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5 09:45:25

라미아 전쟁

1. 개요2. 배경과 발단 (BC 324 - 323년)3. 라미아 공성전 (BC 323 - 322년)4. 레온나토스의 지원 (BC 322년 겨울 - 봄)5. 크라테로스의 지원 (BC 322년 봄 - 여름)6. 크란논 전투 (BC 322년 여름)7. 이후

1. 개요

알렉산드로스 3세 사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동맹과 마케도니아 왕국이 벌인 전쟁.

2. 배경과 발단 (BC 324 - 323년)

BC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의 패배 이래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의 패권에 종속되어 있었다. 아테네는 포키온의 지도 아래에 평화를 누리며 번영하였지만, BC 324년에 상황이 달라졌다.

그해 봄, 마케도니아 고관 하르팔로스가 아테네에 나타났다. 그는 본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구였지만, 왕이 없는 사이에 바빌론에서 저지른 사치가 처벌받을까 두려워 왕실 금고를 횡령하여 도망친 것이었다. 하르팔로스는 아테네에 망명을 요청했고 아테네는 60척의 전함과 6천 명의 용병을 데리고 온 하르팔로스의 입장을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하르팔로스가 군대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내버려두고 개인의 몸으로 오자 받아들였다.

히페레이데스로 대표되는 아테네 주전파는 하르팔로스의 막대한 재산으로 군비를 대어 마케도니아의 굴레를 벗어 던지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포키온 뿐만 아니라 데모스테네스 등도 신중론을 펼친 덕에, 아테네는 당장 전쟁 준비를 하지 않고 하르팔로스를 연금시킨 뒤 그의 재산을 국고로 몰수하는 선에서 일단 하르팔로스 망명 건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 마케도니아 사절들이 거듭 방문하여 하르팔로스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아테네는 그를 거래패로 사용하기 위해 위의 요구를 3번이나 거절하였다.

다음 올림피아 제전[1] 때, 마케도니아는 폭탄 발표를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사자 니카노르[2]가 운집한 군중 앞에서 여태까지의 그리스 추방자들에 대한 일괄 대사면령을 포고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은 사면을 반겼지만 아테네는 예외였다. 당시 아테네의 식민지이던 사모스 섬에, 사모스의 본래 지배층이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추방당했던 사모스의 지배층들은 마케도니아의 지지를 받아 자신들의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다. 식민지를 사실상 잃게 된 것에 아테네는 분노했고, 반마케도니아 정서가 서서히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전쟁은 피하고 싶던 포키온은 하르팔로스를 넘겨주는 대신 아테네가 사모스의 종주권을 유지하는 선에서 협상을 시도했지만, 하르팔로스가 탈출하며 협상은 무산되었다. 결국 BC 323년 초, 알렉산드로스는 사모스는 사모스인들의 땅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아테네의 사모스 지배는 사실상 마무리됐다.

그리고 323년 6월 11일,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죽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아테네는 예전에 알렉산드로스가 죽었다고 설레발을 쳤다가 완전히 파괴된 테베의 기억 덕에 처음에는 가만히 있으면서 신중론을 폈다. 하지만 곧 바빌론에서 돌아온 목격자들이 대왕의 죽음을 확실히 알리자, 주전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히페레이데스는 비장의 패를 내세웠다. 바로 아나톨리아의 여러 태수들에게 고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귀환으로 일괄 해고되어 백수 신세가 된 그리스 용병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최남단의 타이나론에 결집했다는 정보를 물어온 것이다. 이 백수 용병들의 지휘관이 때마침 아테네인이던 레오스테네스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로스를 증오하는 자이기도 했다.

정예병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그 지휘관은 반마케도니아 성향이 강한 자국 시민인데다 때마침 하르팔로스 덕에 자금까지 있었으니 아테네가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아테네는 몰수한 하르팔로스의 자금으로 즉시 레오스테네스의 8천여 용병대를 고용하고, 2백여 척의 함대를 재건했다. 히페레이데스의 연설과 레오스테네스의 늠름한 군대에 반한 아테네 민회는 곧 전쟁을 결의하고, 아이톨리아 연맹테살리아, 코린토스아르고스 등을 끌어들여 그리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3. 라미아 공성전 (BC 323 - 322년)

이렇게 시작한 전쟁의 초반에는 그리스 동맹군이 승승장구했다. 마케도니아의 동맹인 보이오티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요충지 테르모필레에서 안티파트로스의 마케도니아군을 패퇴시키며 안티파트로스를 라미아 시로 몰아넣어 독 안의 쥐 신세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공성 역량이 부족했고, 설상가상으로 포위 공격을 지휘하던 레오스테네스가 투석에 맞아 어이없게 전사하면서 동력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그리스 동맹군은 안티필로스 등 새로운 지휘관 아래에 포위를 이어 나갔지만 라미아의 함락은 요원해 보였다.

또한, 아무리 디아도코이 내전에 돌입해 상잔을 저지를 예정인 마케도니아 장군들이더라도, 아직은 동료 마케도니아인끼리 도와야 한다는 정서를 가진 이들이 많았다. 이에 따라 아나톨리아의 계승자 장군들은 본국의 안티파트로스를 지원하기 위해 다시 그리스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4. 레온나토스의 지원 (BC 322년 겨울 - 봄)

처음으로 건너온 건 레온나토스였다. 페르디카스에게 바빌론 분할에서 프리기아 태수 자리를 받은 그는 페르디카스의 군대를 지원받고, 카파도키아 태수 자리를 받은 에우메네스를 위한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평정에 종사하고 있었다.

안티파트로스는 그런 레온나토스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자신의 딸과 혼인동맹을 제안했다. 레온나토스는 에우메네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에우메네스가 안티파트로스와 그의 사람 헤카타이오스에게 반감을 표하자[3]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누이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제안받은 것이다.

하지만 에우메네스는 레온나토스와 함께하는 걸 거부하고 페르디카스에게로 튀었다. 레온나토스는 보고를 받은 페르디카스가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 이전에, 헬레스폰트를 건너 유럽으로 향했다.

그가 해협을 언제 건넜는지는 논란이 있지만, 마케도니아 함대가 아테네 함대와 본격적으로 부딪히기 이전으로 보인다. 따라서 BC 322년 겨울, 함대의 작전이 일시 중지되는 계절에 헬레스폰트를 건넌 것으로 여겨진다.

마케도니아에 도착한 레온나토스는 마케도니아군을 추가로 징병하며 라미아를 향해 남하해 무방비한 그리스 동맹군을 덮치려 들었다. 하지만 레온나토스가 지척에 도착했음을 안 그리스 군은 라미아의 포위를 풀고, 비전투원과 치중을 멜리테이아로 철수시켰고 전투 부대는 레온나토스가 안티파트로스를 만나기 전 요격하여 각개격파하기 위해 북상했다. 그렇게 진격한 두 군대는 테살리아에서 조우했다.

그렇게 조우한 상태에서 기병끼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메논[4]이 지휘하는 테살리아 기병과 레온나토스의 마케도니아 기병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레온나토스가 전사하며 전투는 마케도니아의 패배로 끝났다. 기병이 패배한 걸 본 레온나토스의 보병은 험지로 후퇴했다가, 다음날 전장에 도착한 안티파트로스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레온나토스의 지원으로 안티파트로스는 라미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헬레스폰트 해협은 여전히 아테네 함대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지원군의 지휘관 레온나토스 또한 전사하면서 반쪽짜리 성공으로 끝나고 말았다.

5. 크라테로스의 지원 (BC 322년 봄 - 여름)

레온나토스의 지원은 허무하게 마무리 되었지만 마케도니아측에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다. 섭정 임무를 맡을 정도로 대왕의 신뢰를 받던 크라테로스가 추가 지원을 온 것이었다.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생전, 킬리키아에서 신규 함대의 건함을 감독한 후, 본국에 귀환해 섭정 임무를 승계받으라는 명령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죽었을 당시, 크라테로스는 여전히 킬리키아에 있었고, 그곳에 남아 있다가 제국의 분할과 안티파트로스의 지원요청을 들었다.

크라테로스는 부하 장수 클레이토스에게 신규 함대와 기존의 마케도니아 함대의 지휘를 맡겨 아테네의 함대와 싸우기 위해 헬레스폰트로 향했다. 클레이토스는 322년 봄의 아비도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여름의 아모르고스 해전에서 아테네의 마지막 함대를 격멸했다. 이 2차례의 해전으로 아테네는 헬레스폰트의 제해권을 상실했다.

그해 여름, 크라테로스의 군대는 해협을 건너 안티파트로스와 합류했다. 전력을 크게 증강한 마케도니아군은 그리스 동맹군과의 재결전을 위해 남하를 시작했다.

6. 크란논 전투 (BC 322년 여름)

라미아 전쟁의 결전은 BC 322년, 테살리아 크란논에서 벌어졌다. 안티파트로스가 총지휘하는 마케도니아군은 레온타노스의 잔여 군대와 크라테로스의 원군이 더해져 안티필로스가 지휘하는 그리스 동맹군을 수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스군은 레온나토스를 상대했을 때처럼 기병에 희망을 걸었다. 명성 높은 테살리아 기병대가 마케도니아 기병과 격돌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양익의 기병전이 아직 결착이 나지 않은 시점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마케도니아 보병이 그리스 보병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보병의 후퇴를 본 그리스 기병대도 후퇴를 결심하며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그리스 측이 신속하게 후퇴하면서 쌍방의 피해는 마케도니아군 130여명, 그리스 동맹군 500여명으로 상당히 적었다.

7. 이후

아직 그리스 동맹의 군대는 남아 있었지만, 패색이 짙어진 걸 인식한 안티필로스 등은 안티파트로스에게 강화 협상을 요청했다. 하지만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 동맹이라는 연합체와 교섭하는 걸 거부하며, 오로지 개별 도시국가들과만 강화하겠다고 못박았다. 그리스 동맹이 강화 조건을 거부하자, 마케도니아군은 시범 케이스로 테살리아의 몇몇 도시를 함락시켰고 이에 동맹은 금방 와해되었다.

이어서 안티파트로스는 전쟁의 주역인 아테네로 향했다. 포키온이 항복 조건을 중재하려 노력했지만, 결과는 패자에게 가혹한 편이었다. 아티카에는 마케도니아 주둔군이 들어섰고, 아테네에는 민주정 대신 포키온이 이끄는 과두정이 들어섰다. 반마케도니아 정치가 데모스테네스, 히페레이데스 등과 지지자들에겐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후에 아테네는 쇠락했지만, 여전히 나름의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BC 267 - 261년의 크레모니데스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편을 들어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조에 대항했다가 패배하며 최후의 독립성마저 상실하고 만다.


[1] 114회[2] 스타게이라의 니카노르, 파르메니온의 아들과는 동명이인.[3] 에우메네스와 동향인 카르디아 사람이었는데,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4] 파르살로스의 메논, 피로스 1세의 외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