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Max Wünsche 막스 뷘셰 |
출생 | 1914년 4월 20일 독일 제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키틀리츠 |
사망 | 1995년 4월 17일 (향년 80세) 독일 바이에른 뮌헨 |
복무 | 친위대 (1933년 ~ 1945년) |
최종계급 | 친위대 무장친위대 대령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배우자 | 잉게보고 피비츠 |
자녀 | 슬하 5남 |
신체 | 183cm[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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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 친위대의 장교.2. 생애
2.1. 초기 행적
1914년 4월 20일 독일 제국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키틀리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업에 관심이 있어서 1928년 농업 조합에 가입했고, 잠시 동안 부동산 관리인으로 일했다.2.2. 친위대 입대
친위대 돌격대지도자 시절의 뷘셰 |
1932년 11월 뷘셰는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했으며 1933년 7월에는 슈츠슈타펠에 입대했다. 뷘셰는 장교로 선발되어 바트 퇼츠의 SS-융커스쿨에 다녔다. 그는 1936년에 졸업 하고 4월에 중위로 진급했다. 그 후 뷘셰는 9중대의 소대장으로 라이프 스탄다르테에 배치되었다. 1938년 10월, 그는 히틀러 경호 부대에 장교로 배치되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1월 그는 네덜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을 위해 쿠르트 마이어가 지휘하는 사단의 소대 사령관으로 라이프스탄다르테로 돌아왔다. 1940년 12월 그는 요제프 디트리히의 부관이 되어 발칸 반도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동안 머물렀다. 1942년 2월 뷘셰는 LSSAH 슈투름게슈츠(돌격포) 대대의 지휘를 맡아 독일 전선을 돌파하려는 수많은 소련군의 시도를 저지하는 데 참여했다.
요아힘 파이퍼와 함께. 왼쪽이 요아힘 파이퍼, 오른쪽이 막스 뷘셰.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했고, 12SS 기갑 사단 히틀러 유겐트는 6월 7일에 작전에 투입되었다. 이어지는 전투에서 뷘셰의 연대는 7월 초까지 219대의 탱크를 파괴한 공로를 인정받았으며 뷘셰는 철십자상을 수여받았다. 12 SS Panzer는 나중에 팔레즈 포켓으로 알려진 곳에 갇혔다. 8월 20일 밤 뷘셰와 그의 부하 및 부상 당한 의료 장교는 도보로 팔레즈 포켓에서 탈출했다. 탈출하는 동안 뷘셰는 부상을 입었고 부하장교는 체포되었고, 얼마 후 뷘셰와 남은 부하가 체포되었다. 뷘셰는 고위 독일 장교들을 위한 특별 수용소인 스코틀랜드에 있는 수용소 165에서 전쟁 포로로 나머지 기간을 보냈다.
2.4. 말년과 사망
뷘셰는 전범 혐의가 없었기에[2] 1948년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잉게보그 피비츠와 결혼하여 5명의 아들을 두었고, 1980년에 은퇴할 때까지 부퍼탈에 있는 기업의 전무이사가 되었다. 이후 1995년 4월 17일 81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사망했다.3. 여담
- 헤르만 페겔라인, 요아힘 파이퍼 등 자기 주변의 다른 나치당원들이 종전 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과 달리 천수를 누리다가 갔다. 오토 귄셰, 하디 크루거처럼 전쟁범죄에 딱히 가담한 전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장신인데다 미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