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악암(岳岩) |
본관 | 여흥 민씨[2] |
출생 | 1869년 6월 24일 |
전라도 전주부 부북면 일리 (現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404번지) | |
사망 | 1947년 7월 19일 (향년 78세) |
전라북도 전주시 | |
종교 | 천도교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309호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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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69년 6월 24일 전라도 전주부 부북면 일리(現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404번지)에서 아버지 민성호(閔成鎬, 1832 ~ ?)와 어머니 김해 김씨(1828 ~ ?)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일찍이 동학에 입교했고, 동학 농민 혁명에 가담했다. 1894년 5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무혈입성하자 집강소 활동을 전개했고, 1894년 10월 충청도 논산군에서 벌어진 논산전투와 전주부 창덕면 후정리(現 완주군 삼례읍 후정리) 삼례역 부근에서 벌어진 삼례전투 등에 참전했으나 일본군에게 패하자 피신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부 천도교구의 보성사 인쇄소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인종익이 전주군 천도교구실에서 기미독립선언서 1,700여 매를 김진옥(金振玉)·배상근(裵祥根)에게 전달했고, 김진옥과 배상근은 다시 천도교 신도인 민영진을 비롯해 조성덕(趙聖德)·김성문(金成文)·김영호(金永浩) 등에게 기미독립선언서 1,700여 매를 각각 나눠 주었다.
민영진은 이때 건네 받은 기미독립선언서를 3월 1일 당일부터 이튿날 밤까지 전주면 읍내의 도로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배포하고, 이어 전주군 각 면에 배포했다. 그리고 3월 2일에는 전주군 천도교구실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각각 유선태(柳先泰)에게 5매, 김태경(金太京)에게 9매, 서호순(徐鎬淳)에게 4매를 건네 주어 다른 사람들에게 배포하도록 하고, 평소에 긴밀히 연락을 취하고 있던 기독교 교단과도 연락해 만세시위 날짜를 3월 13일 전주면 읍내 장날로 잡는 등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별세했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9년 4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1]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閔[2] 입암공파(立巖公派) 28세 영(泳)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