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6 22:17:56

로즈마리 니트리비트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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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로즈마리살인.jpg

피해자의 생전 모습.

1. 개요2. 피해자 로즈마리 니트리비트3. 경찰 수사와 하인츠 폴만의 재판

1. 개요

1957년 10월 29일, 서독프랑크푸르트시에서 24세 매춘부 로잘리 마리 아우구스테 니트리비트(Rosalie Marie Auguste Nitribitt, 1933~1957)가 피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소재로 소설, 영화, 뮤지컬이 만들어지며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age(1957-10-2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2. 피해자 로즈마리 니트리비트

로즈마리 니트리비트의 풀네임은 '로잘리 마리 아우구스테 니트리비트'로, 1933년 2월 1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뒤셀도르프 시에서 출생했다.[1]

로즈마리에겐 어린 이부자매 2명이 있었고, 라팅엔과 뒤셀도르프 등지를 전전하며 어머니와 함께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다. 이후 로즈마리와 자매들은 소년원에 있었다가 1939년 이후에 입양되어 양부모와 함께 살았았는데, 11세 때 강간을 당했다.[2]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10대에 벌써 매춘에 뛰어들었다. 매춘에 뛰어든 이후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탈출하기를 반복했고 이후 그녀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으로 옮겨 잠시 웨이트리스 일과 모델일을 했지만 또 매춘에 뛰어들었고, 결국 1951년에 프랑크푸르트 기차역에서 매춘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로즈마리를 잘 알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무렵 로즈마리는 상류층 사회에서 대화를 지속하고 교양 있는 손님들의 마음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변변찮은 출신을 열심히 속이려 했고, 그래서 프랑스어영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로즈마리 니트리비트는 유명한 매춘부가 되었고 손님들 중에는 아예 스폰이 된 경우도 있었다. 한 손님은 로즈마리에게 오펠 카피탠(Opel Kapitän) 중고차를 선물했고, 어떤 손님은 휴가 때 로즈마리를 데리고 지중해로 여행을 갈 정도였다.

이렇게 상류층 인사들과 친해진 덕분에 로즈마리는 매춘부인데도 부자가 되었고, 아예 메르세데스-벤츠 SL 190SL(Mercedes-Benz 190SL)를 새 차로 장만할 정도였다. 그리고 1956년에는 슈티프트슈트라세(Stiftstraße) 36번지에 있는 고급 아파트로 집을 옮겼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1956년에 로즈마리 니트리비트는 무려 8만 독일 마르크를 벌었다고 한다. 당시 서독의 집 1채 가격이 2만 5천~3만 마르크였음을 감안하면, 매춘으로 무려 단독 주택 3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벌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 나가던(?) 중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1957년 11월 1일, 로즈마리는 프랑크푸르트 시에 위치한 자기 아파트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검안 결과 로즈마리는 발견 시점에서 이미 죽은 지 3일이 지났고, 머리에 상처가 있었으며 교살된 흔적도 있었다. 즉, 누군가가 머리를 때려 기절시킨 후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볼 수 있었다. 로즈마리 니트리비트는 뒤셀도르프의 노르트프리트호프(Nordfriedhof)에 매장되었으나, 머리만큼은 경찰이 증거물로 따로 떼어 프랑크푸르트의 범죄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2008년 2월 10일에야 머리까지 정식으로 매장되었다.

3. 경찰 수사와 하인츠 폴만의 재판

경찰은 사건 수사를 많은 증거들이 첫날 동안 훼손되었는데도 매우 어물쩡거리며 지휘했다. 귄터 사흐와 로즈마리의 가까운 친구, 후원자 크룹 회사의 헤롤드 폰 볼렌과 할바흐 회장 형제를 포함한 몇몇 유명한 시민들이 로즈마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하인츠 폴만(Heinz Pohlmann)은 사업가이자 니트리비트의 친구였는데 이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가 되었다. 하인츠는 사건이 있었던 10월 29일에 로즈마리를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하인츠 풀만은 사업 실패로 막대한 채무를 졌는데, 참 묘하게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후에 그 막대한 빚을 몽땅 다 해결했을 뿐 아니라 비싼 자동차까지 구입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 자금의 출처가 수상할 수밖에 없는데 희한하게 하인츠 폴만은 돈의 출처를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신문이 있는 동안 계속해서 모순된 정보만을 제공했다. 하인츠는 자기 직장 공금을 횡령해서 빚을 해결했다고 한다.

결국 하인츠 폴만은 로즈마리 니트리비트 살인죄로 기소되어 복역했지만 1960년 7월 무죄로 석방되었다. 폴만의 변호사는 경찰이 니트리비트의 아파트 조사, 그곳의 정밀한 온도 측정, 그가 그녀의 죽음의 정확한 시간을 결정하는데 필수적인 사실에 대해 논쟁했다. 검찰은 석방에 대해 어떠한 입장 발표도 하지 않았다. 경찰이 살인자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자 언론에서는 상류층 인사가 사건 해결을 좌절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1] 1960~1970년대 파독 광부들이 주로 파견갔던 곳이 바로 뒤셀도르프다.[2] 강간 피해자는 종종 그 트라우마로 인하여 자신이 더러워졌다, 혹은 내 인생은 끝났다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 일부 강간 피해자의 경우 매춘에 뛰어들거나 혹은 과도하게 문란한 성생활을 유지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사회가 강간 피해자를 보는 시선이 가혹할수록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자주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