한시바삐 프랑스와 평화 협정을 맺고 싶어했다. 그들이 애초에 전쟁을 개시한 건 프랑스와 스페인이 한 국가로 묶여 유럽의 패권을 확고히 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제 카를 6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어버렸으니 더이상 전쟁을 지속했다간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이 한 국가로 묶이는 걸 도와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은 이런 상황에서도 전쟁의 지속을 주장했으나 1712년 1월 정부 자금을 횡령한 혐의로 해임되어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오몽드 공작 제임스 버틀러가 영국군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그해 2월, 영국은 네덜란드의 도시 우트레흐트에서 프랑스와 비밀 교섭을 시작했다. 이렇듯 영국이 전쟁을 끝낼 준비를 하던 상황에서도,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해 4월 26일 드웨에 도착했다. 이후 10만에 달하는 연합군은 스켈드 강을 건너 케누아 방면으로 진군하면서 드냉을 보급 거점으로 삼고 12개 보병 대대와 30개 기병 대대로 하여금 보급로를 방어하게 했다. 5월 28일, 연합군은 케누아 인근 평원에 도착한 후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일 지를 숙고했다.

그러던 5월 29일, 오몽드 공작은 영국 정부로부터 "추가 명령이 있을 때까지 어떠한 포위 공격 또는 전투를 피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았다. 또한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빌라르 원수에게 이 지령을전하라는 추가 지시도 받았다. 이에 오몽드 공작은 의도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했지만, 연합군은 이 상황에서도 케누아 요새를 7월 4일에 공략했다. 이후 7월 10일 전쟁 평의회에서 랑드리시 요새를 포위 공격하기로 결정되었지만, 오몽드 공작은 7월 15일에 포위전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영국군을 이끌고 됭게르크로 돌아갔다. 연합군 총사령관 사부아 공자 외젠은 영국군이 빠져버린 상황에서도 랑드리시 요새 포위 작전을 지속하기로 결정했고 7월 17일에 랑드리시 요새를 포위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졌고, 연합군은 이를 커버하기 위해 군대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한편 프랑스군 원수 빌라르는 루이 14세로부터 전투를 회피하라는 지시를 받고 연합군의 공세에 대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7월 중순 루이 14세로부터 연합군이 랑드리시 요새를 포위할 경우 전투를 감수하라는 지시를 받은 빌라르는 7월 19일 셀레 강을 향해 진군했다. 외젠은 적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전투 태세를 갖추고 프랑스군이 삼브레 강을 건너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빌라르 원수는 랑드리시를 직접 구원하러 갔다가는 적이 강을 건너오는 프랑스군을 중도에서 요격할 가능성이 높아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적의 보급 거점인 드냉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약 30km를 행군해 스켈드 강을 건너 적이 요새화한 거점을 공략한다는, 실로 대담하고도 위험한 계획이었다. 이리하여 7월 23일 빌라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스켈드 강을 거쳐 드냉으로 접근하면서 드냉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네덜란드 연합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1712년 7월 23일 밤, 빌라르 원수는 야음을 틈타 프랑스군을 이끌고 스켈드 강으로 이동했다. 이때 그는 랑그리시를 포위한 연합군이 아군의 이동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여러 조치를 취했다. 우선 일꾼 1,200명이 삼브레 강둑을 따라 길을 만들기 위해 동원되었고, 용기병 몇 부대를 삼브레 강 인근에 파견해 적의 시선을 잡아끌게 했다. 또한 일부 부대를 후방에 남겨놓고 북을 치고 악기를 연주하게 해 적군으로 하여금 프랑스군이 아직 삼브레 강 건너편에 있다고 착각하게 했다.

7월 24일 새벽, 22개 보병 대대, 40개 기병 대대, 포병 여단으로 구성된 프랑스 선발대가 스켈드 강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바로 강을 도하해 드냉으로 진격했고, 프랑스 본대는 정오 무렵에 도착했다. 한편 드냉을 수비하고 있던 수비대 지휘관인 알베말 백작은 드냉과 마르키엔느 사이에 12.5km에 달하는 이중 방어선을 세웠다. 그러나 땅이 바위 투성이였기 때문에, 도랑을 파내는 게 매우 힘들었고, 본래 2개를 파야 할 도랑을 단 한 개만 파냈다. 이 때문에 드냉의 방어력은 약화되었고 적이 총검돌격했을 때 이를 제대로 막기 어려워졌다. 또한 그는 외젠으로부터 랑그리시 포위전에 쓰기 위해 적절한 보급을 해주느라 바빴고 영국군이 가져가버린 부교들을 추가로 보내달라는 독촉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적이 난데없이 출현했다는 소식에 경악해 황급히 랑그리시에 주둔한 본대에 전령을 띄워 지원을 호소하고 적이 도하하는 걸 막기 위해 16개 기병 대대를 출격시켰지만 이미 적이 도하했기에 무위에 그쳤다.

오전 10시, 드냉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외젠이 직접 드냉으로 달려왔다. 그는 프랑스군이 드냉을 포위한 걸 목격하고 모든 보급 마차들을 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전군이 수비대를 구원하기 위해 가능한 빨리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부대가 15km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제시간이 도착할 가능성은 미지수였다. 그 사이, 프랑스군은 스켈드 강을 건너고 있었지만 그 속도가 매우 느렸다. 빌라르 원수는 한때 공세가 성공할 수 있을 지 의심했지만 조제프 데 몽테스키외, 콩테 다르타냥 등 여러 장수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공세를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강을 건넌 프랑스군은 드냉과 마르키엔느를 연결하는 통신선을 공격했다. 이에 연합군의 대포 6문이 포격을 가했고, 프랑스군의 공세는 이로 인해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오후 1시, 빌라르 원수의 지시를 받은 프랑스 보병대는 "루이 왕을 위하여!"라고 외치며 총검 돌격을 감행했다. 양군은 드냉과 마르키엔느 사이의 방어선에서 격렬한 육탄전을 벌였지만 곧 수적으로 열세한 연합군의 대열이 허물어졌다. 그 틈을 타 프랑스 기병대가 침투해 들어가 적을 도륙했고, 연합군은 곧 사기를 잃고 스켈드 강에 설치된 부교를 향해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부교들은 보급마차들이 급히 건너다가 부러뜨리고 말았고, 연합군 병사들은 스켈드 강에 뛰어들어 강을 건너려 했다가 많은 병사들이 익사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드냉으로 돌격해 짧은 교전 끝에 공략했다. 이리하여 드냉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군은 드냉 전투에서 전사자 880명, 부상자 1,186명을 기록했다. 반면 연합군은 2천 명이 전사했는데, 그 중 절반은 강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또한 2,33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알베말 백작을 비롯한 네 명의 장성들이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었다. 외젠은 드냉을 상실한 후에도 한동안 랑드리시 요새 포위전을 지속했지만 프랑스군이 드냉에 이어 마르키엔느까지 공략하고 아군을 압박해오자 결국 철수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반격을 개시해 10월 4일 케누아를 탈환했고, 10월 19일에 부생을 탈환했다.

드냉 전투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는 더이상 전쟁을 지속할 힘을 잃었다. 그들은 모든 전투 행위를 중단하고 영국과 더불어 프랑스와 평화 회담을 가졌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한 영국과 네덜란드는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전쟁을 지속했지만 스페인의 유일한 합스부르크 거점이었던 바르셀로나 마저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게 공략될 위기에 몰리자 결국 1714년 3월 라슈타트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