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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모하메드 부아지지 محمد البوعزيزي | Mohamed Bouazizi | |
본명 | 타리크 알타이브 무함마드 부아지지 طارق الطيب محمد البوعزيزي Tarek el-Tayyib Mohamed Ben Bouazizi |
출생 | 1984년 3월 29일 |
튀니지 시디부지드 | |
사망 | 2011년 1월 4일 (향년 26세) |
튀니지 벤아루스 | |
직업 | 노점 상인 |
종교 | 이슬람[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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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분신자살한 튀니지의 대학생으로, 튀니지판 전태일. 그의 죽음은 튀니지 혁명, 나아가 아랍의 봄의 기폭제가 되었다. 한마디로 그의 죽음이 2010년대 내내 중동 전역을 휩쓴 혼란의 시작이자 모순의 폭발인 셈이다.2. 생애
1984년 3월 29일 튀니지의 시디 부지드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리비아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부아지지가 세 살 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어머니는 부아지지의 삼촌과 재혼했다.
부아지지의 집은 가난했고 그 지역에서 겨우 방 한 칸짜리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했다. 워낙 가난한 탓에 부아지지의 여동생은 부아지지가 고등학교도 졸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며 어머니도 부아지지에게 대학에 가지 말고 차라리 군대에 들어가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 끝에 부아지지는 대학에 들어가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고 어렵게 일해 가면서 등록금을 벌어 간신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튀니지의 경제 상황이 말이 아니라 결국 취업은 잘 안 풀렸고 부아지지는 고향에서 트럭에 과일을 싣고 파는 노점상을 시작했지만 2010년 12월 17일 경찰은 부아지지가 허가를 받지 않고 장사를 한다는 이유[2]로 팔던 과일과 트럭, 저울 등을 모조리 압수했는데 경찰에 민원을 넣어 압수당한 것을 돌려달라고 하소연했지만 돌아온 답은 돈을 내라는 답뿐이었고 돈이 없었던 부아지지는 항의했지만 폭행당한 후 쫓겨났다. 그러자 절망에 빠진 부아지지는 시청 앞 도로에서 기름을 끼얹고 분신을 시도했다. 부아지지는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3] 끝내 해를 넘긴 2011년 1월 4일 오후 5시 30분에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에 격분한 시디 부지드 시민들은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부아지지의 쾌유를 빌었으나 끝내 부아지지가 사망하자 병원 앞에 모인 군중들은 울먹이면서 그를 위해 복수하겠노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시위(일명 재스민 혁명)는 전 아랍으로 번져나가 아랍의 봄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고장인 프랑스 파리 시의회는 2011년 2월 10일 부아지지의 이름을 딴 "부아지지 거리"를 파리에 조성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지만 튀니지에서의 반응은 호불호가 갈린 것으로 전해졌다. 반기는 측도 있었던 반면 무엇보다 튀니지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881년부터 1956년까지 튀니지를 지배하였던 프랑스가 멋대로 조성한다는 데 무조건 반기기는 어려운 게 당연지사였다. 물론 튀니지 측을 비난하는 반응도 있었다.
부아지지의 어머니는 고소를 취하했지만 부아지지를 체포한 경찰들은 혐의를 부인했다고 한다. #
4년 후 가해자인 경찰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지만 4년이라는 긴 시간 이후에 한 반성이라는 걸 보면 아무리 반성이라도 늦은 반성일 수밖에 없다. 기사
3. 관련 문서
[1] 다만 신앙심이 깊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튀니지 자체가 이슬람 국가 중에서는 상당히 세속화된 편이다. / Jacob Uzzell, "Biopolitics of the Self-Immolation of Mohamed Bouazizi", e-ir.info, 2012.11.7.[2] 사실 이건 표면상의 이유였고 진짜 이유는 자신들한테 뇌물을 안 줘서였다.[3]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자살을 금기시하며 특히 이슬람은 당뇨 합병증에 따른 저혈당에 시달리는 사람이 라마단 때 금식하다가 훅 가는 것도 자살로 취급한다. (물론 아무리 중요한 종교 의식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자살로 취급하는 행위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런 경우라면 금식을 하지 말고 그냥 나중에 신에게 잘못을 비는 기도를 하게 하거나 아예 신이 자비를 베풀어 라마단을 하지 않아도 용서한다고 했으니까 라마단을 하지 말라고 한다.) 이렇게 자살을 금하는 이슬람권 국가인 튀니지에서 이랬다는 건 살아도 죽는 거와 같은 절망이라는 서민들의 분노와 현실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튀니지는 이슬람권에서는 꽤 개방적인 나라이긴 했지만. 이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벤 알리도 부랴부랴 부아지지의 병문안을 왔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