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르 공화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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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디디에 라치라카 Didier Ratsiraka His Excellenc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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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디디에 이그나스 라치라카 Didier Ignace Ratsiraka | ||
출생 | 1936년 11월 4일 | ||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아치나나나 구 바토만드리 | |||
사망 | 2021년 3월 28일 (향년 84세) | ||
마다가스카르 안타나나리보 | |||
묘소 | 암보히차이나 영묘 | ||
국적 | [[마다가스카르| ]][[틀:국기| ]][[틀:국기| ]] | ||
재임기간 | 제3대 마다가스카르 대통령 | ||
1975년 ~ 1992년 | |||
제5대 마다가스카르 대통령 | |||
1997년 ~ 200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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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셀린 라치라카 | ||
자녀 | 올가, 소피, 아니크, 자비에르 | ||
조카 | 롤랜드 라치라카 | ||
학력 | 앙리 4세 고등학교 (졸업) 프랑스 해군사관학교 (졸업)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직업 | 정치인, 군인 | ||
소속 정당 | 말라가시 혁명당 | ||
주요 서훈 | 마다가스카르 국민 훈장 그랜드 코르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 ||
별명 | 붉은 제독(Red Admiral)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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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디에 라치라카는 마다가스카르의 정치인이자 해군 장교로 마다가스카르 민주 공화국과 마다가스카르 제3공화국의 3,5대 대통령을 역임했다.2. 생애
2.1. 초반
디디에 라치라카는 마다가스카르 동부 아치나나나 지역의 바토만드리에서 프랑스 식민 행정부의 마다가스카르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앙리 4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브레스트 해군학교에 입학하여 1962년 해군 장교로 졸업했다. 그는 마다가스카르로 돌아와 디에고-수아레스 해군 기지의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파리에 있는 마다가스카르 대사관의 군사 무관이 되었다.1972년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대통령이 사임하고 가브리엘 라마난초아 장군이 쿠데타로 과도 정부를 세우자 정부의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강대국에 맞서 마다가스카르의 국가 주권을 주장하는 활동을 하였다. 1973년에 프랑스와 프랑스-마다가스카르 협력 협정을 재협상 하고 마다가스카르를 프랑화 지역에서 제외했다. 리차드 라치만드라바 대령이 라마난초아를 대신했지만, 그는 임기를 시작한 지 불과 6일 만에 암살당하고 만다. 그렇게 라치라카가 1975년 6월 15일 군부에 의해 최고 혁명 위원회 의장의 자리에 오른다.
2.2. 대통령이 되다
처음에 그는 친서방적이었던 필리베르트 치라나나의 마다가스카르 제1공화국 정권과 결별하기 위해 사회주의 헌법을 작성하고 북한의 김일성,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마르크스주의적 체제를 선택했다.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동구권 국가들을 겨냥하여 제3세계의 지도자로 내세우며, ANC에 속한 사하라위족과 남아프리카 흑인 등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했다. 1979년 유엔으로부터 당시 프랑스의 보호 아래 있던 모잠비크 해협의 분산된 섬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디디에 라치라카는 경제적으로 국유화를 선택하여, 민간자본이 소유한 주요 상업 및 금융기업을 국유화하고 국영기업을 설립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경제 운영의 부실로 인해 그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2번째 임기(1982~1989) 동안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 브레튼우즈 체제 하의 국제 금융 기관들과 협상하여 구조 조정 프로그램을 도입하였으며, 이를 통해 경제 자유화를 시도했다. 반대로 그는 정치활동을 엄격히 규제했는데 국가혁명수호전선(FNDR)에 속한 혁명정당들만 정치활동과 선거 참여가 가능했다. 사회주의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사상의 표현 또한 엄격히 통제되었다. 이에 따라 언론은 검열 체제 하에 놓였으며, 자유로운 보도 활동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1989년 3선에 당선된 이후 국가를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개혁시켰다. 다당제가 도입되었고 검열 제도가 해제되었다. 은행과 경제의 핵심 부문에서 국가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을 멈췄다. 1991년 야당이 주도한 거대한 시위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약 130명이 사망했다. 그 여파로 1992년 선거에서 알베르 자피에게 패배하며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2.3. 귀환, 도피, 그리고 또다시 귀환
그러나 알베르 자피의 정권은 유능하지 못했고 최종적으로는 부패 혐의로 탄핵되자 라치라카는 대선에 나와서 선거를 통한 민주적 절차로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이후로 인생이 좀 펴나 싶었지만 한국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민심을 잃게 되고 마르크 라발로마나나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라치라카는 부정 선거를 저질러 라발로마나나가 과반의 득표를 얻지 못했다고 주장하였으나 격분한 시민들에 의해 안타나나리보에서 쫓겨났다.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한 그는 라발로마나나 2002년 4월에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선포되고 선서까지 마무리했지만 라치라카는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토아마시나로 피난을 가서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를 봉쇄한다. 라발로마나나는 정부군을 동원해 쿠데타군을 토벌하고 라치라카는 결국 결석재판에서 국가 안보를 위협한 혐의로 5년형,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2003년 7월, 프랑스로 도피했다.2011년 그는 잠시 마다가스카르로 돌아와 공항에서 땅에 키스하고 팔굽혀펴기를 하며 도착을 알렸다. 그는 마침내 2013년에 이 나라에 완전히 귀환했다. 2013년과 2018년 선거에 출마해보았으나 1%의 득표율도 얻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집권했던 세월의 기록을 계속 옹호하며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현장의 지도자들에게 조언울 해주고,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에게 애국심에 대한 강의를 열었다.
2021년 3월 28일 이른 아침 CENHOSOA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안드리 라조엘리나는 트위터에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은 뛰어난 애국자를 잃었습니다." 라고 올렸다.
3. 평가
후임자인 마르크 라발로마나나가 너무나 충격적인 통치를 보여준 탓에 디디에 라치라카가 비교적 고평가를 받는 면이 있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디디에 라치라카의 실정도 만만한 수준은 아니다. 물론 그가 안 좋은 정책들만 펼친 것은 아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아래에 후술할 2가지 실책이 다른 모든 업적들을 압도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마다가스카르가 지리학적으로 불리한 위치가 아님에도 국가의 전반적인 상황이 좋지 못한 이유가 근본적으로 들어간다면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3.1. 극심한 빈곤
첫 번째는 극심한 빈곤이다. 마다가스카르는 독립 당시 아프리카에서 가장 발전된 국가 중 하나였지만, 현재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20년 기준 마다가스카르 인구의 77.4%가 하루 1.90달러 이하의 국제 빈곤선 이하에서 생활하고 있다. 1980년에는 46.1%였으나, 라치라카가 처음 권좌에서 물러난 1992년에는 70%로 증가했다.마다가스카르의 경제 쇠퇴는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정치적 불안정, 1973년 석유 위기, 그리고 경제 국유화로 인한 자본 유출과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발생했다. 사회주의 정권 하에서 라치라카는 마다가스카르를 자급자족 국가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물자 부족이 심화되었고, 기본 생필품조차 배급제로 운영되었다.
국민총소득(GNI) 1인당 소득은 1971년 858달러에서 1975년 762달러로 감소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라치라카가 1992년 처음으로 정권을 떠날 당시 484달러까지 떨어졌다. 프랑스 자본이 지배하던 경제 부문은 이전 군사정권 때부터 국유화되기 시작했지만, 라치라카의 사회주의 정권 아래에서 더욱 심화되었다. 금융, 농업 등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었고, 이에 따라 대규모 자본 유출이 발생해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라치라카 정부는 대규모 차입을 통해 국유기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지만, 대부분 비효율적인 사업이었다. 그 결과 국가 부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정권을 잡은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대중의 불만이 폭발했다. 1977년, 안타나나리보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이는 심각한 식량 및 필수 물품 부족으로 인한 것이었다.
3.2. 최악의 교육정책
2번째는 교육의 부실 또는 왜곡이다. 라치라카의 20년간의 사회주의 정책과 마다가스카르화 정책이 시행된 이후, 마다가스카르는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교육 시스템을 가진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라치라카는 모든 사람을 위한 교육을 추진했으나, 적절한 계획이나 자원이 없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이뤄지지 않았던 교육개혁을 단 몇 년 만에 달성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했다.그는 각 동에 초등학교 1개, 행정구에 중학교 1개, 각 군마다 고등학교 1개, 각 주마다 대학교 1개를 설치한다는 시티즈 스카이라인에서나 나올법한 정책을 폈고. 현실은 충분한 재정 자원도 교직원과 교사도 부족했다. 결국,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제공하려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졸업한다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그렇게 부실한 교육 환경을 가진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세대는 마다가스카르에서 '희생된 세대'라고 불린다.
마다가스카르화 정책의 문제점도 있었다. 마다가스카르화 정책은 프랑스어 대신 말라가시어를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정책이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프랑스어가 유일한 교육 언어였으나, 라치라카 정부는 이를 말라가시어로 대체했다. 문제는 말라가시어로 된 교과서나 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경제 및 정치 엘리트들은 사립학교로 몰려가게 되고 1991년 학년도 기준, 약 5,800명의 학생이 프랑스 지원 사립학교에 등록했다. 199,000명의 학생이 가톨릭 사립학교에 등록했으나 150만 명 정도 되는 대부분의 학생은 열악한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교육 격차는 오늘날까지도 마다가스카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