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정만주원류고 欽定滿洲源流考 | |
소재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고궁박물원 소장 중 |
제작시기 | 1777년 ~ 1778년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 시기 |
작자 | 아계(阿桂)‧우민중(于敏中) 등 |
학술기관 | 한림원(翰林院) |
언어 | 한문 |
권 수 | 20권 |
관련링크 | 베이징 고궁박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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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만주족의 역사책으로 만주족이었던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되었다. 만주원류고 혹은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라고 한다. 흠정(欽定)은 황제의 판단, 또는 판단한 것을 가리키는데 흔히 책의 명칭에 붙이곤 했다. 즉 '흠정'이란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책은 황제가 내용에 직접 관여하여 편찬한 것이다.흠정만주원류고는 만주인의 정체성을 강조한 역사책으로 건륭제 42년인 1777년 대학사 아구이ㆍ우민중 등이 칙명을 받들어 이듬해인 1778년에 완성하였다. 당시 한림원(翰林院)이 주관하여 관학자(官學者)들과 관리 30여 명이 참여하여 편찬했다. 기존의 역대 사서와 지리지, 개인 문집 등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이 모아져 있다.
2. 상세
흠정만주원류고는 '만주원류고'라는 말마따나 만주족의 원류를 고찰해보는 책이다.당시 건륭제는 한족 역사가들이 만주에 대한 이해가 얕아서 고증을[1] 제대로 못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었다. 그리하여 여러 명성 있는 대학사들을 모아 문헌들을 모으게 하고, 수집한 문헌들을 근거로 만주족들이 옛부터 생각해오던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주장들을 대학사들이 평가하게 하였다. 건륭제는 만주인의 뿌리 의식을 최대한 고증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만주인의 유산을 입증하여 청나라 통치의 정통성을 강조하기를 희망했다.
내용은 기본적으로 여진, 만주인이 시대별로 숙신, 부여, 읍루, 삼한, 물길, 백제, 신라, 말갈, 발해, 여진(건주, 완안)으로 그 계통이 이어지고, 청나라의 건국은 1천여 년 동안 이어져온 계통의 고유한 정치, 문화적 발전과 진보의 결과로 설명한다. 물론 고고학 등이 발전하지 못한 당대 시대상 몇몇 설은 오늘날 신뢰받지 못하는 한계도 있지만, 당시 피지배층이던 한족중심사관에서 벗어나 만주인 지배층의 시각에서 편찬한 사서라는 점은 의의가 있다.
3. 구성
- 만주의 여러 부족 및 풍속·지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선 만주의 원류로 읍루, 물길, 완안 같은 숙신계 종족들은 물론 친척뻘인 옥저, 부여, 발해도 다루고 있고, 심지어 백제, 신라를 포함한 삼한까지 만주의 원류 중 하나로 고찰하고 있다. 대강 구성에 대해 설명하자면 여지껏 작성된 사료들을 모조리 모아놓고, 청나라의 사고전서 학자들이 이를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는 형식이다.
- 만주원류고의 제1권 부족편에는 《발상세기(發祥世紀)》라는 책을 인용하여 만주족이 애신각라(愛新覺羅)라는 성을 얻게 된 내력과 만주를 건국한 과정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 사서에 의하면 만주족이 사용한 애신각라는 청나라의 국성(國姓)이지만 만문자료에는 이 명칭이 잘 쓰이지 않고, 만문노당(滿文老檔)이나 만주실록(滿州實錄)에 애신각라는 세 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 성씨가 청나라 황실에서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다. 애신각라, 청나라 황족의 성씨이다. 만주어로 '애신(愛新)'을 금(金)이라고 한다. 흔히 '각라(覺羅)'를 성(姓)의 뜻이라고 한다. 즉, 만주어로 '김씨'라는 뜻.
4. 한국사 관련
특이하게도 이 책에선 신라나 백제까지 만주족의 기원과 연결짓는 반면[2], 거란이나 선비·몽고 등 몽골계 부족이나 고조선·고구려의 내용은 있지 않다. 청나라가 시작된 만주 한복판에 자리잡았던 고조선과 고구려가 안나온다는 점은 좀 특이하다. 물론 그 이유는 따져보면 단순한데, 전통적으로 중국 지역에서 한반도 왕국은 '고려, 조선'이라고 관습적으로 불러왔기 때문에, 만주원류고에 이 두나라를 다뤘다간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게다가, 당시엔 실제로 조선이 존재했다. 조선이라는 이름의 유래였던 고조선은 단지 시대를 구분짓기 위해 고조선이라 부른 것 뿐이며 원래 고조선의 이름은 조선이다. 후대 사람들이 시대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 단군조선, 위만조선 등의 표현을 만들어 낸 것이다. 또 바로 전 왕조는 고려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으로 바뀐 뒤에도 이웃나라들은 계속 고려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3] 그래서 조선의 전신이 고려라는 건 명백하게 인지되고 있었다.
그러니 그 고려의 유래인 고구려를 다루기가 껄끄러웠을 것이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 시기에 국호가 '고려'로 바뀌었다는 게 정설이다. 장수왕 때부터 중국 사서에 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기재되고 충주 고구려비처럼 당대 고구려인이 세운 비석에도 국호가 떡 하니 고려로 기재돼 있다. 그래서 당대 중국인들은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왕건이 세운 고려[4]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 한 나라인데 단지 왕의 성씨가 고씨에서 왕씨로 교체된 걸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 청나라 때 편찬된 명사에도 조선의 전신인 고려가 고씨에서 왕씨 왕조로 교체되었다고 잘못 적어 놨을 정도로 이 관념은 매우 뿌리가 깊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고구려를 만주족의 원류로 거론하면 자연히 당대에 조선을 연상시키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중국인들이 이웃나라 역사에 대한 무지로 인해 조선과 역사적으로 이어진다는 걸 잘 몰랐던 백제나 신라를 거론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즉 고조선과 고구려를 책 내용에 적어버리면 조선과 청나라 자신들의 서열이 뒤집히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다만 고조선의 경우 선비족 모용외가 조선공이 된 기록이 있어[5] 고조선을 선비족의 뿌리로 봤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편, 여진족의 조상격인 말갈족이 고구려에게 복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는 설도 있다. 즉, 고조선과 고구려를 포함시켰다가는 문제가 생기고, 만주사를 청 왕조 입맛대로 풀어나갈 수 없기 때문에 배제했다는 것이 논리적으론 그럴듯해 보인다.
5. 같이보기
6. 참고
[1] 여기서 말하는 고증은 창작물의 반영 오류가 아니다. 고증 문서 참조.[2] 당연히 이런 역사 계승성은 논란이 많은 관점이다. 당시 청의 만주족 지배층들이 그렇게 인식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는 있으나, 냉정하게 보면 오늘날 주류학계에서 인정받긴 어려운 관점이다. 달리 말해 만주족판 동북공정으로 볼 수도 있다.[3] 한반도 국가에서 왜에서 일본으로 국명이 바뀐 이후에도 상당기간 둘을 혼용해 쓰는 딱 그런 식이다. 서양으로 치면 그리스인들이 프랑스를 갈리아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4] 사실 발해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명칭이 고(구)려가 아닐 정도로 고구려의 후계 국가로 잘 인식되지 못했다. 그래서 과거 중국에서는 고씨의 고(구)려가 왕씨의 고려로 바로 이어진 걸로 오해했다. 그래서 발해를 여기서 제외한다.[5] 출처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