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생 동명이인 야구 선수에 대한 내용은 루이스 곤잘레스(197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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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 ||||
1999 | 2001 | 2002 | 2003 | 2005 |
200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외야수 부문 실버 슬러거 | ||||
블라디미르 게레로 (몬트리올 엑스포스)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루이스 곤잘레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블라디미르 게레로 (몬트리올 엑스포스)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새미 소사 (시카고 컵스) | → | 루이스 곤잘레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 → | 제이슨 지암비 (뉴욕 양키스) |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번호 26번 | ||||
루이 메도우스 (1988~1990) | → | 루이스 곤잘레스 (1990~1995) | → | 결번 |
시카고 컵스 등번호 25번 | ||||
칼 로즈 (1993~1995) | → | 루이스 곤잘레스 (1995~1996) | → | 데이브 한센 (1997) |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번호 26번 | ||||
결번 | → | 루이스 곤잘레스 (1997) | → | 마이크 램 (2004~2007) |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번호 28번 | ||||
스캇 샌더스 (1997) | → | 루이스 곤잘레스 (1998) | → | 대니 패터슨 (2000~2003) |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등번호 20번 | ||||
제프 수판 (1998) | → | 루이스 곤잘레스 (1999~2006) | → | 영구결번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26번 | ||||
에이너 디아즈 (2006) | → | 루이스 곤잘레스 (2007) | → | 게리 베넷 (2008) |
플로리다 말린스 등번호 26번 | ||||
토드 린덴 (2007) | → | 루이스 곤잘레스 (2008) | → | 오스틴 컨스 (2012~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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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71930><colcolor=#fff>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No. 20 | |
루이스 곤잘레스 Luis Gonzalez | |
본명 | 루이스 에밀리오 곤잘레스 Luis Emilio Gonzalez |
출생 | 1967년 9월 3일 ([age(1967-09-03)]세) |
플로리다 주 탬파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토마스 제퍼슨 고등학교 - 사우스 앨라배마 대학교 |
신체 | 188cm / 81kg |
포지션 | 좌익수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 입단 | 1988년 드래프트 4라운드 (전체 90번, HOU) |
소속팀 | 휴스턴 애스트로스 (1990~1995) 시카고 컵스 (1995~1996) 휴스턴 애스트로스 (1997)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98)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1999~2006)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7) 플로리다 말린스 (2008) |
기록 | 사이클링 히트 (2000.7.5.)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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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직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외야수. 흔히 루이곤조라 불린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김병현과 한솥밥을 먹을 때 신경을 많이 써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별명은 곤조(Gonzo)[2]2. 선수 경력
2.1. 휴스턴 애스트로스 1기
부모가 쿠바 망명객 출신으로[3]의 집권 이후 탬파 시의 서부에 있는 동네에서 자라, 토마스 제퍼슨 고교를 졸업했다.[4] 그 후 사우스 앨라배마 대학을 거쳐 1988년 드래프트로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3년간 마이너리그에서 뛰다 1990년 더블A에서 24홈런을 치고 시즌 후반에 빅리그로 콜업되었지만 빅리그 울렁증에 시달렸는지 겨우 1할의 타율만을 기록한다. 하지만 1991년에는 시카고 컵스에 있던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 한 경기 2홈런을 작렬하고, 50개의 장타(2루타+3루타+홈런)를 치면서 애스트로스 프랜차이즈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심지어 한 경기에 5타점이나 먹는 영양사 노릇까지 도맡았다. 하지만 시즌이 한창 달아오른 그 해 8월에 어깨 부상이 터지는 바람에 암흑기가 시작된다.1992년에는 2할 4푼의 타율과 10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제대로 부진했으며, 1993년 3할대의 타율과 15개의 홈런을 기록한 뒤로, 1994년~1997년 4시즌 동안 고작 79타점밖에 기록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2.2. 시카고 컵스
1995년 스캇 서비스와 함께 릭 윌킨스를 상대로 컵스로 트레이드되었다.2.3. 휴스턴 애스트로스 2기
1997년 FA 자격을 얻고 휴스턴으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돌아온 휴스턴에서 곤잘레스는 부진하기만 했다.2.4.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98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이적했는데 이때부터 오픈 스탠스 타격폼을 쓰기 시작했고, 그 덕인지 처음으로 20홈런을 넘겼을 뿐만 아니라 통산 1,000안타와 500타점을 디트로이트에서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아내가 세 쌍둥이를 낳았다.[5]하지만 디트로이트는 옆동네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묻히면서 꼴찌로 전락했고, 리빌딩의 하나로 카림 가르시아와 곤잘레스를 트레이드시켜 버린다.
2.5.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처음에 디백스는 곤잘레스를 뉴욕 메츠에서 데리고 온 버나드 길키와 좌익수 플래툰을 돌렸으나, 우익수 토니 워맥이 부상으로 폭망하자 길키를 우익수로 돌리면서 마침내 곤잘레스는 주전 좌익수 자리를 찾게 된다.1999년 디백스는 우타자 맷 윌리엄스-제이 벨과 스티브 핀리-루이스 곤잘레스가 터지면서 무려 100승을 거두며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고, 같은 해 곤잘레스는 30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우고 .336 26홈런 111타점 (그리고 45개의 2루타)을 기록하며 올스타전에까지 출장하게 된다. 2000년에는 투수진이 패망했음에도 불구하고 3할 31홈런 114타점과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으며, 미일 슈퍼 게임에도 출장한다.
마침내 2001년에는 커리어하이를 찍는데, 시즌 초반부터 신이 된 배리 본즈, 새미 소사와 홈런 레이스를 벌이며 57홈런(리그3위[6]) 142타점 OPS 1.117을 기록한다. 타율은 .325 게다가 이 해에 디백스는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의 활약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월드 시리즈 진출에도 성공한다.
2002년과 2003년에도 25홈런을 넘기며 활약했지만, 세월을 거스르지 못해 2004년부터 부진을 거듭했다. 폭풍현질의 부작용으로 재정적으로 흔들리던 디백스는 결국 2006년 곤잘레스를 놓아주기에 이른다.
2.6.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7년 다저스로 이적했다. 당시 다저스 팬덤에서는 베테랑으로서의 인화까지 기대하고 영입한 곤잘레스가 정작 영입된 후 제프 켄트와 파벌을 형성한 후 본인의 줄어드는 출장시간을 두고 맷 켐프, 제임스 로니, 안드레 이디어 등의 당시 젊은 선수들과 다투다가 시즌 종료 후 '다저스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전적이 있는지라 한국 출신 메이저리거들을 위주로 형성된 국내 대다수의 MLB 팬덤에서 김병현과의 좋은 인연으로 인해 형성된 긍정적 여론과는 온도 차이가 존재한다.'탈락' 다저스, 고참-신예 내분 심화2.7. 플로리다 말린스
2008년 말린스를 이적했지만 2009년 8월 29일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통산성적은 타율 0.283, 출루율 0.367, 장타율 0.479에 2591안타 128도루.3. 여담
- 피트 로즈를 존경한다고 밝혔다. 2001년 4월 한 달에 13홈런이나 치는 타이 기록을 세우자, 로즈가 루이곤조한테 축하 편지를 보내기도.
- 위에서도 밝혔듯, 티노 마르티네스와는 죽마고우 사이이다. 2001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루이곤조가 디백스 소속으로, 마르티네스가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 나와, 친구의 대결이라는 진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티노 마르티네스와 미겔 바티스타과 빈볼 시비 때문에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날 때에도 가장 먼저 달려와 친구를 말렸다. 오프 시즌에는 가족끼리 밥도 함께 먹을 만큼 절친이고 티노가 처음 내셔널 리그로 왔을 때 조언도 많이 해주었다고 한다.
- 실력 만큼이나 팀 분위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리더 스타일이다. 민훈기 기자는 "빅리그를 취재하면서 만난 많은 선수들 중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괜찮았던 선수가 루이스 곤잘레스였습니다. 과거 김병현을 가끔 취재하러 가면 늘 친절한 미소와 호의를 보였던 그에 대한 기억이 따뜻하게 남아있습니다."라고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도 했다.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결정짓는 안타 직후, 그에게 수많은 선수들이 몰려와 끌어안고 환호하는 와중에, 루이곤조는 누군가를 찾아서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니다 발견하고 힘껏 안아주는데.. 누구보다 마음 고생이 심했을 김병현 선수였다. 2001년 월드 시리즈 DVD에도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BK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모든 한국인이 지켜보고 있어.'라고 활짝 웃으며 격려하는 모습이 나온다.
- 2002년 시즌 시작을 앞둔 인터뷰에서 디백스 라커룸에는 주로 크리드와 같은 미국 락밴드의 음악을 틀고 있는데, 김병현이 한국 음악을 가져오면 틀어줄 거라고 답했다. 본인도 한국 음악이 궁금했던 모양.
- 단점이 지적되면 본인이 이를 커버하려 노력하는 성실한 스타일. 오픈 스탠스이면 장타를 쳐내는데 불리하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량을 늘려 손목힘을 강화, 20홈런 이상 꾸준히 쳐주는 선수로 발돋움했다. 외야 송구의 스피드나 파워는 부족한 편인데 타격 실력이 좋아지면서 외야수 출장 회수가 많아지자, 결정적인 순간에 정확한 홈 송구로 주자를 아웃시키는 장면이 자주 잡혔다.
- 2011년 피닉스에서 열린 올스타 전야 퓨처스게임에서 월드팀 (그러니까, 해외 출신으로 입단했거나, 히스패닉/아시안계 등등인 선수들로 모인 팀)의 감독을 맡았는데, 미국팀의 감독을 맡은 마이크 피아자가 영어로 유창하게 영어식 선수 이름들을 달달 읽어내고 윙크까지 날리는 동안 우리의 곤조는 생소한 중국계 이름, 히스패닉계 이름 (쿠바계이긴 하지만 루이곤조는 일단 태어날 때부터 미국인이니깐..), 한국 선수 이름을 읽으나 생고생을 했다.
- 2001년의 임팩트 때문에 한 시즌 반짝하고 사라진 선수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통산 2591안타 354홈런에 스테로이드 시대를 감안해도 wRC+ 118라는 준수한 비율스탯과 fWAR 55.2, bWAR 51.6을 기록한, 레전드급은 아니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중 한명이였다. 또 1999년엔 206안타로 내셔널 리그 최다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 디백스에서 옵션이 거절되어 홈경기에 들어선 마지막 날 기립박수를 받았는데, 김병현이 당시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발투수였고 그날 김병현은 신발끈을 고쳐묶으면서 디백스의 레전드가 기립박수를 받는 시간을 오래 갖게 해준 바 있다.
- 은퇴 후에는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디백스 구단 주관 방송사의 프리뷰쇼 등에 패널로도 출연하고 있다.
4. 약물 의혹과 논란
- 피닉스의 체이스 필드가 타자친화구장이기는 하지만, 애리조나에서 터진 엄청난 장타력에 사실은 스테로이드 같은 약물의 힘이 작용했다, 하는 설이 돌고 있다. 안 그래도 경쟁자들이 너무 많아(심지어 동료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 또한 경쟁상대.) 호프집에서 후보로 버틸 수 있을까 말까 한 애매한 상황에서, 약을 한 게 사실인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냥 물건너 가는 것이다. 게다가 약물 복용으로 퇴출된 팀메이트 제이슨 그림즐리가 루이곤조를 한 패로 언급하기도 했다.
- 하지만 곤조 본인은 강경하게 부정하고 있다. 루이곤조의 약물설에 회의적인 사람들의 가장 큰 논거는 그의 근육 벌크업이 두드러지진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홈런 치는 스타일 자체가 오픈 스탠스를 이용하여 몸을 빠르게 회전, 배트에 공이 맞는 임팩트 순간에 힘을 집중시키는 스타일이다. 실제로 국내 팬들이 루이곤조를 보면서 '일견 호리호리해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홈런을 쳐내는 걸까' 궁금해 했을 만큼 체형 변화가 심하지 않았다.[7]
- 곤잘레스가 홈런을 많이 친 것 같지만 30홈런 넘는 시즌은 두번(2000년 31개, 2001년 57개) 정도로, 기본적으로는 20홈런 전후의 중장거리형 타자였다. 단지 2001년에 플루크가 심하게 터졌을 뿐이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99~01년)에 애리조나에서는 유난히 베테랑 선수들의 장타력이 폭발한 경우가 많아서, 아무리 애리조나 구장이 타자에게 유리하다고 해도 의심하는 눈초리가 많은 편이다. [8]
- 또 한 가지는 역시 2001년의 플루크가 워낙 역대급 플루크라는 것. 이전까지 31홈런이 최고 기록이었던 그가, 대부분의 타자들의 장타력이 황혼기에 접어드는 나이 34에 난데없이 무려 57 홈런을 기록한 것이다. 1997년 전까지 야구 역사상 57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베이브 루스, 로저 매리스, 행크 그린버그, 지미 폭스 단 4명에 불과했다.[9] 2002년 이후에도 한 시즌 57홈런 이상을 친 선수는 지안카를로 스탠튼과 애런 저지뿐이다.
- 그런데 이런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는데도 루이곤조는 그 해 NL 홈런 순위 3위에 불과했다. 1위와 2위엔 야구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약쟁이들이었던 배리 본즈와 새미 소사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 이 시즌에 NL MVP 10순위 내에 5명이 자신의 홈런 커리어하이를 갈아치웠다. 때문에 루이곤조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동시기에 홈런 수가 단기적으로만 급격히 증가한 브래디 앤더슨, 브렛 분, 그렉 본, 헨리 로드리게스[10] 역시도 의혹이 증명되거나 선수가 시인하진 않았지만 약물 의혹이 짙은 선수들이다.
- 이 시즌에 루이곤조는 총 419루타를 기록했고, 이는 역대 MLB 단일시즌 최다루타 10위 기록으로 루 게릭과 조 디마지오 사이에 위치하는 기록이다. 이 해 루이곤조의 IsoP[11] 수치는 0.363이었는데, 참고로 약쟁이들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 38년간 단일 시즌 최다홈런 기록을 세웠던 1961년의 로저 매리스가 IsoP .351이었다. 이 시즌 이후로 루이곤조는 단 한번도 30홈런, IsoP 0.250조차 기록하지 못했다.
5. 명예의 전당 및 영구결번
-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선 첫해 5표(0.9%)를 얻으며 그냥 광탈했다.
- 명예의 전당 관련해서는 곤잘레스가 광탈한 것이 약물 의혹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곤잘레스의 성적이 명전에 들어가기에는 부족했다. 에드가 마르티네즈와 비교하면 에드가는 뒤늦게 데뷔하여 누적에서 손해를 본 대신 압도적인 비율스탯을 확보한 반면 (OPS+ 147) 곤잘레스는 전성기는 기껏해야 5년 정도로 상당히 짧았고 그럭저럭 활동한 기간은 길었다. 곤잘레스의 통산 OPS+ 는 119이며, 에드가 마르티네즈의 평균 OPS+인 147을 넘은 시즌은 딱 2001년 한번 뿐이다. 나머지 시즌은 전성기라고 해도 에드가 마르티네즈의 평균 성적도 넘지 못했다. 그렇다고 3000안타 500홈런급 누적을 채운 것도 아니고, 또한 2001년이 워낙 역대급 시즌이긴 하지만 명예의 전당은 1년 활약했다고 해서 큰 플러스를 받지도 못한다. 여러 모로 명전에 들어가기는 애매했다. 곤잘레스가 비록 명예의 전당 통계의 HOF 모니터는 103으로, 명전 입성자 평균 정도는 가는 지수를 찍었지만, 다른 통계인 블랙 잉크, 그레이 잉크, JAWS는 평균에 한참 못미친다.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2001년 4월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이 달의 선수 상 | ||||
리차드 이달고 (휴스턴 애스트로스) | → | 루이스 곤잘레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 → |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2001년 6월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이 달의 선수 상 | ||||
배리 본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 루이스 곤잘레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 → | 제프 배그웰 (휴스턴 애스트로스) |
[1] 2001년 월드 시리즈 당시 홈런을 맞고 주저앉은 김병현을 마크 그레이스가 얼른 가서 일으켜주는 장면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유달리 고참이 많았던 디백스에서 김병현은 여러 모로 챙겨주고픈 막둥이 포지션이었다. 김병현이 타석에서 활약하자 커트 실링이 배트를 쿠킹호일로 말아 김병현에게 실버 슬러거 트로피를 만들어준 것도 유명한 일. 월드 시리즈 DVD에도 고참 선수들이 '많이 힘들었을 텐데, 병현 킴에게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라며 활짝 웃으며 인터뷰할 때 김병현이 우승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삽입하기도 했다.[2] 곤조는 흔히 곤잘레스의 애칭으로 자주 쓰이며, MLB에서 가장 유명한 곤조는 MVP출신 거포 약쟁이 후안 곤잘레스 (텍사스 레인저스)였으나, 혹자는 구분을 위해 후안곤조/루이곤조라고 나누기도 한다. 후안 곤잘레스는 다른 닉네임인 이고르를 쓰기도 하고.[3] 쿠바 사람들이 흑화되어버린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쿠바 혁명으로 집권한 피델 카스트로도 만만치 않게 자유주의자들을 갈궈댔다. 아마 곤조의 아버지도 카스트로가 싫어서 미국으로 왔을지도.[4] 이때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바로 티노 마르티네스.[5] 아들 하나, 딸 둘을 출산했고 아들 제이콥 곤잘레스는 2017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2라운드로 지명되었다.[6] 본즈 73개, 소사 64개 이은 3위. 이 기록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시즌 홈런 역대 1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7] 실제로 2018년 타격 포인트를 앞에 형성하여 장타력을 크게 향상시킨 무키 베츠와, 2017년 어퍼스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20홈런을 기록한 엘비스 앤드루스의 예가 있기 때문에 2001년 성적만으로 루이곤조가 약을 했는지는 확실히 알 순 없다.[8] 비슷한 시기 곤잘레스 한명만 홈런 플루크가 터진게 아니었다. 당시 주전 유격수 제이 벨의 경우 1999년 전년대비 18개를 더친 38홈런 커리어하이를 찍었고, 주전 중견수 스티브 핀리도 99,00시즌 2년연속 30+인 34,35홈런 커리어하이, 주전 우익수 레지 샌더스는 00시즌 애틀랜타에서 11홈런밖에 못쳤지만 01시즌 디백스에서 커리어하이 33홈런을 쏘아올렸다. 이들 중 맷 윌리엄스는 약물복용이 확인되기도 했다.[9] 이 중 3명은 명예의 전당 문 부수고 들어간 선수들. 로저 매리스는 손목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가 너무 짧았고 누적 스탯이 부족하여 15수 끝에 결국 입성 실패했다.[10] 마침 전부 체형이 호리호리한 타자들[11] Isolated Power. 절대 장타율. 타자의 완력을 나타내는 세이버매트릭 통계.[12] 하지만 보스턴 레드삭스가 오티즈가 약쟁이임에도 영구결번 해준 것을 보면 만약 약쟁이라 하여도 어영부영 넘어갈 공산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