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11 00:07:33

마리우스 러커투슈

루마니아의 축구 감독
파일:Marius_Lăcătus.jpg
<colbgcolor=#eee><colcolor=#000,#e5e5e5> 이름 마리우스 러커투슈
Marius Lăcătuș
본명 마리우스 미하이 러커투슈
Marius Mihai Lăcătuș
출생 1964년 4월 5일 ([age(1964-04-05)]세)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브라쇼브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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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7cm|체중 미상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 선수 FC 브라쇼브 (1981~1983)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1983~1990)
ACF 피오렌티나 (1990~1991)
레알 오비에도 (1991~1993)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1993~1999)
나치오날 부쿠레슈티 (2000)
감독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1997~2000 / 선수 겸 코치)
나치오날 부쿠레슈티 (2000 / 선수 겸 코치)
나치오날 부쿠레슈티 (2000)
파나마 대표팀 (2001 / 수석코치)
오첼룰 갈라치 (2002)
FC 브라쇼브 (2002~2003)
CSM 차흘러울 피아트라 네암츠 (2004)
인테르 가자 부쿠레슈티 (2005)
FC UTA 아라드 (2006~2007)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2007~2008)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2008~2009)
FC 바슬루이 (2009~2010)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2010~2011)
ASA 트르구무레슈 (2012)
CSMS 이아시 (2013~2014)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2018~2019)
국가대표 84경기 13골 (루마니아 / 1984~1998)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감독 경력

1. 개요

루마니아축구 선수 출신 감독. 루마니아 대표팀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의 전설적인 공격수 중 한 명으로, 빠른 스피드와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유명하며 야수(Fiara)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스테아우아 소속으로 104경기 무패를 이끌었으며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는 당시 세 번째 키커로 나서서 승부차기를 성공시키는 등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또한 ACF 피오렌티나, 레알 오비에도에서 뛰기도 하면서 해외 경험을 쌓았고 다시 스테아우아로 돌아와 팀의 2번째 전성기를 이끌기도 하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브라쇼브에서 태어난 마리우스 러커투슈는 1977년부터 1980년까지 지역 구단인 FC 브라쇼브 유스팀에서 성장했으며, 1980년 성인팀으로 승격하여 1983년까지 48경기에 출전해 5골을 기록했다. 그의 고향 클럽에서 보여준 탁월한 기량을 통해 루마니아 최고의 클럽인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의 눈에 들게 되었다.

1983년 스테아우아로 이적한 후, 러커투슈는 클럽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시기를 함께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처음으로 참가한 유러피언컵에서 모든 경기를 출전하며 팀의 결승 진출에 일조한 것을 시작으로 200경기에 출전하여 59골을 기록했으며, 클럽이 5번 연속으로 디비지아 A 우승을 차지하는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러커투슈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바로 1986 유러피언컵 결승전이었다. 당시 그는 FC 바르셀로나와의 승부차기 세 번째 키커로 나섰는데, 앞선 키커들인 미하일 마제아루라슬로 뵐뢰니가 실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의 선수들도 연달아 실축했고, 러커투슈와 가비 발린트페널티킥을 성공적으로 넣으면서 스테아우아는 우승을 달성했다. 이 우승은 동유럽 팀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또한 1986년 인터컨티넨탈컵UEFA 슈퍼컵 등에도 출전하면서 국제적인 경험을 쌓았다.

그는 또한 1987년, 1988년, 1989년 루마니아컵 우승을 거머쥐었고, 1988-89 유러피언컵에서 8경기 7골을 터뜨리며 팀의 역사적인 두 번째 결승 진출을 함께하는 등 후배이자 떠오르는 신성 게오르게 하지에 밀리지 않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AC 밀란과의 결승전에서는 밀란의 수비진을 뚫지 못하면서 하지와 함께 침묵하였고 팀은 0-4로 대패하였다. 그래도 이 시기 스테아우아는 루마니아 리그에서 104경기 연속 무패라는 놀라운 기록을 달성했으며, 러커투슈는 여전히 이 전설적인 팀의 중심 선수였다.

러커투슈는 1990-91 시즌을 앞두고 이탈리아 세리에 A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다. 그러나 피오렌티나에서는 21경기 출전 3골에 그치며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주로 코파 이탈리아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며, 아탈란타 BC를 상대로 2골, AC 체세나를 상대로 1골을 기록했다.

그렇게 피오렌티나에서 1시즌을 보낸 후, 러커투슈는 스페인 라리가레알 오비에도로 이적했다. 여기서 그는 51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하며 더 안정적인 성적을 보여주었다. 오비에도 시절 그는 팀의 중요한 선수로 활약했으며, 1991년에는 UEFA컵에도 참가하는 등 클럽의 황금기를 함께 했다.

1993년, 러커투슈는 자신의 심장이 있는 클럽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스테아우아 시절, 그는 팀의 주장으로서 157경기에 출전해 39골을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팀은 5번의 리그 우승과 4번의 루마니아컵 우승, 3번의 루마니아 슈퍼컵 우승을 차지했다. 러커투슈는 스테아우아의 두 번째 황금기를 이끄는 핵심 선수였다.

마지막으로 2000년에는 나치오날 부쿠레슈티로 이적하여 12경기에 출전했으나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 러커투슈는 여기서 반 시즌을 뛴 후 2000년에 은퇴를 선언했다.

러커투슈는 루마니아 리그 통산 414경기에 출전해 103골을 기록했으며,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 21경기 3골, 스페인 라리가에서 51경기 7골을 기록했다. 또한 유럽대회에서는 통산 72경기에 출전해 16골을 기록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러커투슈는 1984년부터 1998년까지 루마니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며 83경기에 출전해 13골을 기록했다. 1982년부터 1983년까지는 U-21 대표팀에서 6경기 1골, 1984년에는 올림픽 대표팀에서 3경기를 소화했다.

그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6년 유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등 메이저 대회에 참가했다. 특히 1990년 월드컵에서는 소련을 상대로 2골을 넣어 루마니아의 역사적인 2-0 승리를 이끌었다. 1995년에는 프랑스를 상대로 루마니아 대표팀의 800번째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루마니아 역사상 최고 성적을 기록했던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소집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루마니아 축구계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1994년도 시기의 러커투슈는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뛰는 등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에서 여전히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월드컵 예선 초반 7경기에 출전했었다.

소집 탈락의 배경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었다. 먼저 그는 당시 소속팀이었던 레알 오비에도와의 재계약 조건에 국가대표팀 참가를 포기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자 이를 거부하고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또한 웨일스와의 예선 경기 직전 무릎에 경미한 부상을 입었지만 출전에 문제는 없었으나 이후 예선 마지막 3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당시 국대를 이끌었었던 안겔 이오르더네스쿠 前 국가대표팀 감독은 26년이 지난 2020년에 러커투슈에게 큰 불의를 저질렀다고 인정하며 사과했다. 러커투슈 본인도 2020년 인터뷰2023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탈락한 것이 "100% 이오르더네스쿠의 결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암시하며 축구계의 다른 인물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이 실망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기간 동안 미국에 가서 동료들을 응원했다.

3. 감독 경력

러커투슈는 은퇴 전부터 지도자의 길을 시작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에서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으며, 2000년에는 나치오날 부쿠레슈티에서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은퇴 후에는 나치오날의 감독으로 짧게 재직했다.

2001년에는 파나마 국가대표팀의 코치진에 합류하여 미하이 스토이키처 감독을 보좌했다. 2002년에는 ASC 오첼룰 갈라치의 감독을 맡았고, 같은 해 여름에는 고향 클럽인 FC 브라쇼브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2003년까지 재직했다. 2003년에는 잠시 루마니아 국가대표팀의 코치진에도 합류했다.

2004년 CSM 차흘러울 피아트라 네암츠, 2005년 인테르 가자 부쿠레슈티, 2006년부터 2007년까지는 UTA 아라드의 감독을 맡았다. 2007년 10월 28일, 러커투슈는 마시모 페드라치니 감독의 후임으로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의 감독에 부임했다. 2008년까지 팀을 이끌었고,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다시 한 번 스테아우아의 감독을 맡았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는 SC 바슬루이의 감독으로 재직하며 리그 3위와 함께 2009-10 루마니아컵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0년 여름에는 사임하고 스페인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겠다고 선언했으나, 일리에 두미트레스쿠가 스테아우아 감독직을 사임한 후 2010년 9월 27일 다시 스테아우아로 복귀했다. 그의 복귀 첫 경기는 유로파 리그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의 SSC 나폴리와 3-3으로 비긴 경기였다.

2012년에는 ASA 트르구무레슈의 감독을 맡았고, 2013년부터 2014년까지는 CSMS 이아시의 감독으로 2013-14 시즌 2부 리그인 리가 II 우승을 이끌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는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의 스포츠 디렉터로 일했으며, 2018년부터 2019년까지는 같은 클럽의 감독을 맡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