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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육군의 군기인 '미쿠니소지루시(御国総標)'. 1999년 이전 일장기와 동일하며 현대의 일장기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1] |
일본어 | [ruby(幕府陸軍, ruby=ばくふりくぐ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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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2년 분큐의 군제개혁 이후 등장한 에도 막부의 근대적 육군을 가리킨다.2. 발흥
흑선내항(黒船来航) 이래로 전통적인 일본군의 제도와 장비로는 서구 군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더군다나 서양 세력은 전통적인 아시아적 관념상 강대국에 속했던 청나라를 아편전쟁으로 몰락시켰다. 이에 크게 동요한 막부는 군사 제도의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1822년 네덜란드군 교범을 입수하여 연구, 타카시마류 포술을 창안한 타카시마 류한(高島秋帆)이나 에가와 에이류(江川英龍)와 같은 포술 사범들을 초빙하여 근대 전술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흑선내항이 발생한 1854년에는 로쥬(老中: 막부의 관직)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의 주도로 군제 개혁안이 세워졌다. 그 일차로 하타모토(旗本)[2]나 고케닌(御家人)[3]의 자제들에게 서구식 전법을 교육시키기 위해 강무소(講武所)가 1856년 4월에 설치되었다. 강무소에서는 전통적인 검술뿐만 아니라 서양 총포술과 전술을 가르쳤으며, 나중에 오쿠즈메(奥詰)라 불리는 장군의 호위병력도 양성되었다. 그러나 이이 나오스케가 정권을 잡으면서 서양식 군사제도의 도입은 중단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3. 분큐의 군제개혁(文久の軍制改革)
사쿠라다문밖의 변이 발생하여 이이 나오스케가 참살당한 이후 분큐2년(1862년) 이른바 분큐의 군제개혁의 일환으로 서양식 군대인 육군이 창설된다. 육군봉행을 수장으로 그 아래에 보병봉행 3명과 기병봉행을 두고, 보병, 기병, 포병의 삼병편제를 도입했다. 단 이렇게 탄생된 육군은 어디까지나 하타모토와 고케닌 동원으로 대표되는 구식의 군사제도와 양립하는 조직이었다.보병은 횡대로 짜는 전열보병(Line infantry)에 해당하는 보병과, 경보병[4]을 담당하는 살병(撒兵)으로 분류되었다.
그중 보병대는 하타모토의 소집령에 응해서 공출된 병부(兵賦)라 칭하는 인원으로 편성되어, 동년 12월에는 막부는 대량으로 필요해진 인원확보를 위해, 하타모토에 대해서 병부령을 포고한다. 병부령의 내용은, 500석 이하의 하타모토는 돈을 내고, 500석 이상의 하타모토에게는 규정된 군역의 인원을 반으로 줄이는 대신 병부를 영지에서 공출하는 것으로 되어, 병부는 500석당 1인, 1000석에는 3인, 3000석은 10인의 인원을 공출할 것을 규정되었으나, 당장은 그 절반 정도면 된다고 허용되었다. 병부의 연령은 17세부터 45세까지, 복무기간은 5년, 신분은 최하급부터 무사에 준하는 정도까지로 정해졌고, 와키자시의 패용을 허가[5]받았으며, 공적여하에 따라 정식으로 막부의 신하로 등용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보병대의 병부는 에도성 니시노마루노시타, 오오테마에, 코가와마치, 산반마치로 나누어진 병영에 입영하여, 장비,의복, 식량은 막부가 책임지고, 봉급만 하타모토가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규정되었다. 봉급은 연 10냥이 최대한도였지만 인건비 상승이나 물가폭등으로 인해 실제로는 연15냥 또는 그 이상의 봉급이 지급되었다. 그후 겐치 원년(1864년)7월까지 관동 각국에서 10000명 정도가 모집되었다.
지방의 보병대는 오메미에(御目見)[6] 이하의 하급조의 고케닌으로 편성되어, 게이오2년(1866년)까지는 어지소총조(御持小筒組)라고 칭했다. 기병은 요리키[7]나 하타모토인 오메미에 이상의 코부신구미[8]에서, 포병은 도신(同心)[9]에서 편성되었다. 각부대의 사관은 하타모토나 그 자제를 채용하도록 했다.
텐구당의 난(天狗党の乱)이나 초슈정벌에 실전투입되어, 텐구당의 난에서는 실전경험의 부족으로 기습공격을 허용하는 수치도 있었지만, 초슈정벌에서는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제2차 초슈정벌에서는 각번의 군대들과 함께 5만의 압도적인 군세로 사방에서 초슈로 진입했으면서도 근대화된 초슈번의 군대를 이겨내지 못하는 등, 전통과 어느 정도 합의할 수밖에 없었던 반 근대적인 군대의 한계를 드러냈다.
특히 하타모토나 고케닌의 자제들은 지나치게 엄격한 예절 속에서 성장하여 쓸데없는 자만심이나 무능함이 함께함은 물론, 기본적인 신체 능력조차 크게 떨어지는 수준으로, 격렬한 전투의 스트레스를 버텨내지도 못했다. 근본적으로 막부 군사력의 중심핵이 되어야 하는 하타모토와 고케닌의 인적자질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4. 게이오의 군제개혁(慶応の軍制改革)
(게이오 원년(1864) 오사카성 안에서 연습(演習)중인 막부 육군)
따라서 제2차 초슈정벌의 패전후, 게이오 2년(1866년) 8월 이후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아래에서 다시 대규모의 군제개혁이 행해졌다. 막부 행정체제를 서구식으로 개편하여 총재직이 신설되면서 육군국이 설치되고, 종래의 육군조직 위에 위치하는 형태로 옛 로쥬(老中)와 동격의 육군총재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막부직속의 군사조직의 일원화가 추진되어, 대번(大番) 등의 구식조직은 해체되거나 축소되고, 그 중 남아도는 인력에서 우수한 자를 장군친위대인 오힐총대나 유격대(오힐총대의 후신) 등으로써 육군으로 편입시켰다. 강무소도 육군에 편입되어, 연구기관인 육군소로 개칭되었다. 이미 일정한 서양화가 진행되고 있던 하치오지센닌도신(八王子千人同心)[10]이 편입되어, 하치오지센닌다이(八王子千人隊)로 개칭된다. 조직의 확대에 맞추어, 육군봉행의 와카토시요리[11]로의 승격, 보병봉행이나 살병봉행직의 설치 등 지휘계통도 정비되었다. 축조병(築造兵)이라 불린 공병대, 천령의 부민(天領の農民)[12]으로 조직한 어료병(御料兵:치중보급대)도 편성되었다. 또 샤를 샤노와 대위를 비롯한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초빙하여 장비부터 편제까지 완전 프랑스식으로 훈련받는 전습대(伝習隊)가 신규편성되었다.
병력조달의 방법도 개정되어, 병부령으로 충원하는 보병대 외에, 하타모토의 녹봉 수준에 따라서 소총대를 보유시키고, 여러 가문 분량을 합쳐서 소대나 대대급의 소총대를 편성하는 조합총대(組合銃隊) 제도도 이행되었다. 조합총대용의 병력은 보병대와는 달라서 평시에는 각 하타모토의 저택에서 대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866년 1월에 병부령에 대해서는 금액을 막부에 헌납하고 그 대금으로 막부가 병력을 직접 운용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처럼 재차 출진이 이루어진 1867년 9월 첫 단계에서 합계 48개 대대, 총원 24000명의 징집을 실현하게 되었다. 다만 9월에 조합총대는 막부의 재정사정이나 소총병의 급여도 하타모토에 따라 제각각 다르고, 구성인원이 하타모토의 역대 가신, 영지 출신자, 직업소개소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이 섞이고, 부대의 통일성을 기하기 어려운 점도 있어 조합총대 제도는 폐지된다.
최후시점에서 막부육군은 보병대 8개연대(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문의 하리마령에서는 제16연대가 편성되어서, 총 9개연대라고도 한다)와 전습대 4개대대를 중핵으로, 일본최대의 서양식 군대가 되어있었다.
5. 막부육군의 최후
무진전쟁이 발발하면서 토바-후시미 전투에 참전한 막부보병대는 신정부군에게 패전한다.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에도성을 무혈개성함에 따라 막부육군은 공식적으로 소멸한다. 대부분은 해산했지만 일부는 메이지 신정부측에 귀순, 일부는 결사항전을 주장하며 동북방으로 도주, 무진전쟁의 최종국면까지 항쟁을 계속하게 된다. 일본 최대의 전투력을 자랑한다고 피아에서 인정받았던 전습대는 제2대대는 육군봉행 오오토리 케이스케를 따라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제3, 4대대는 신정부군에 귀순하여 귀정대(歸正隊: 올바른 길로 돌아온 군대라는 뜻)라는 이름을 받고 하코다테 전투에서 구 막부군 잔당들을 제압하였다.6. 편제
전열보병에 해당하는 보병은 40명을 1개 소대, 3개 소대를 1개 중대, 5개 중대를 1개 연대로 편성하였으며, 최대단위는 연대였다. 경보병에 해당하는 살병과 전습대는 대대가 최대단위였으며, 포병은 포 8문을 1개 좌(座)로 구분하는 독자적인 단위가 존재했다.소대는 소대장직급인 보병사도야쿠(歩兵差図役: 육군중위격)가 통솔, 중대는 중대장직급인 보병사도야쿠가시라(歩兵差図役頭: 육군대위격)가 통솔했으며, 대대는 보병가시라나미(歩兵頭並), 연대는 보병가시라(歩兵頭)가 통솔했다. 그 위로 육군소장급인 보병봉행 3인, 그리고 육군중장급인 육군봉행과 보좌관격인 육군봉행병이 존재했다.
7. 평가
막부육군의 평가는 전습대를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박한 편. 일본에서는 능력없고 기력없고 운이 없는 3무(無)군대로 평가되고 있다.사실 막부육군은 장비와 편제는 근대 유럽군대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으로 갖추었으나, 게이오 군제개혁 이전까지는 인적자질부터 문제가 있었다. 장교들이 신분적 자존심만 쓸데없이 강하기만한 상급 무사들이었고 병력은 충성심보다는 월급을 노리고 모여든 평민이나 하급 무사들이 대부분으로, 외양만 그럴듯했지 일체감이나 통일성부터가 없었다.
게이오의 군제개혁 이후에도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는 변함이 없어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어느 정도 전통에 기댈 수밖에 없는 막부육군 대신 인력 선발부터 파격적인 전습대를 창설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무진전쟁 초반에는 중간 지휘관의 무능을 비롯, 도쿠가와 요시노부 자체가 덴노측과 결사항전할 의지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추태만 보이고 허무하게 사라진다. 실제 유신웅번군 측도, 정말로 두려워한 것은 전습대였지, 이 막부육군 자체는 큰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8. 관련 문서
[1] 종횡비 7:10, 원의 중심이 기의 중심에서 100분의 1만큼 왼쪽에 위치. 1999년 국기국가법 통과 후 종횡비 2:3, 원의 중심이 기의 중심과 일치로 바뀌게 되었다.[2] 쇼군 직속 가신으로 고쿠다카(석고, 石高)가 1만석 이하이며(1만석 이상이 다이묘), 쇼군이 거행하는 의식에 참석하여 쇼군을 알현할수 있는 자격을 지닌 무사계급.[3] 고쿠다카는 하타모토처럼 1만석 이하지만 쇼군의 행사에 참석하여 알현할 자격은 얻지 못한 가신들.[4] 이 시대의 경보병은 딱히 장비가 더 가볍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대열을 형성하여 총격전을 하는 전열보병과는 달리 비교적 산개해서 움직이며 더 빨리 이동했다. 전투도 비교적 산개하며 수행하는 스커미쉬 전투를 주로 수행했다. 전열보병에 비하면 고기동의 융통성 있는 부대로, 경보병은 보통 훈련강도가 높은 편이었다.[5] 날길이 2척(60.6cm)이상의 물건은 흔히 카타나, 대도로 불리며 당시에는 무사계급이 아니면 패용할 자격이 없는 신분의 상징까지 담당하는 물건이었다. 그대신 와키자시, 소도의 패용은 평민에게도 자유롭게 허용되었기 때문에 호신용으로 와키자시의 패용이 가능한 것이다. 제식 장비로 존재했으며, 막부육군 병사들이 사용하는 것은 보병도(步兵刀)라고 불렸다. 다만 모양새까지 제식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6] 장군 알현이 가능한 직급을 통칭하는 단어.[7] 하급무사인 아시가루의 계급.[8] 무사들 중 특별히 공사(工事)를 맡아 수행하는 직급.[9] 요리키와 마찬가지로 아시가루의 계급.[10] 구 타케다 가문의 가신들을 중심으로 근방의 지주와 부농으로 편성된 부대. 코슈(甲州)가도의 거점인 하치오지(八王子)에 주둔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10개조로 구성되어있으며 1개조는 100명으로, 각 조마다 센닌도신구미가시라(千人同心組頭)가 있으며, 이들을 하타모토와 동격의 하치오지센닌가시라(八王子千人頭)가 통솔한다. 원래는 코슈 국경지방의 수비를 맡았으나 코슈가 직할지로 편입되어 국경수비의 의미가 퇴색된 후로는 조마다 교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닛코 동조궁 경비에 임했다. 종래에는 반농반무사의 특이한 신분이기는 하되 무사로써 대접받고 있었다는 설이 많았지만, 최근의 연구로는 공식석상에 참여할 때를 제외하면 장검을 패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정식 무사계급은 아니고 무가봉공인에 해당하는 대접을 받았다는 추측이 있다.[11] 若年寄格. 로쥬(老中)다음의 직위로써 하타모토(旗本)의 통솔을 맡고 있었다.[12] 에도 막부가 직할로 경영하는 영지의 농민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