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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파일:클로드 루이.png
49세의 클로드 드 빌라르. 이아생트 리고(Hyacinthe Rigaud) 작, 1704년경

1. 개요2. 출생3. 군대 생활 초기 (1671-1700)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5. 말플라케 전투6.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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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laude Louis Hector de Villars, Prince de Martigues, Marquis and Duc de Villars and Vicomte de Melun
(1653년 5월 8일 ~ 1734년 6월 17일, 향년 80세)

드 빌라르 장군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 측 명장인 말버러 공작 존 처칠합스부르크 제국 측 명장인 사부아 공자 외젠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활약한 프랑스 왕국의 명장이다.

존 처칠이나 사부아 공자 외젠에 비하면 덜 알려진 감이 있지만 프랑스가 잉글랜드-네덜란드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집중 공격으로 어려운 전쟁을 치러 나가고 있을 때 침착하고 의연한 지휘를 통해서 어려움을 이겨냈고 결국 전쟁은 루이 14세에 유리하게 끝날 수 있었다.

2. 출생

원래는 몰락한 귀족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피에르 드 빌라르는 루이 14세 초기의 프롱드의 난에 가담했다가 몰락한 귀족으로 외교관이었다. 어쨋든 당시의 출세를 원하는 몰락 귀족[1]이었기 때문에 백 년 후 프랑스 최고의 명장처럼 군대에 1671년, 18세로 입대한다.

3. 군대 생활 초기 (1671-1700)

당시의 루이 14세는 절대왕정과 그의 아버지 루이 13세와 리슐리외 추기경이 30년 전쟁에서 신교도를 지지함으로서 영토를 얻은 후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많은 전쟁(대표적으로 영란전쟁, 9년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을 벌였는데, 이는 군대의 성장을 의미한다. 빌라르 역시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여러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1673년,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당시의 마스트리히트 공방전과 세네페 전투에서의 뛰어난 자질을 시작으로 승진을 한다. 그러나 당시 군사장관이었던 루부아와의 갈등으로 인해 승진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후 콩데 공[2]과 뤽상부르 공작 밑에서 군사 경력을 쌓으면서 때를 기다린다. 그 와중 1690년에는 바이에른 선제후국에 군사 교관으로 가서 교편을 잡으면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친분을 쌓았고, 이때 라이벌이 될 사부아 공자 외젠을 만났다.[3] 이후에는 9년 전쟁(팔츠 계승 전쟁)에서 싸우기도 했다. 그리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그의 전과를 더욱 빛나게 했다.

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0년, 후사가 없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앙주 공작. 즉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를 다음 왕으로 지명하고 사망했다. 그러나 지난 날 루이 14세가 벌여 넣은 전쟁으로 인해 두 왕국이 합병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면 프랑스의 힘이 지나치게 커질 것을 두려워 한 다른 열강들은 이를 견재하려 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레오폴트 1세는 자신의 둘째 아들 카를 대공이 카를로스 2세에 의해 계승권 3위로 지명되었다는 점을 들어 트집을 잡으며 스페인의 주도권을 얻으려 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이 와중 잉글랜드 왕국[4]-네덜란드 공화국-합스부르크 제국-프로이센 왕국의 연합으로 프랑스는 불리하게 되지만 빌라르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 대표적으로 프리들링겐 전투 (1702)와 회흐슈테트 전투(1703)에서는 동맹군의 바덴-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과 림부르크 스티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냈고 프랑스 내의 위그노 반란 진압으로 공작위를 받는다. 이후 빌라르는 바이에른으로 가서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습격전을 펼치려 하지만 의견 차이로 해임되고 본국으로 돌아온다. 뭐, 이후에 온 마르생 원수는 탈라르와 바이에른 선제후와 함께 삽질을 벌이게 되는데 그게 바로 프랑스 최악의 패배인 블레넘 전투다.

5. 말플라케 전투

이후 빌레루아가 라미예 전투에서 패배하고 방돔과 프티 도팽의 프랑스군이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심지어 릴 포위전에서까지 패배하여 프랑스가 위태로워지자 루이 14세는 빌라르에게 말플라케에서 피해가 얼마가 나도 좋으니 적을 무찌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빌라르는 선배인 부플레르 원수와 함께[5] 75,000명, 대포 80문(당시 연합군 측은 90,000명에 대포 100문)의 전력으로 동맹군을 맞선다. 초반에 보병대를 지휘하던 빌라르는 총알에 부상을 입어서 후퇴를 하고 전권을 이어받은 부플레르는 정예 기병부대를 이끌고 동맹군을 6번이나 몰아내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동맹군은 2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추가적 공세가 어려워짐에 따라 더 큰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이 전투로 인해 영국의 앤 여왕과 토리당 내각이 전쟁에서 발을 빼려고 했으니 그 승리는 지대한 것이었다. 1712년 영국이 전쟁에서 이탈한 후의 드냉 전투에서 총검 돌격과 티그리 공의 기병대와의 연합 전술로 오스트리아군을 전멸시켰다. 그 이후 라인 강을 건너 프라이부르크로 진격하여 라슈타트 조약과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하고 이는 프랑스의 유리함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조약으로 인해 두 부르봉 왕조는 서로를 합병할 수 없게 되었지만 스페인이 프랑스의 세력권 아래에 들어온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이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당시 두 나라가 같은 편이라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6. 말년

루이 14세 사후, 어린 루이 15세가 즉위하자 빌라르는 섭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주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1725년, 프랑스 대원수의 지위를 받고 1734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빌라르는 80살이어서 쇠약해졌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제국과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1734년 향년 80세로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에서 사망했다.
[1] 당시 이러한 귀족들이 출세하는 방법은 성직이 되거나 군대를 가는 것이다. 실제로 리슐리외 추기경도 빌라르처럼 가난한 하급 귀족이었지만 추기경이 된 덕에 출세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아예 프랑스 제1제국황제로 즉위했다.[2] 앙리 4세의 숙부인 앙투안이 창설한 공가로 1830년 루이 앙리 드 부르봉의 죽음으로 단절된다.[3] 사부아 공자 외젠과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이탈리아 반도 사보이아 공국사보이아 가문으로 이어지는 친척 관계였다.[4] 전쟁 발발 시점에서는 연합법이 통과되기 전이었다.[5] 이때 부플레르 원수는 상당히 대인배적인 행보를 보였다. 바로 기꺼이 후배인 드빌라르 장군의 지휘를 받기로 한 것. 부플레르 원수의 대인배적인 협력이 아니었다면 프랑스의 지휘는 지리멸렬해졌고 전쟁도 프랑스에게 매우 불리하게 끝났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