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2:33:39

모로코 위기

식민제국들의 대외정책과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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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Moroccan Crisis
프랑스어: Crise de Maroc
독일어: Marokkokrise
스페인어: Crisis Marroquí
아랍어: الأزمة المغربية

1. 개요2. 제1차 모로코 위기3. 제2차 모로코 위기4. 관련 문서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이었던 20세기 초반에 독일국영국-프랑스-스페인 사이에서 모로코를 둘러싸고 벌어진 국제적인 영토 갈등. 1905년과 1911년 두 차례에 나뉘어져서 일어났다. 세계 정책(Weltpolitik)을 추구하면서 세력을 적극적으로 팽창하려고 시도한 독일과 이를 억제하려던 영국-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충돌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오랫동안 대치관계였던 프랑스와 영국은 본격적인 협력의 단계에 들어섰다.

2. 제1차 모로코 위기

사건이 발발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탕헤르 위기(Tangier Crisis)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모로코는 대서양지중해를 이어주는 곳에 자리잡은 특성상 많은 유럽 국가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1880년에 체결한 마드리드 조약에 의거하여 모로코의 독립은 유럽 열강들에게 인정받았으나 제국주의의 시대에서 그런 건 없었고 프랑스가 내정개혁을 빌미로 적극적으로 스페인과 함께 모로코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세력 확장이 심히 못마땅했던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1905년 3월 31일 전격적으로 모로코를 방문하여 술탄과 회담을 갖고 '모로코의 자주와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빌헬름 2세의 지원에 고무된 모로코의 술탄은 프랑스가 요구한 내정 개혁을 거부해버리는 패기(!)를 발휘했고 이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다. 빌헬름 2세와 제국 총리 베른하르트 폰 뷜로베를린 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유럽 열강들 사이의 회담을 조성하여 최대한 독일의 이권을 챙겨보려는 심산이었지만 프랑스는 완강히 거부했고 독일도 물러서지 않음에 따라 양국 사이에는 전쟁의 가능성까지 감지되었다.[1] 하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참패가 기억에 생생했던 프랑스 정부는 이미 세기초에 유럽 열강 중에 최고의 생산력에 도달한 독일과 혼자 전쟁을 감당하기에는 위험이 너무나 크다고 판단했고 결국 프랑스가 한 발 물러서면서 이듬해 1월 알헤시라스(Algeciras)에서 유럽 열강들 사이에 회담이 개최되었다.

하지만 알헤시라스 회담에서 독일은 예전과는 달리 왕따가 된 건 자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제외한 그 어떤 국가도 독일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3] 특히나 건함 경쟁 등으로 독일과 대치 관계였던 영국이 시종일관 단호하게 프랑스의 편을 들어 주었던 것이 결정타[4]였고 결국 독일은 모로코 내 프랑스의 지배권을 수용해야만 했다.[5] 1차 모로코 위기를 통하여 독일 전역은 자국이 국제 왕따가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했으며 제대로 망신을 당한 빌헬름 2세는 분노하여 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삼국 동맹삼국 협상[6] 사이의 긴장감은 점점 커졌다.

3.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에 일어났으며 1차 위기와 마찬가지로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이름을 따 아가디르 위기(Agadir Crisis)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독일이 군함을 파견했기 때문에 그 군함의 이름을 따 판터 호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차 모로코 위기가 끝난 뒤 알헤시라스 협정에 의거하여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지배권을 착착 강화시켜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1911년 반프랑스 폭동이 발발하고 프랑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이러한 무력 진압은 알헤시라스 협정 내용에 위반하는 것이었으며 독일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독일인 민간인 한 명을 아가디르에 파견한 뒤 구출을 핑계로 독일 제국 해군 포함 판터 호를 모로코에 파견했다. 결국 목표는 어그로를 끌기 위하였던 것인 셈. 독일의 어그로에 프랑스가 자극받으면서 다시 한 번 위기감이 유럽 열강들 사이에 감돌았다. 한편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독일을 견제할 목적으로 영국 해군 전함을 파견하면서 1차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프랑스에게 힘을 몰아줬다.[7] 그 와중에 독일은 판터 호를 앞세워 프랑스가 통치 중이던 콩고를 양여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철수를 거부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반대하며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영불협상의 위력 앞에 독일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이 왕따였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사건 발발 한 달여 뒤인 7월에 독일 대사가 프랑스 정부 측에 '독일은 모로코의 영토에 대한 이해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통보해 왔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독일과의 우호적 관계를 추구하는 조제프 카요(Caillaux) 내각이 들어서면서 독일에게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일부를 할양해 주었고 그 대가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승인했다. 이러한 협상에 스페인이 반발하여 독일과 프랑스에 불만을 보이자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서 협상을 중재하여 잘 해결되었다. 결국 이듬해인 1912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를 분할해 각각 자국의 보호령으로 삼았다. 다만 형식적인 독립은 쭉 유지했다.

이 2차 모로코 위기가 한창이던 와중에 독일은 심각한 금융위기[8]를 겪는데 '이게 프랑스와 영국의 음모다.'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이때 독일은 잠시나마 금본위제 국제무역망에서 퇴출당하는 신용불량 국가가 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4. 관련 문서


[1] 프랑스의 경우에는 아예 군대를 알자스-로렌 국경 근처까지 전진시켜 놓았고 독일도 예비군을 소집시켜 놓았다.[2] 이전까지는 비스마르크의 신들린 외교 능력으로 프랑스를 고립시켰고 그 덕택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3] 모로코에 대한 직접적인 제 3자이자 프랑스와 공동 당사자인 스페인도 모로코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남은 스페인령이라도 차지 내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국과 프랑스 편을 들어야했다.[4] 이미 영불협상에서 양국은 서로 협조하기로 결의했다.[5] 굳이 얻은 게 있다면 프랑스로 하여금 모로코 내 경찰에 대한 지배권은 토해내게 했던 것인데 정치/경제적인 면에서 이미 프랑스가 모로코를 거의 다 잠식한 상황이라 큰 의미는 없었다. 그냥 체면내는 용[6] 다만 이 시기에는 러불동맹영불협상만 체결됐을 뿐 아직 러시아와 영국을 잇는 영러협상은 체결되지 않았다.[7] 사실 이 시기 영국은 독일하고 전쟁이 실제로 이루어질까봐 노심초사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워낙 프랑스가 단호한 태도를 유지했으며 영국 자신들도 영불협상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에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자국 해군을 모로코에 파견했다.[8] 하루만에 주가 지수가 전체에서 30%(!)가 떨어졌으며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금을 인출하면서 라이히스방크가 보유한 금의 20%가 증발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