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4:38

미군 월북

1. 개요2. 월북 주한미군들3. 기타 월북 미군

1. 개요

말 그대로 미군월북한 사건들. 현재까지 밝혀진 월북 미군은 총 7명이며 이 중 주한미군 소속은 6명이고 전부 병사로 알려져 있다.[1]

2. 월북 주한미군들

  • 월북 미군 중 아래 4명은 서로 알고 지냈다.
    • 래리 앨런 앱셔 - (6.25 전쟁 이후) 최초 월북 주한미군. 1962년 5월에 윌북했다. 납북태국 여성인 '아노챠'와 결혼해서 살다가 1983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앱셔의 나이는 겨우 마흔이었다.
    •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 - 두번째. 1962년 8월 15일에 월북했다. 육군 일병.
    • 제리 웨인 패리쉬[2] - 세번째. 1963년 12월에 월북했다.[3] 켄터키 주 핸더슨 출신으로 미군 특수 요원이었다. 계부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가족을 자주 구타했으며 설상가상으로 계부는 패리시가 의붓 여동생과 성관계를 하는 사이라고 마구 몰아세워서 돌아오면 죽이겠다고 패리시를 내쫓았다. 이후 앱셔와 드레스녹의 이야기를 듣고 1963년 12월 국경순찰 중에 월북했다. 레바논 출신 여자와 결혼해 3명의 아들을 두었다. 패리시의 아내는 납북되었다는 말이 많았는데 본인은 방송에 나와서 "내 가족들도 레바논 정부도 내가 여기 산다는 것을 안다"면서 납북설을 극구 부인했다. 자초지종은 이 여자가 북한으로 관광을 왔다가 우연히 패리시와 만나서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을 레바논에 돌아와서 알게 되었고 레바논의 가족들은 당장 애 아빠에게 돌아가라고 그녀를 추방해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와 패리시와 결혼한 것이다.[4] 신부전증으로 인하여 1998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부인과 자식들은 여전히 평양에 살고 있다고 한다. 드레스녹의 말에 의하면 영화배우로 동원됐을 당시 연기력이 아주 뛰어났다고 평했으며 실제로 패리시는 각종 선전 영화에서 연기력 덕분인지 중요한 배역을 많이 맡았다.
    • 찰스 로버트 젠킨스 - 네번째. 1965년 1월 5일에 월북했다. 육군 보병병장.
  • 파일:271A5149542AF32412.png
    • 사진상 좌측부터 드레스녹, 젠킨스, 앱셔, 페리쉬. 월북한 순서는 앱셔, 드레스녹, 페리쉬, 젠킨스 순.
    • 래리 앨런 앱셔는 몰래 대마초를 피우다 들킨 데다 총기마저 분실한 통에 처벌이 두려워 제일 먼저 월북하였고 드레스녹이 두 번째로 월북했다.[5]
    • 제리 웨인 페리쉬는 이 두 명이 잘 살고 있다는 대남방송을 듣고 "거지같던 가정사 때문에 이렇게 살 바에 차라리 넘어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여 월북하였다.
    • 젠킨스는 베트남 전쟁에 끌려가고 싶지 않아 두려워하던 중 맥주 10캔을 마시고 수색을 지휘하다가 M14 소총을 들고 넘어갔다. 그런데 정작 젠킨스가 있던 부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월북 후 젠킨스는 처음부터 소련으로 망명할 생각을 갖고 있었지 북한에서 여생을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한국어도 거의 익히지 못해서 월북한 것을 매우 후회하였다고 한다.
    • 드레스녹은 2016년 7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젠킨스도 2017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나머지 두 명은 드레스녹과 젠킨스보다 일찍 세상을 떴는데 앱셔는 1983년에 향년 40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돌연사하였고 페리쉬는 30대부터 앓아 오던 신부전증으로 인해 20년 동안 투병하다가 1996년에 앱셔의 뒤를 이어 54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 조지프 T. 화이트 - 다섯번째이자 네번째로부터 20년만의 주한미군 월북자. 육군 일병이며 1982년에 월북했다. 월북한 지 3년 뒤인 1985년에 청천강에서 수영하다가 익사했다고 북한 당국이 가족에게 국제 서한을 발송해 사망 사실을 통보했다. # 물론 이것은 북한의 통보로, 진짜로 익사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불명이다.[6] 젠킨스는 1984년에 북한 측에 화이트를 우리와 같이 살게 해 주면 어떠냐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북한 당국자가 고개를 저으며 "화이트는 못 써!"라면서 모종의 이유로 이미 전신마비 환자가 되었다고 설명했고 일본에서 들은 익사설과 북한에서 들은 설 중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서술했다. 1982년 오남철 사건이 발생하자 북한은 화이트의 존재를 미국과의 협상 조건으로 써먹으려고 했다.

3. 기타 월북 미군

  • 로이 정(정려섭) 일병 : 1979년 6월 실종된 서독 주둔 미군. 동구권 국가를 통해 7~8월 입북[7]했다고 알려진 재미교포. 2004년 전후 사망했다.


[1] 단, 한국군에서 공식적으로 병사부사관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주로 (특히 육군) 병(군인)만 언급되는 편이고 이는 이등병~병장을 의미한다. 하지만 미군의 병장은 한국의 하사와 비슷한 권위를 갖는 부사관 신분이다.[2] 또는 패리시[3] 북한 영화에 단골 악역 미군으로 잘 나왔는데 주로 행동대장 따까리 역으로 출연했다.[4] 근데 월북 미군이라는 극도로 통제되는 신분의 이들이 외국인 관광객을 꼬셔서 원나잇을 할 수 있던 처지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납북설은 사실이 아닐지언정 적어도 북한 당국이 둘의 만남을 주선했거나 묵인했지 않나는 의심은 가능하다.[5] 앱셔가 드레스녹을 만나자 매우 반가워했다고 한다. 막상 드레스녹은 앱셔가 누군지 몰라 버벅대다가 신문에 앱셔의 소식이 있던 걸 기억해냈고 둘은 당시 드문 북한의 백인이었기 때문에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6] 어쩌면 정치범수용소에 있다는 6.25 전쟁 당시 미군 장교가 사실 이 사람일 수도 있다.[7] 당사자 가족들은 납치(납북)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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