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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협 영화란 무협물 장르의 영화를 가리킨다. 20세기 들어 무협 소설이 인기를 끌고 무협물이란 장르가 대중들에게 서서히 알려지면서 무협 영화 역시 제작되어진다. 특히 문맹이라 소설을 읽을 수 없거나 책보다 시각적 효과를 원하던 무협 마니아들에게 무협영화는 새로운 소통창구가 된다.중화권의 무협영화는 1930년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걸로 추정된다. 1920년대도 일본에서는 모리 오가이의 단편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걸 감안하면 말이다. 본격적으로 무협영화가 상업화되기 시작한건 촬영기술이나 특수효과가 발달한 1940년대 이후로 보이고, 특히 홍콩 무협영화는 1960년대 이후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이 항목에서는 구분되지 않고 설명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무협영화와 무술영화, 혹은 쿵푸영화는 다소 차이가 있다. 무협영화는 무협소설과 비슷하게 연출되어 환상성의 개입 요소가 크지만[1], 쿵푸영화는 좀 더 사실적인 액션을 보여주고 시대적 배경도 상대적으로 근현대에 가깝다. 이를테면 이소룡 영화는 쿵푸영화이지 무협영화는 아니며, 서구나 일본에서 인기를 얻은 중화권 영화들도 대체로 쿵푸영화에 가깝다.[2]
2. 국가별
무협영화라고 하지만 사실 양상은 국가별로 꽤 차이가 있다.2.1. 홍콩
1960년대 중후반 호금전, 장철, 초원 등 명감독들이 등장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 이소룡이 활약하기 전에는 극장에 걸리는 영화는 다 무협영화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많은 무협영화들이 쏟아져나왔다.호금전 감독은 경극에 영향을 받은 화려하면서도 섬세한 영상미가 돋보이는 예술적인 무협을 추구하여 후대의 홍콩 감독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만 감독이 무협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액션 장면보다 영상미를 추구한지라 지금 대중들의 관점으로 보면 액션 장면이 무척 밋밋해 보일수도 있다. 대표작으로는 대취협, 용문객잔, 협녀가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호금전 감독이 제작사 쇼브라더스와의 마찰로 대취협을 완성한 직후 영화사를 떠나자[3], 쇼브라더스의 사장 런런쇼가 장철 감독을 호금전의 대항마로 내세우기 시작하면서 뜨기 시작한 장철 감독은 호금전과 정반대로 유혈이 난무하고 마초적인 내용의 무협물을 감독했다. 장철의 영화는 비록 호금전의 영화보다는 전체적인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기존 무협 영화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렬한 액션신이 대중들의 인기를 얻어 스타 감독으로 떠오른다. 다만 너무 영화를 공장식으로 찍어댄지라 매번 비슷한 플롯, 비슷한 액션 장면 등으로 식상한 영화들이 난무하였고 결국 더욱 화려한 액션과 현대물로 무장한 이소룡이 나타나자 정말 급격히 몰락하게 된다. 대표작으로는 외팔이, 금연자 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초원 감독은 1960,70년대 홍콩영화 1차 부흥기 시절 무협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든 감독[4]이자 배우로[5] 이러한 다재다능한 재능을 살려서 위의 두 감독들에 비해 드라마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무협영화들을 만들었다. 대표작으로는 유성호접검, 백옥노호, 의천도룡기 등이 있다. 보면 주로 고룡의 무협소설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 유명한 편인데, 백옥노호 같은 고룡의 후기 소설을 토대로 만든 영화들은 원작이 출판된 직후 영화화되었고 고룡이 직접 각본을 담당하기도 했다.
사실 저 시절 감독들 영화는 지금 와서 보면 좀 유치해보이는 면도 있는 게 사실이라, 홍콩 느와르 이후 한국 사람들이 열광하던 무술 영화는 1990년대 제작된 게 대다수라고 봐도 무방하다. 동방불패, 황비홍 등으로 유명한 서극 감독이 이 시절 대표적인 감독 중 한명.
2.2. 대만
대만(중화민국)의 경우 3S정책 목적으로 무협영화가 장려되었고, 대만에도 인 홍콩 무협영화 붐과 당시 대만 현실(장제스 독재)에 불만을 많이 품은 지식인들이 양질의 원작을 제공해줬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다만 2000년대 이후로는 영화 시장 자체가 대륙에 주도권을 넘겨줬기 때문에 스탭들도 중국 본토로 건너가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홍콩 무협영화의 중흥기와 맞물려 대만에서도 1967년 호금전 감독의 용문객잔, 1968년 곽남굉 감독의 일대검왕 등이 히트하면서 무협영화의 중흥기가 시작된다. 곽남굉은 이후 홍콩으로 건너가 쇼브라더스에 입사하기도 했고, 2편의 영화를 감독한 후 다시 대만으로 복귀, 소림사 18동인 같은 명작을 남기기도 한다. 또한 1976년 홍콩 쇼브라더스의 초원 감독의 유성호접검의 영향력은 상당해서 비슷한 플롯으로 홍콩배우들을 출연시킨 아류 작품들이 대만에서도 많이 제작되었다. 허나 70년대에는 홍콩영화에 필적할 만한 걸작들도 많이 제작되었지만, 80년대로 넘어가면서부턴 대만 무협영화는 저예산 날림 영화들이 더 많이 제작되었다.
사족으로, 정서를 공유하는 중화권이기에 홍콩영화계와 대만영화계는 인적교류가 빈번했다. 대만에서 주목받는 신인 감독이나 배우는 보다 넓은 시장인 홍콩으로 스카우트 되어가고, 전성기가 지난 홍콩 스타 또는 홍콩으로 진출했던 대만 출신 스타는 어김없이 대만으로 무대를 옮겨 명성을 지속시키기고 다시 홍콩시장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전자는 70년대 반영자, 하리리부터 80년대 임청하, 호혜중, 왕조현 등이고 후자는 왕우, 정소추, 강대위, 나열, 진성, 능운, 종화, 악화, 장익 등 대다수의 배우들이 그랬다. 때문에 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진 대만 배우, 홍콩 배우들이 뒤섞여서 출연한 영화들이 우후죽순 개봉되었다.[6]
70년대 대만 무협 중흥기의 주목할 만한 배우들은 백응, 강남, 전붕 등의 남성배우들, 그리고 상관영봉과 서풍 그리고 장령으로 이어지는 여전사 이미지의 배우들이 있다. 특히 60년대 말 용문객잔과 협녀, 일대검왕 등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전붕'은 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대만무협 영화의 유일무이한 원탑 남자 주연으로 활약하였다. 전붕 주연의 한국개봉작으로는 비취호리, 소림사18동인 등이 있다.
전붕과 함께 용문객잔으로 데뷔한 '상관영봉'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후반까지 대만 무협영화의 히로인으로 활약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장령'으로[7] 77년 국내에서도 히트한 진명화 감독의 무림천하(풍운인물)에서의 카리스마는 주연이었던 남자배우 진상림을 압도한다. 84년 성룡, 임청하, 정소추 등과 같이 출연한 대복성에서도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를 끝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한 듯하다.
2.3. 중국
20세기 중후반만 해도 문화대혁명이라는 극좌적 삽질로 인해 중화권 문화의 주도권을 한동안 홍콩, 대만에게 넘겨주었었지만 덩샤오핑 연간 개혁개방에 이어 1997년 홍콩반환 이후, 21세기 들어선 무협영화 대다수가 중국 본토 혹은 중국 자본이나 인력과 합작으로 제작된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추세다.실제 인구만 14억에다가 영화 시장도 북미 다음가는 혹은 비슷할 정도의 세계 수위권을 달리고 있기 때문에 중국 영화계에서 주류 장르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무협물도 블록버스터급이 심심찮게 제작되며 엄청난 인원과 소품, 세트를 동원한다. 황후화만 봐도 병사들을 후방에 안 배치하고 다 기어들어가서 기습 한번에 전멸하는 장면으로 나름 유명하다.(...)
원래 무협물의 고향이라 그런지 배경이나 장소 섭외도 유리한 점이 있다.
그 외 무조건 일반화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상당수 작품들이 굉장히 잔인하고 폭력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20세기 대만, 홍콩 무협영화나 드라마들도 꽤 잔인한 편이었지만 중국 무협영화는 더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한 측면이 있다는 것. 중국 무협영화는 한국에 수입될 때 사람이 두 동강 나는 건 다 짤리기 때문에, 한국 TV로 보면 그런게 잘 안나오지만 대신 뭔가 스토리가 빠진 듯한 느낌이 날 때도 있는데 그게 검열에 걸려서 그렇다는 의견도 있다.[8]
2.4. 한국
사실 무협영화는 한국 영화계에서 비주류 장르라 제작이 드문 편이지만, 그래도 2000년 영화 비천무 등처럼 가뭄에 콩 나듯 간간히 나오긴 한다. 20세기 홍콩/대만 무협영화가 인기를 끌 때는 한국인들이 한국에서 중국 옷 입고 싸우는 지금 보면 다소 당황스러운 무협영화들이 나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게 1983년 개봉한 남기남 감독의 여자 대장장이. 1967년 정창화 감독의 영화 황혼의 검객도 일단은 무협영화긴 하다.2.5. 미국
많은 사람들의 선입견과 달리 의외로 미국 할리우드 영화, 애니메이션 역시 무협물에 충분히 익숙하며 다양한 (서양식) 무협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만 항목 초기에 서술했듯이, 대부분은 무협영화라기보다는 쿵푸영화에 가깝다.1970년대부터 이소룡과 홍콩영화들이 유행해서 무협적 기반을 닦았고[9] 일본 찬바라물 역시 유행했다. 그에 영향을 받은 미국 오리지널 무협물도 제법 제작되었다. 물론 오리엔탈리즘을 벗어나지 못하는 질 낮은 작품[10]도 있지만, 동양적인 정수를 충분히 소화시켜서 재생산하는 훌륭한 작품도 많다. 대표적으로 쿵푸 판다, 와호장룡[11], 킬빌[12], 가라데 키드, 샹치 실사영화 시리즈 등이 있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 역시 이소룡, 홍콩, 일본의 무협물과 액션물에서 재차 영감을 받아 격투씬, 스토리에 참고한 흔적이 있다. 또 중화권식 무협물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무술이 등장하는 액션영화도 할리우드에서 유행했는데 척 노리스, 스티븐 시걸, 장클로드 반담 같은 배우들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2.6. 일본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일본은 찬바라물이란 게 따로 있어서, 무협영화는 거의 찍지 않았다. 찬바라물은 중화권 무협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리얼리즘적이라,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은 경공술이나 무술초식, 괴상한 무기가 덜 나오는 편이다. 물론 애초에 칼 한자루 들고 무쌍 찍는 것부터가 비현실적이긴 하다만.다만 사무라이가 의라든가 그 시대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며 싸우거나 칼 한자루 들고 사람들을 도륙하는 식의 내용은 무협물과 통하는 게 있다. 홍콩의 장철 감독 등도 찬바라물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기에 무협영화에 한해선 찬바라물도 일정부분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13] 실제 홍콩 무협영화가 기세를 타기 전까진 찬바라물이 꽤 인기가 있었다.
2.7. 베트남
베트남 영화계도 21세기 들어 중국 무협 영화들의 영향을 받아 베트남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베트남판 무협 영화가 나오고 있다. 후 레 왕조 초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황제암살단>(원제 Thiên mệnh anh hùng) 같은 작품이 한 예. 중국의 드라마 세트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3. 관련 항목
[1] 물론 동양풍 판타지나 선협소설보다는 더 현실적이다.[2] 물론 할리우드에서는 예외도 있다.[3] 대취협을 보면 엔딩이 굉장히 썰렁하다. 이는 호금전의 완벽주의로 인하여 촬영 기간과 예산이 초과되자 제작자 런런쇼가 10일 이내 촬영을 마치지 않으면 감독을 바꾸겠다고 협박했고 결국 대리 감독이 얼렁뚱땅 영화를 완성시켜 개봉하여서 그렇다. 이후 호금전은 대만으로 건너가 활동을 한다.[4] 홍콩에서 2번째로 영화를 많이 감독한 감독이다.[5] 한국에서는 오히려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의 악당 주도 등 그가 감독한 영화 자체보다는 배우로 일려져있다.[6] 80년대 중후반 국내 비디오 대여점의 무협물들은 80년대 초반 대만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많았는데, 보면 주요 배우들이 70년대 쇼브라더스 영화에 출연하던 홍콩배우들이 꽤 많았다.[7] 상관영봉과 이미지가 상당히 비슷해서 혼돈하는 경우도 있는데 장령이 10살 어린 후배이고 키는 더 크다. 둥근 얼굴에 동그란 눈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또한 두 여배우 모두 눈매가 굉장히 매서운게 특징이다.[8] 실제 중국 뉴스나 신문을 보면 잔인한 영상도 검열같은거 안한다는 의견도 있다. 문화 차이인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규제가 될지는 지켜볼 일.[9] 물론 이소룡 영화는 엄밀히 따지면 무협영화는 아니다.[10] 2000년대 초반까지 미국 블록버스터 체인에는 흑인이 중국옷을 입고 중국인으로 나와서 무술을 하는 컬트적인 무협영화들도 전시되어 있었다.(...)[11] 대만 감독, 원작에 홍콩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엄연히 미국 제작사가 만든 미국 작품이다.[12] 오마주와 패러디가 가득한 액션영화지만 무협물의 서양화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스토리만 봐도 전형적인 무협물이다.[13] 좀 더 자세하게 따지자면, 서부극이 초창기 찬바라물에 영향을 주고 찬바라물과 홍콩식 무협영화가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무협영화와 찬바라물이 서부극에 다시 영향을 주는 등 상호작용하면서 20세기 액션 영화 발전에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