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2 10:23:12

래리 앨런 앱셔



파일:Larry_Allen_Abshier.png

Larry Allen Abshier (1943년 ~ 1983년 7월 11일)

1. 개요2. 생애

1. 개요

일리노이 주 섐페인 카운티 어배나 출생으로 6.25 전쟁 이후에 최초로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보다 먼저) 1962년 5월에 월북미합중국 육군 병사다. 그 후에도 6명의 미군이 더 월북했는데 공식적인 월북 미군은 총 7명(전원 육군 사병)이다. 당시 대마초 흡연 6회[1] 전과로 처벌받기 두려워 월북하였다.

2. 생애

제임스 드레스녹과 비슷하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드레스녹의 증언에 의하면 매독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월북 초반에 선전도구로 이용되는 대신 호의호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레스녹을 포함한 몇 동료들과 소련 대사관으로 가서 망명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한 술 더떠 북한 당국에 고발해 버려서 망명은 실패하였으나 이들을 처벌하지는 않고 사상교육만 철저하게 시켰다. 이후 반미 선전영화를 찍으며 스타로 살았다.

월북 초기에는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북한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대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반미 교육을 통해 미국인을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 보듯이 가르쳤기 때문에 세뇌당한 입장에서는 악당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드레스녹의 주장에 따르면 처음에는 같은 처지의 드레스녹과 친하게 지냈으나 이후 미 육군 보병 병장 출신 찰스 로버트 젠킨스가 월북하면서 드레스녹과 사이가 틀어졌다. 드레스녹은 탈영 후 월북한 주제에 군 계급을 들먹이는 젠킨스가 고까웠으나 나머지 동료들은 젠킨스를 상사로 대우해주고 잘 지냈다고 한다. 반면 젠킨스는 드레스녹과 또 다른 월북 미군 페리시[2]가 앱셔를 부려먹어서 앱셔에게 드레스녹에게 더 이상 이용당하지 말라고 설득했고 둘이 합심해서 드레스녹을 때려눕혀서 드레스녹이 더는 앱셔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적었다.

1972년에 북한 공민증을 받은 후에는 페리시와 함께 살게 되어서 드레스녹과 젠킨스 모두 70년대에 앱셔가 뭘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딱 한 번 앱셔와 페리시에게 배치된 북한 요리사가 얼마나 예쁜지 궁금해서 구경하러 갔다가 겁이 난 드레스녹이 북측에 앱셔를 보러 갔다고 죄다 자백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비판을 받고 7년간 보지 못했다고 한다. 1978년에 앱셔가 불임 여성인 줄 알았던 북한 요리사를 임신시켰다고 젠킨스는 증언했다. 이후 1978년 마카오에서 납북된 태국 여성 아노차 판조이와 결혼했다.

1983년 7월 11일 40세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쓰러진 후 아내가 이웃집에 살던 젠킨스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으나 젠킨스가 도착하자마자 사망했다. 장례식은 북한 정부가 지원했으며 나름대로 잘 치러졌다고 한다. 하지만 7월 11일 0시 조금 넘어서 죽은 것을 대충 7월 10일 사망으로 기록하고 고향을 평양으로 적어서 젠킨스가 분노했다고 한다. 생전에 고향은 그리웠는지 월북 미군 동료들끼리 모여서 수다를 떨면 전부 고향 얘기밖에 안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아노차는 독일인과 재혼했다고 한다. 젠킨스에 따르면, 아노차를 1998년 이후 본 적은 없지만, 2003년 북한 정부에서 일본에 가지 않고 계속 북한에 남으면 아노차와 결혼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드레스녹의 말에 의하면 제리 웨인 패리시는 워낙 쾌활하고 말솜씨도 좋아 영화를 찍을 때도 연기력이 아주 뛰어났다고 했던 데 반해 앱셔는 평소에도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격이라 영화에 출연했을 때 연기력이 별로였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출연 영화를 보면 앱셔의 대사가 유독 적은 게 눈에 띈다.
[1] 당시 미국에서는 대마초 소지, 흡연이 불법이었다.[2] 제리 웨인 패리시(Jerry Wayne Parrish, 1944.3.10~1998.8.25), 1963년 12월 월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