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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아나 구도심 전경
밀리아나 (우측)와 케미스 밀리아나 (중앙)
1. 개요
아랍어 مليانة베르베르어
영어, 프랑스어
알제리 북부의 도시. 츨레프에서 동쪽으로 70km, 셰르셸에서 남쪽으로 30km, 블리다와 메데아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5만명이다. 고대의 지명 주카바르는 베르베르어로 '밀 시장'이란 뜻이고, 현 지명인 밀리아나는 아랍어로 '풍족함'이란 뜻인 말리야에서 유래되었다. 중세 ~ 근대 시기에 츨레프 협곡의 중심 도시였으나 20세기 들어 남쪽 평지에 세워진 케미스 밀리아나에 의해 대체되며 중소 도시로 남아있다. 주요 출신 인물로 알제리 독립 전쟁에서 게릴라 군을 이끈 독립 투사 알리 아메르 (알리 라 푸앵트)가 있다. 시내에는 에미르 압델카데르 박물관, 병기창 박물관, 시디 아흐메드 벤유세프 모스크, 옛 미나렛인 시계탑 등의 볼거리가 있다. 해발 7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덕에 날씨는 선선한 편이다.
2. 역사
에미르 압델카데르 박물관 (옛 궁전) | 1839년에 세워진 병기창 (무기 제조장) |
고대 누미디아 왕들의 피난처였고, 기원전 1세기 로마 제국령으로 편입되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일대를 요새화하여 식민도시인 콜로니아 율리아 아우구스타 주카바르 (Colonia Iulia Augusta Zucchabar)를 세웠다. 간단히 주카바르 혹은 수가바리타눔이라 불린 도시는 375년 피르무스의 베르베르 반란 당시 로마군 사령관 테오도시우스가 카이사레아 (셰르셸)로부터 진격한 곳이었다. 이후 주카바르는 주교구가 되었지고, 다른 마우레타니아 도시들처럼 정통파와 도나투스파 주교가 공존하였다. 411년 후자에 속한 게르마누스가 카르타고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484년에는 티파사, 카르텐나 (테네스), 루수쿠룸 (델리스), 출루 (콜로) 등과 함께 정통파 주교 스테파누스가 반달 왕국 군주 후네릭에 의해 카르타고로 소환된 후 추방되었다. 그후 주카바르는 버려졌고, 975년경 지리 왕조의 초대 아미르인 불루긴 빈 지리가 폐허 위에 재차 도시를 세웠다.
2.1. 중세
시디 아흐메드 벤유세프 모스크 |
10세기 말엽의 지리가 이븐 하우칼 (무함마드 아불 카심)은 밀리아나를 다수의 수로와 방앗간을 갖춘 유서깊은 도시라 기록하였다. 11세기 알 바크리는 밀리아나가 알제, 메데아와 함께 불루긴이 세운 도시라고 기록하였고, 14세기 무함마드 이븐 칼둔은 츨레프 분지의 마그라와 베니 와르시펜 부족이 거주한다고 언급하였다. 중세 시기 밀리아나는 중서부 알제리의 문화 중심지였고, 13세기 문학가 아흐메드 벤 오스만 엘 멜리아니와 14세기의 사상가이자 법학자 알리 벤 메키 엘 밀리아니 등의 학자들이 활동하였다. 정치적으로는 1081년 무라비트 왕조, 1149년 무와히드 왕조에 속하였고, 1184년에는 바누 가니야 (무라비트 부흥군) 세력이 점령했다가 이듬해 무와히드 조가 수복하기도 하였다.
1238년 하프스 왕조는 동맹인 바누 투드진의 밀리아나 점유를 지원하여 무와히드 조와의 완충 지대로 삼았다. 다만 무와히드 조가 멸망한 후 1261년 하프스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는 동생 아부 하프스에게 밀리아나 점령을 지시하였다. 후자는 (알폰소 10세에게 축출된) 카스티야 왕자 엔히크[1]가 이끄는 기독교도 용병대와 함께 도시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1268년 틀렘센의 자얀 왕조 역시 밀리아나 점령을 꾀하였으나 격퇴되었고, 하프스 조가 내전 중이던 1308년에야 일대를 장악하고 마그레브 중부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1438년에는 자얀 조의 한 와자가 밀리아나, 메데아, 테네스를 장악했는데 얼마후 자신의 아들에게 살해되었고 후자가 테네스의 왕을 칭하기도 하였다.
1516년 알제를 장악한 오루츠 레이스는 이듬해 츨레프 협곡을 장악하였고, 밀리아나는 오스만 제국 산하 알제 총독부의 군현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튀르크 지배층의 자나친 과세에 대한 현지인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1544년 초엽, 수마타 부족의 셰이크 부테리크는 밀리아나를 장악하고 내륙에서 알제를 봉쇄하며 정권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해 5월 알제의 핫지 파샤가 와디 제르와 엘 아프룬 사이에서 반군을 격파하며 혼란을 잠재웠다. 그후 밀리아나는 알제 총독령에 속한 서부 베이국의 동부 칼리파 (군관구, khalifalik)에 속하였다. 1774년에는 오랑의 서부 베이 모하메드 엘 케비르가 16세기의 수피 성인 아불 압바스 아흐메드 벤 유세프 에라시디의 무덤을 밀리아나로 이장하고 그를 기리는 모스크를 세웠다.
2.2. 근현대
1844년 시계탑으로 개조된 엘 바타 (엘 투르크) 모스크의 미나렛 | 프랑스령 지배기 밀리아나 시가지 지도 |
19세기 프랑스 침공기에 밀리아나는 1835년 저항군 지도자 압델카데르에 복속하였고, 그가 친히 방문하자 민중과 유력자들이 환대하였다. 이후 밀리아나는 메데아, 마스카라와 함께 압델카데르의 주요 거점 중 하나가 되었고 모히엣딘 세기르 (1835-37)와 벤 알렐 (1837-49)이 칼리프 (지휘관)로써 1만 5백 병력과 주둔하였다. 그외에 궁전이 지어졌고, 1839년에는 병기창이 세워졌다. 비록 1840년 밀리아나는 프랑스 군에게 점령되었지만 이후로도 벤 알렐과 현지 부족들은 종종 도시를 포위하였고, 알제의 프랑스 당국은 뵈죠 휘하의 원군을 보내어 겨우 구원할 수 있었다. 1843년 벤 알렐은 사망하였고, 이듬해 프랑스 군은 밀리아나에 방화하여 압델카데르의 수복 의지를 꺾어놓았다. 압델카데르 역시 도시를 프랑스에 넘기느니 차라리 불태워버리려 했다고 한다.
알제리 독립 투사들 중 하나인 알리 아메르 (알리 라 푸앵트)를 기리는 밀리아나의 동상과 그의 사진 |
한편 1901년에는 동쪽의 아인 투르키에 거점을 둔 리가 부족의 셰이크 야쿱이 봉기하였는데, 이는 1871년 이후 알제리 북부에서 일어난 얼마 안되는 반란 중 하나였다. 연이은 저항과 산간 지방의 불리한 입지 때문에 프랑스 당국은 남쪽 5km의 평지에 케미스 밀리아나를 대신 개발하였고, 따라서 20세기 들어 밀리아나는 소외되었다. 그나마 1874년에 개발된 자카르 산의 철광석 광산과 1904년에 화물과 여객용으로 케미스 밀리아나와의 간선 철도가 부설되며 도시 지위를 유지하였다. 1930년 5월, 밀리아나에서는 후일 알제리 독립 전쟁기에 FLN (민족해방전선)측 겔릴라 지도자로 활동하는 알리 암마르 (알리 라 푸앵트)가 태어났다. 그가 알제에서 자폭하여 사망한 1957년에는 밀리아나 남쪽 와디 게르구르에서 독립군과 프랑스 군의 전투가 벌어졌다. 1962년 독립 후 밀리아나의 압델카데르 사적지들이 정비되었고, 1975년 철광석 광산이 문을 닫으며 철도 역시 운영이 중단되었다.
3. 갤러리
밀밭에서 바라본 밀리아나와 케미스 밀리아나
에미르 압델카데르 박물관의 전투도
옛 자카르 광산과 철도
에미르 압델카데르 박물관
병기창 내부와 외부 모습 |
시디 아흐메드 벤유세프 모스크 |
모로코 양식의 저택 내부와 시디 아흐메드 벤유세프 모스크의 외부 |
에미르 압델카데르 박물관 내부 |
에미르 압델카데르 박물관 내부 |
[1] 1257년 내분에서 패배한 후 누이가 왕비인 영국을 거쳐 1260년 하프스 왕조령 튀니지에서 용병 대장으로 일하다가 1266년 외사촌 앙주 공 샤를의 시칠리아 왕국에 합류, 로마 의장에 오름. 하지만 샤르데냐 왕위를 거절당하자 7촌 조카 콘라딘의 호엔슈타우펜 부흥군에 합류했다가 패하고 사로잡혀 카노사에 유폐되어 샤를이 사망한 후 1291년에야 풀려나 1298년 카스티야로 귀국, 알폰소 10세의 손자인 페르난도 4세의 섭정으로 지내다 1303년에 사망한 모험가이자 풍운아. 말년에는 56세 연하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