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00:16:44

박승동

<colbgcolor=#0083FF><colcolor=#fff> 박승동
Park Seung-dong
<bgcolor=#fff> 파일:박승동수학.png
출생 1961년 2월 26일[조기입학] ([age(1961-02-26)]세)
경상북도 경주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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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0cm
학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수학교육학 / 석사[2])
서울대학교 대학원 (수학교육학 / 박사수료)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경력 EBSi 강사
서울과학고등학교 교사
경복고등학교 교사
前 강남대성학원
메가스터디 부사장 겸 사내이사
前 서초 메가스터디 학원장
별명 모기[3]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커리큘럼3. 활동4. 특징
4.1. 교과서 강조4.2. 세 줄 풀이론
5. 평가6. 여담
6.1. 복행렬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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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인터넷 강사 출신 유튜버.

2. 커리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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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2박승동 커리큘럼.png

3. 활동

서울대 수학교육과에 79학번으로 입학하여 1983년 졸업과 함께 경복고등학교로 발령받아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강의 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군대는 교직 생활을 하던 도중에 다녀왔다고 한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EBS에 출연하였다. 하지만 이 당시 EBS 강의를 본 학생들은 많지 않았고 박승동의 수업을 보는 학생도 많지 않았다. 왜냐면 당시는 EBS는 지금과 같은 인터넷 기반이 아니라 TV 채널이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 EBS 편성표를 보면, EBS 방송은 오후 4시부터 유치원 대상 프로그램을 시작, 초등학생, 중학생 강의를 거쳐 다큐멘터리와 성인 대상 영어회화, 프랑스어회화, 일본어회화를 방영했고 고교 수업은 오후 9시경 시작되어 1시간 20분간 이어졌으며, 이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 강의가 이어졌다. 즉 하루에 할당된 EBS 고교 강의는 40분짜리 강의 2편이 전부였으며, 고1,2,3 강의가 돌아가면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당시에는 야간자율학습이 사실상 강제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10시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EBS 고교 강의도 다 끝나고 방통대 강의가 흘러나오는 시작이었다. 대부분 EBS에 관심이 없었고, 설령 EBS를 보는 경우도 야자시간에 학교 텔레비전으로 강제 시청하는 것이었다(사실 시간배정의 목적도 학교에서의 시청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 방송 시간이 10시 이후까지 이어지는데, 야간자율학습은 10시에 끝나기 때문에 실제로 시청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고, 이 시간대에 EBS를 틀어주는 학교는 10시 이후까지 강제로 야간자율학습을 시키는 비인권적인 학교임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이른 시간인 7시나 심지어 일부학교는 그 이전까지 등교를 해야하던 시절이므로 당시 10시는 현재 고등학생 기준으로 1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워낙 방송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보니 이 시절 EBS를 열심히 보는 학생이었다 하더라도 학년에 따라서는 졸업할 때까지 박승동을 한번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학생들이 EBS를 보기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였다. 1995년 사교육 억제 및 공교육 강화를 내세운 교육부는 EBS 방송 강의를 전면 쇄신했다. 당시 교육부는 'EBS 수능 연계 출제'라는 희대의 카드를 사용했다. 이에 그때까지 EBS를 외면하던 학생들은 전부 EBS 교재를 사들였고, 교육부에서 각 학교에 지침을 내려 학교에서도 선생들이 출판사들로부터 커미션을 챙겨 강의하던 사설 참고서를 던져버리고 EBS 교재로 수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EBS는 사교육 억제라는 취지에 따라 당시 EBS의 메인 강사였던 유두선 등 당시 학원 강사 출신 인기 강사들을 전부 해임하고 전국 교사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강사 모집을 하여 젊고 새로운 강사진을 내세웠다. 박승동은 90년대 초반 EBS에 출연했다가 이후 사설 대형 학원의 유명 강사들이 EBS에 출연함에 따라 박승동은 한동안 EBS에서 볼 수 없었다가, 1995년 사설 학원 강사들이 전부 물러나면서 박승동은 다시 EBS에 출연하게 되었다.

당시 박승동의 명성은 실로 대단해서 공부라고 하면 당연히 자습을 생각하던 지방의 최상위권 학생들도 박승동의 수업이 방영되는 시간에는 집에 와서 TV로 수업을 들었다. 강남의 강사들은 대단하다더라 말은 들었지만 가서 들을 수는 없던 시절 전국 1타 박승동의 강의를 TV로 접한 지방 학생들의 충격은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4] 지방 뿐만 아니라 서울 학생들도 박승동의 강의로 수학 공부를 하였다. 전율이 일 정도로 쉽고 창의적인 풀이, 교과서와 겸손한 자세를 강조하는 태도 등이 한데 어우러져서 박승동을 가장 이상적인 강사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박승동은 EBS로 유명해진지 불과 1년여만인 1996년 교사직을 그만두고 사교육계로 진출하여 강남대성학원에 입성했다. 이에 대해 당시 공교육 매체인 EBS로 뜨자마자 공교육을 버리고 사교육으로 간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박승동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공교육의 붕괴를 더 이상 지켜보기 싫다"고 말했다. 사교육에 진출한 뒤 한참 지나고 나서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평준화가 없어져 인재를 키운다는 보람만 있으면 말이죠. 하지만 한반 30명 중 2~3명만 교사 설명을 듣는 지금 교실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사 시절 박승동은 다른 교사들과 달리 서울과학고등학교에서 4년 순환 근무 원칙을 적용받지 않고 장기 재직하고 있었고, 다른 학교로 전근가더라도 과학고 교사들이 그러하듯 한성과학고 등 다른 과학고로 순환 배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게다가 90년대부터 서울의 인구를 고려하여 제3의 과학고 설립이 꾸준히 추진되었고, 실제로 세종과학고등학교가 개교했다. 때문에 박승동이 사교육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서울 시내 과학고와 인근 경기, 인천 지역 과학고들을 돌다가 정년 퇴임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박승동 본인의 발언에서도 암시되듯 평준화를 완화하고 특목고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실제로도 특목고가 지속적으로 확대됨은 물론이고 자사고까지 생겨났다. 이런 사정으로 박승동의 이러한 발언들은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있다.

어쨌든 당시 강남대성학원은 서울과학고 교사 박승동을 영입했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종로학원에 가려 2인자 위치에 있던 강남대성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실제 대성학원에서도 박승동의 인기가 대단했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90년대 말부터 수능이 물수능으로 바뀌면서 엄청나게 쉬워졌고, 만점자가 양산되었다. 교과서와 기본서, 유형서 정도만 풀어도 최상위권 수준의 고득점을 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수학보다 사과탐의 영향력이 더 크던 시절이기도 했다.

요즘 흔히 박승동이 90년대 ~ 2000년대에 걸쳐 전국 수학 1타라고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상당히 다르다. 인강 강사로서 그의 전성기는 생각보다 짧은데, 그가 전국 1타 수학 강사였던 시절은 2005학년도 EBS 수학1 고득점 200제 강의와 메가스터디에 처음 이적해서 녹화한 2005, 2006학년도 강의까지 1년여 정도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EBS와 메가스터디를 합쳐서 집계한 결과이다. 무료 EBS를 제외한 유료 인강에서 박승동이 1타였던 시절은 몇 개월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인강 강사들이 대거 이적하던 공백기에 매우 운이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엄밀히 말하면 박승동의 전성기는 90년대 중반 EBS에 출연했던 시기(1995~1996)와 오프라인 학원이었던 대성학원 시절(1996~2004)이었다.

2000년 손주은이 메가스터디를 만들며 인강이라는 플랫폼이 처음 생겨났고, 박승동이 소속되어 있던 대성학원도 2000년 하반기 '디지털대성'이라는 인강을 시작했으며, 박승동은 인강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대성은 3개월만에 망했다. 당시 디지털대성 대표의 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수강생이 천명 밖에 되지 않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디지털대성은 3년만인 2003학년도를 맞아 다시 인강 사업을 시작했고, 수학에는 박승동과, 서정원이 대표 강사였다. 하지만 당시 디지털대성은 '상위 10%를 위한 고품격 인강'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아예 처음부터 중하위권은 외면했고 강사진은 전원 대성학원 내부 강사로만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디지털대성은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이투스와 코리아에듀에 밀리며 처참한 점유율을 보였다. 대성학원이 유명 학원이긴 하지만 재종반으로서 강사 연봉이 제한되어 있었고 때문에 대중적인 인지도를 가진 강사는 EBS 출신 박승동을 제외하면 전무했다.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명강사들은 노량진과 강남의 대형 단과 학원 출신이었다. 이러한 노량진, 강남 유명강사들을 경쟁적으로 영입했던 메가스터디, 이투스 등과는 경쟁이 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박승동이 EBS를 떠난지도 오래되었고 해서 그를 잘 모르는 학생들이 많았다. 2004년부터 디지털대성은 '대성마이맥'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하며, 최상위 10%라는 문구를 지웠지만 학생들은 마이맥이라는 네이밍부터 너무 구리다고 깠다. 게다가 대성마이맥의 너무나 촌스러운 교재 디자인과 조악한 인쇄 품질은 90년대 학력고사 시절 참고서만도 못하다는 악평을 받았다.

그러던 중 2004년 4월에 사교육 억제 대책의 일환으로 EBS 계열 인터넷 강의 사이트인 EBSi가 만들어졌고, 이 때 박승동이 전격적으로 영입되면서 거의 8년만에 EBS로 복귀하였다. 이 때 수학1 고급형을 맡아 개념 위주의 강의를 했고, 그 해 여름방학에는 수학1 고득점 200제 전국 순회 강연까지 소화하면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그 해 말에 메가스터디로 이적하면서 1년도 채 안되어 EBS에서 하차하게 되었다.

메가스터디에서 첫 강의를 하던 2005년은 매우 절묘한 시기였는데, 인강이라는 플랫폼이 처음 도입된 후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오늘날과 같은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고, 또한 새로운 인강 업체들이 마구 생겼다가 망하거나 합종연횡을 하며 변화가 심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90년대말 노량진, 서울역, 강남 등 오프라인 대형학원에서 인기를 얻었던 1타 강사들이 인강이라는 매체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인강 합류를 거부하는 등으로 수학 분야에 격변이 있었던 시기였다.

한편 현재 네임드가 된 한석원, 삽자루, 신승범, 심주석 등이 인강에 진출하기 시작하던 시기 또한 이 무렵이었는데, 당시 인강은 패스라는 개념이 없었고 수학 강좌 하나에 30~40만원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상당한 고액이었던데다 같은 회사의 타 강사 수업을 듣는데도 또 다시 강의를 사야 했다. 때문에 인강 강사들이 인지도를 얻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이랬던 시절, 과거 전국적인 인지도가 있었던 박승동이 잠시나마 1타를 차지했던 것. 사실 EBSi가 론칭하던 시기와 맞물려 교육 기회 균등을 기치로 출범한 무료 인강 티치미한석원, 한석만, 김찬휘의 강의가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고, 오랜만에 EBS로 복귀한 박승동은 90년대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또한 EBSi에 박승동과 함께 남언우가 영입되었는데, 남언우는 90년대부터 종로학원에서 활동하던 강사로 당시 극상위권이 몰려있던 종로학원 학생들에게 큰 인기와 존경을 받던 강사였다.[5] EBS에서 박승동은 수학I을 강의하였고, 남언우가 수학II와 미분과 적분을 맡으면서 이과를 담당하게 되었다. 문이과 공통과목인 수I의 파이를 가져가려는 전략이었는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수I 강의에서 EBS에 갓 데뷔한 심주석이 중하위권 쪽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1타를 차지했으며, 이과 수학을 전담한 남언우는 이과생들에게 큰 인기를 모으게 되면서 박승동의 입지가 어정쩡하기도 했다.

결국 2005년 메가스터디에 합류한 뒤의 박승동은 1타를 차지하지 못했고, 소순영에 밀려 2타에 그쳤다. 당시 1타였던 소순영은 서울대 수학교육과 출신이며 서울과학고, 한성과학고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90년대말부터 EBS를 통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소순영은 편안한 자세로 친화력 있고 대중적인 강의를 보였다. 그의 풀이와 설명은 매우 쉽게 느껴져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그러면서도 수학적 원리와 핵심을 잡아주어 중하위권에서 상위권에게 이르기까지 큰 인기를 얻었다. 소순영은 박승동과 매우 흡사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지만 당시 엘리트 이미지가 강했던 박승동과 달리 강의에서 자기자랑질은 물론이고 일체 현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많은 학생들은 자상한 태도로 항상 어려워보이지 않게 가르치는 그가 이렇게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임을 뒤늦게 알고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2006년 소순영이 당시 인기 강사들이 모여 만든 새로운 인강업체인 엑스터디로 이적하면서 박승동은 2006년 잠시 메가스터디 1타에 등극했다. 이 시절 박승동이 메가스터디 1타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박장준이 당시 메가스터디 1타였다는 주장도 있다. 메가스터디 수학 1타 계보가 소순영->박장준->신승범으로 이어진다는 것. 다만 박장준에서 신승범으로 1타가 교체되던 2008년경 잠시 박승동이 1타였던 적이 있다고도 한다. 어쨌든 2006학년도 기준 당시 상위권 수험생 사이트였던 오르비 기준으로 박승동은 소순영, 한석원과 더불어 가장 많이 언급되던 상위권 대상 인기 강사 중 한명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수험 사이트에서의 인기와 실제 강사들의 매출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2006년 박승동은 수학 인강 시장에서 마이너 인강으로 자리를 옮긴 소순영, 티치미의 한석원 등과 삼파전을 이루었다. 이것이 그의 짧은 전성기였다. 하지만 소순영의 이탈 이후 메가스터디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내기 시작했으며, 이시절 급성장하던 이투스, 비타에듀, 엑스터디, 티치미 등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나중에 신승범을 영입한 후에 극복된다.

한편 당시 마이너 인강이었던 비타에듀삽자루가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키면서 2007년 삽자루가 수학 1타로 등극했다. 비타에듀는 순식간에 3대 인강으로 떠올랐고, 2009년쯤에는 메가스터디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 삽자루의 등극은 소순영, 한석현, 박장준, 한상범, 박승동 등 1세대 인강 강사들이 도태되고 2세대 인강 강사로 교체되는 신호탄이었다.

사실 박승동이 2005년 짧은 전성기 후에 곧바로 내리막을 타게 된 것은 당시 입시트렌드 변화 탓도 크다. 박승동이 실질적 전성기에 있던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에 치러진 수능 중 90년대 말 수능부터 2001학년도 수능까지는 수능이 쉽게 출제되었다. 이때는 예체능을 제외한 대다수의 과목이 수능 필수였기 때문에 난도를 높이기 곤란하였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정책기조가 쉬운 수능이었기 때문이다.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박승동은 사실 원래 EBS 시절부터 상위권이 아니라 쉬운 수능 트렌드에 맞게 중상위권을 타겟으로 하던 강의를 펼쳤다. 대성마이맥 시절에도 최상위권 포지션은 서정원이 가져갔고, 박승동은 중상위권을 공략했었다.

하지만 200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대격변이 있었다. 수능은 2005학년도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2004학년도 수능까지는 사회탐구와 과학탐구가 통합되어 있어서 문이과 모두 물화생지1 수준의 공통과학 및 윤리+한국지리+한국사+일반사회가 포함된 공통사회를 응시해야 했다.[6] 하지만 2005학년도 수능부터는 사회탐구와 과학탐구가 분리되는 것도 모자라 각각의 과목을 모두 선택하게 되면서 이과는 국영수 + 과탐 2~3과목, 문과는 국영수 + 사탐 2~3과목 체제로 바뀌었고 이후 사과탐 2과목 체제가 정착되며 2021년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리영역 또한 2004학년도까지는 문과/이과/예체능으로 나뉘어서 공통수학은 무조건 모두 응시하고 문과가 수학1, 이과가 수학1+2를 응시하도록 했지만 2005학년도부터는 가형 수학1+2+선택과목, 나형 수학1로 개편되면서 수리영역의 전반적인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게 되었다.

때문에 "모든 수능 수학 문제는 세 줄 안에 풀리도록 출제된다"는 세 줄 풀이론을 강조했던 박승동의 강의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예전만큼의 명성을 찾지는 못했지만, 박승동 역시 이런 트렌드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하여 2004년 여름방학 당시의 EBS 고득점 200제 강의에서 온갖 고난도와 지저분한 문제를 세 줄 풀이론으로 해결하면서 박승동의 대표 강의이자 그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강의로 남아있기도 하다.

설상가상으로 스카이에듀에서 듣보잡 취급받던 신승범이 2007년 메가스터디로 이적해 오고 나서 2008년 곧바로 메가스터디 1타 자리도 신승범에게 내주게 되었다. 사실 스카이에듀에서 듣보잡이었던 신승범이 메가스터디로 이적한 후 전국 1타가 된 것은 시사점이 많은데, 일단 스카이에듀에서 듣보잡이었던 신승범이 메가스터디로 이적해오자마자 1타를 차지할 정도로 박승동의 지지층이 허약했다는 점, 그리고 스카이에듀에서 듣보였던 신승범이 순식간에 전국 1타가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케팅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회사인 메가스터디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박승동이 그동안 고전했었고, 때문에 메가스터디 자체가 그시절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는 점을 보면 인강 강사로서 박승동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형 인강업체의 후광과 마케팅빨은 당시에도 엄청났는데, 신승범의 사례도 그렇고, 과거 박승동을 압살하던 소순영이 메가스터디에서 엑스터디로 옮긴 후 엑스터디와 함께 몰락해 버린 사례도 그렇다.

중위권 포지션을 삽자루와 심주석, 그리고 얼마 후에 나타난 정승제 등이 완전히 먹어버림에 따라 박승동은 자연스레 최상위권 포지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는데, 하지만 상위권 대상 강의쪽에서는 신승범과 한석원이 큰 인기를 얻었다. 게다가 2000년대말 당시 수능 수학이 급 어려워지면서 강호길, 이창무, 남휘종 등 극상위권을 노린 강사들이 여럿 뜨면서 박승동은 잊히게 되었다.

그의 전성기를 경험하지 않았던 학생 생각에는 '유명한 수학 강사는 많은데 왜 박승동만 수학의 신, 전설 이런 대단한 별명을 가지고 있는 거지?' 또는 '메가스터디 설립에 공을 세운 다른 강사도 많은데 손주은은 왜 중간에 영입한 박승동에게 부사장 자리를 준 거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EBS 시절 박승동은 인기 있는 수학 강사 정도가 아니라 TV 앞에서 공부하던 학생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강사였다. 대성학원 시절엔 학생들이 강남 대성학원에 등록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오랜 기간의 명성이 박승동을 학원 강사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로 만들어 준 것이다.

하지만 박승동이 단지 강의력만으로 메가스터디 2인자 자리에 오른 것만은 아니다. 메가스터디에는 박승동보다도 훨씬 많은 매출을 거둔 강사들이 많이 존재해 왔다. 초창기 메가스터디는 타사와의 치열한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때문에 강사들에게 연봉을 지급할 자금도 부족하게 되어 주식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메가스터디 초기 대표강사였던 박승동은 메가스터디 지분을 상당히 보유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인강을 접할 수 없게 된 오늘날 오히려 그의 강의가 실제 이상으로 신격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90년대 당시 박승동이 유명했던 이유는 EBS의 유일한 수학 강사였기에 지방에 있는 학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 당시 EBS는 지금과 같은 인강이 아니라 TV 채널이었다. TV 채널로서 시간대 별로 쪼개서 방송해야 했기에 강좌 수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고, 과목별 강사는 한두명 밖에 없었다. 게다가 박승동의 강의는 교과서를 강조했기에 해설 풀이와 별반 차이가 없고 매우 단순하여 굳이 그의 EBS를 볼 필요 없이 독학하는 게 나았다고 생각하는 학생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로봇처럼 딱딱한 말투 때문에 무척 졸리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강의를 보는 학생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는 지금보다 수능이 훨씬 쉬웠고 문제도 매우 평이했기 때문에 굳이 EBS를 보지 않는 학생도 많았고, 문제가 너무 쉬웠기에 박승동의 강의도 사실 별것이 없었다.[7] 그가 항상 교과서를 강조하고 세줄 풀이를 슬로건을 삼았던 것도 이같은 시대적 배경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박승동의 수학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던 간에 그같은 뛰어난 실력을 보여줄 만한 문제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는 것. 게다가 박승동의 강의는 매우 불친절했다. 항상 기본을 강조했기에 기본적인 내용은 학생들이 이미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을 하지 않았다. 혹은 개념 설명에서는 또 너무 기본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고, 수학에 엄밀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직관적인 설명이나 풀이를 하지 않는 편이기에 해설지 풀이 이외의 인사이트도 그다지 없는 편이어서 굳이 강의를 들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학생들도 많았다. 인강 시대에 들어서 그나마 매우 유해진 것이고 EBS 시절에는 정말 강의가 딱딱했다고. 아마도 그의 풀이가 명성을 떨친 것은 주로 고난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강남대성학원 시절인 듯 하고, EBS 시절에는 당시 수능 정책이나 EBS 정책으로나 그다지 차별화된 강의를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오늘날 박승동이 상위권 수학을 가르친 것으로 많이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항상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박승동은 가장 큰 파이인 중위권 쪽을 공략하기 위해 90년대 EBS시절부터 많은 공을 들였지만 이쪽에서 경쟁력이 별로 없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상위권 대상 강의로 포지셔닝했으나 이쪽에서도 한석원, 신승범 등에 밀렸고, 극상위권 대상 강의에서는 아예 작정하고 최상위권 수준에 맞춰 강의한 강호길, 이창무 등이 더 큰 인기를 얻었다.

사실 박승동은 인강이 없고 EBS가 TV로 방영되던 시절에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많은 학생들이 보았지, 그가 실제로 인강에 진출하고 나서는 그의 강의는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EBS TV 시절에도 지방 학생들은 많이 보았는지 몰라도 서울에서는 물론 챙겨보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의 전성기였던 EBS TV 시절에는 강의가 딱딱하고 불친절했고, 인강으로 진출한 후에야 그나마 타 강사들과 경쟁하느라 설명이나 풀이가 풍부해졌고 강의도 매우 학생 친화적으로 바뀌었고, 아울려 중하위권에 인기가 많았던 삽자루와 차별화를 하다보니 어쩔수없이 상위권 타겟으로 표지셔닝하게 되고 그렇게 고난이도 문제 위주로 해설하다 보니 은둔의 고수 같은 이미지가 나중에 형성되게 된 것. EBS 시절에는 정말 불친절하고 딱딱했다. 게다가 비음과 쇳소리가 절묘하게 섞인 하이톤의 목소리는 특유의 억양과 함께 "엑스" 등을 강조할 때는 가래 끓는 발성이 쇳소리에 더해지며 청각적으로 그의 수업을 듣기가 상당히 거북했다는 평도 있었다. 1년 강의 내내 그의 웃는 얼굴을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요즘에는 수능 수학이 워낙에 어려워져서 교과서 기반의 실전 개념, 수험생들이 따라하기 쉬운 다양한 방식의 고난도 문풀 강의 스타일의 수학 강사가 인기를 얻자[8] 이런 스타일의 원류인 박승동이 재평가 받고 있다.

2020년에는 개념 강좌인 지피지기와 문제풀이 강좌인 백전백승을 촬영했다. Q&A게시판에서는 지피지기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낸 과제를 점검해주고 질문을 받아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21년 3월 메가스터디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직에서 물러났으며, 2021년 12월 6일을 끝으로 메가스터디와의 계약을 종료하였다. 2021년 압구정 개념상상학원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4. 특징

4.1. 교과서 강조

대표적인 교과서 마니아다. #

아직도 하루 일과의 거의 반은 교과서 연구라고 한다.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전 출판사 교과서 지르려고 수십 만원씩 퍼붓는 건[9] 예삿일이고, 심지어는 외국의 교과서도 많이 본다고.[10] 일례로, 과거 경우의 수와 확통이 수학I에 있던 시절 문제를 풀어주면서 "제가 북한 교과서에서 이것과 똑같은 문제를 본 적이 있었는데, 다만 거기서는 문제 내용이 '김정일 장군님 만세'라는 문구가 나오는 경우의 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각 단원 개념 설명 때 마다 교과서를 읽으라, 교과서에 다 있다. 교과서의 내용의 우수성, 교과서가 좋은 이유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개념 설명을 시작하면 충격적이게도 교과서의 정의를 책을 보고 그대로 읽는다. 한 줄에 불과한 정의이고, 매일 세 종류의 교과서를 읽으며 연구를 한다고 하지만, 정확성을 기하려고 해서인지 교과서의 정의를 외워서 설명하는 법이 없이 항상을 책의 정의를 그대로 읽어 준다. 그리고 이것으로 아예 개념 설명을 끝내거나 키워드가 되는 교과서의 수식에 대해 한 문장 정도의 아주 짧은 설명을 덧붙인다. 그러고는 이것이 요즘 자주 출제된다, 매년 출제된다, 올해도 출제될 것이다. 이런 설명을 덧붙이면 개념 설명이 끝난다. 학교 선생님, 그리고 서울대 출신답게 아주 컴팩트하다.

다만 그에 대해서 반론이 있다. 강의에서 보면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충실히 할 것을 강조하지만 그의 스킬은 평범한, 아니 우수한 학생들도 교과서만 보고 얻을 수 있는게 아니다.[11] 즉, 자신은 수학교육전공을 충실히 이수한 지도자이니 그에 입각해서 수학교과서를 바라보는 시각은 풍부하게 이끌어낼 수 있지만 학생들은 독학으로는 그러기 힘들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 메가스터디에서 소순영이 1타로 존재할 때 2타였고, 소순영이 엑스터디로 이적하자 반짝 1등을 거머쥐었지만, 신승범의 등장으로 다시 2타. 은근히 콩라인이다.

다만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기벡을 가르칠 때 상대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본인 전공이 행렬이기도 하며 미적분은 잘 가르치지만 기벡은 응용도 종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교과서만 붙잡고는 힘든 경우가 많으며 일선 학교에서도 기벡을 잘 못 가르치는 수학선생님이 걸리면 그 학교의 이과생들은 고생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도 많다.[12] 재수종합반이야 수학 강사들이 파트를 나눠서 수업하기 때문에 기벡을 안 할 수도 있는데다가 EBS 수업도 수학2 수업은 한 적이 없어 초기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간도형, 기하, 벡터 파트는 박승동의 강의로 커버하지 못한다는 평도 제법 있었다. 본인이 기벡을 못하는건 아니지만 학생들이 기벡을 잘 하게 가르치는 능력은 타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평.[13]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가형에서 잘 먹히는 한석원, 이창무, 현우진, 남휘종, 강호길 등은 물론 가형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신승범보다도 은근히 가형이 밀리는 구석이 있었으며 결국은...

4.2. 세 줄 풀이론

또한 그는 특유의 수능 문제풀이 철학인 '세 줄 풀이론'을 가지고 있다. 수능 수학 문제는 반드시 세 줄 안에 풀리도록 출제되며, 그렇게 풀지 못하면 학생이 풀어도 제대로 풀지 못한다는 것. 과거에 연산이나 문제해결력보다는 테크닉과 센스로 풀이과정을 많이 축약하는 것이 가능했던 7차 교육과정 초반까지는 이게 통했는데, 근 몇 년동안 수학 영역의 출제경향이 문제에 대한 미시적 분석과 연산이 중요해 지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옛말이 되어버렸다. 당장 2011 수능에서 극악의 정답률을 기록했던 수리 가형 25번 문제는 아무리 천재적인 발상으로 뇌를 굴려도 세 줄 안으로는 절대 안 풀린다. 그럴법도 한 것이, 박승동이 주류로 활동하던 시절은 2000년대 초중반. 지금으로부터 무려 20년 전 경향이니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수리 가형 24번은 다음과 같이 3줄에 풀린다. 다만, 박승동의 '3줄 풀이'란 엄밀하게는 단순히 풀이가 3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과정 내에서 가능한 기발한 발상으로 문제를 극도로 단순화시켜 3줄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박승동식의 완전 세 줄 풀이론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박승동 본인도 11년 이후 수업에서 이 기출문제를 다룰 때 설명충스럽게 접근하기도 했다.

f(x)-3=x²(x-2p)²
f(p)=19, p= 2
따라서 f(-2)=147

소순영의 이적 후 박승동이 그 자리를 차지하며 메가스터디의 1타가 된지 오래되지 않아 다시 그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2005년 수능이 선택제로 바뀌면서 수학이 많이 어려워졌는데, 박승동이 그동안 강조하던 세줄 풀이론이 먹히지 않는 경우가 늘어났던 탓도 있다.

5. 평가

교과서로만 독학하여 서울대학교 본고사에서 수학 100점[14]을 받은 박승동이 내가 본 유일한 천재였다.

박승동은 수학을 정말 잘 하는 사람이다.

대한민국에서 나와 박승동만이 유일하게 시험 끝난 당일날, 해설지가 발표되기 전에 바로 해설강의를 게시할 수 있었다.

직접 '서울대 수교과 3대 전설이라시면서요?'라고 묻자 박승동은 본인이 가장 독보적이었다고 대답했다.

수업시간에 수업 내용에 감동하여 박수를 쳐본 적이 있는가? 박승동은 정말 수학의 신이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풀이법으로, 엄청나게 복잡하고 긴 풀이과정을 단 몇 줄만의 계산과정만으로 풀어버리곤 한다. 어떨 때는 간단하게 문제가 풀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교실에선 수많은 탄식, 탄성과 함께 우렁찬 박수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만약 내가 수학 강사가 되어 아무리 노력한들 이와 같은 실력을 가질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박승동의 실력은 대단했었다. 수많은 강의를 들어봤지만, 박승동만큼 수학에 대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강사는 없었다.

박희성 (강사)
학창시절 나보다 먼저, 그리고 더 간결한 풀이로 수학을 푸는 사람은 박승동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교수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나 아마 교수들은 나를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 성적은 A+이었으나, A0, A-가 어쩌다 섞여 있는 정도였다.

박승동 본인이 모 수강생의 질문글[16]에 답한 내용
대한민국 강사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평가받는다.

단적인 예로 2004년 여름에 출간된 EBS 수학1 고득점 200제가 대표적인데, 특히 경우의 수를 다룬 146번이 매우 극악의 난도에다가 해설지에서도 아무 말 대잔치 수준의 장황한 내용 일색이었던 터라 당시 최악의 문제로 손꼽혔지만 해설강의에서 박승동은 이 문제를 너무나 간단하게 풀어버렸다.[17] 오죽했으면 2005년 당시 어느 수험생이 저 강의를 비롯한 박승동의 풀이를 유심히 지켜본 뒤[18] EBS 수능특강 수학1 교재에 나온 경우의 수 문제 모두를 박승동식 풀이법으로 쉽게 해결했다는 감사의 글을 메가스터디 게시판에 적었을 정도.[19]

6. 여담

  • 입시 커뮤니티에서 떠돌던 썰에 따르면 30억 원에 메가스터디로 이적했다고 한다. 다만 박승동 본인이 밝힌 바로는 메가스터디보다 강남대성쪽의 대우가 더 좋았으며 더 큰 물에서 헤엄치고 싶었다고. 실제로 서초 메가스터디 학원장을 오랫동안 지내며 수학뿐만이 아닌 전체적인 교육 철학을 드러냈던 것으로 볼 때, 높은 직함을 원했던 듯 하다.
  • 키는 180cm라고 한다.
  • 계산과 공식에 상대적으로 약하다. 앞서 언급한 세줄 풀이를 기발하게 내놓은 뒤 마지막에 단순 계산만 남겨놓고 답을 잘못 낸다거나, 혹은 공식을 쓰려는데 생각이 안 나서 당황하다가 멋쩍게 사과하는 패턴이 상당히 많은데 이럴 때마다 "제가 계산에 약합니다." / "제가 공식 잘 못 외워요."라는 말을 한다. 사실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단순 계산이나 공식 암기보다는 답을 내기까지의 과정이 핵심이기 때문에 계산/공식에서 실수하는 것은 수학 교육자로서의 자질에 큰 결함은 아니다. 다른 수학 강사들의 수업에서도 계산 실수를 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대표적인 말버릇으로는 오호? 아하! 선생님, 나 이거요~, 전 ~한 방법으로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그래. 이렇게 하다가는 재수합니다. 완.개.수.만. 제대로 복습하였는지요 저저저저 가만가만...(문제를 풀다가 단순 계산 실수가 나왔을 때)등등등. 그리고 절대로 반말을 하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
  • 강의 중 트림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 종합반 수강생들에 의하면, 재수종합반 정규 수업 시 수업 수준이 당시 평이했던 수능 수준에 비해 높아서 수능이나 수리논술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지라 서정원과 더불어 수업을 듣지 않는 정규반 학생들 수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성격이 매우 오만방자하다고 한다. 박승동과 수십년째 친분이 있는 재종반 타 강사들의 말에 의하면 박승동이 자기는 재밌다고 분위기 띄우려는 개그를 이런식으로 한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고려대를 나온 젊은 강사에게 "남들 공부했을 때 뭐 하셨는지요?" "고대라는 게 어디있는 학교입니까?" 이런 식. 자기 딴에는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 만난지 얼마 안되는 강사들에게는 크나큰 상처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물론 오랫동안 알고온 강사들은 '새키 애쓴다' 쯤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2000년대 후반에 강남메가 교무실에 출몰하여 소순영을 비롯한 몇몇 강사들과 모여 앉아 껄껄거리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 평소 망상이 많아 인사를 잘 못 받는다고 한다.
  • EBS 강좌 및 메가스터디 강좌는 현장강의보다는 스튜디오 강의가 주를 이루는데, 지루하다는 평이 많다. 심지어 박승동 본인도 교사 재직 시절 한 반에 2~3명 빼고 전부 잤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강의를 들어본 사람에 의하면, 개그맨 뺨칠 정도의 폭소를 유발한다고. 수업 중 오바하기, 이상한 소리내기, 소리지르기 등 여러 스킬을 이용하여 수강생들을 웃겨준다. 그야말로 수학계의 최만수. 주로 자뻑, 자학, 학생 한명 고르고 무시무시하게 갈구기 등을 소재로 써먹는데 상당히 웃긴다. 다만 패턴이 한정되어 있는지라 계속 보면 생각만큼 재밌지는 않다고.
    • 실제로 2004년 EBSi에서 여름방학 특집 전국순회 공개강좌를 할 때 박승동이 고득점 200제 수학Ⅰ 강의를 했는데, 그야말로 빵빵 터지는 개그가 자주 나왔었다. 예를 들면 통계 문제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푼 뒤에 "오늘 여러분이 새로운 것을 배웠으니 집에 가셔서 부모님 장보는 것을 도우면서 야채와 고기를 살 때 각각의 중량이 얼마나 차이나는지 평균과 분산을 내보고 가장 알맞는 것을 구입해봅시다."라는 개그를 시전하는가 하면, 분산을 쉽게 구하는 방법을 가르쳐줄지 말지를 학생들에게 물어봐놓고 "안 가르쳐줄래요."라는 드립을 선보이기도. 당시 강남대성학원 현장 강의 수강생의 증언에 의하면 학원에서보다 훨씬 더 다양한 개그를 선보여서 엄청 웃겼다고 한다.
    • 2004년 봄에 촬영된 EBS 수학1 강의 도중 이런 방송사고가 나왔다. 사실 저건 박승동이 의도한게 아니라, 엄지/검지/중지를 펴고 학습과 관련된 3가지를 강조하다가 나온 사고였다. 첫째와 둘째를 말하는데 하필이면 엄지부터 접다보니 일어난 해프닝. 이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것을 본인도 알아서인지, 메가스터디 강의 때 다시 시전했다.
  • 언론 인터뷰에서 강의 중 개그를 하거나 분필을 던지는 등의 쇼를 하는 강사들, 사투리를 쓰는 강사들을 크게 비판했다.
  • 매일 타 강사들의 인강을 꼼꼼히 본다고 한다.
  • 타 강사들과 다르게 인강 초창기부터 본인이 직접 게시판의 질문글에 답변을 단다.
  • 수강생의 질문에 친절한 편은 아니다. 단과 수강생들에게는 그나마 질의응답을 잘 해주는 편인데, 종합반 애들이 질문을 들고오면 일단 질문 내용을 듣지도 않고 교과서부터 읽고 오라고 말하며 돌려보낸다.
  • 골초이다. 원장실에 크고 아름다운 공기청정기를 가동하고 있었으며 골초로 알려진 다른 강사들과 함께 오손도손 모여서 흡연을 하고 있는 모습이 종종 별견되었다. 인터넷강의 질문에 답변을 달아주면서도 입에 담배를 물고 답변을 달 정도. 탁자 위에는 재떨이와 종이컵같은 재떨이 대용품이 가득 채워진 상태로.
  • 예전에 경복고 재직 시절 유희열을 가르친 적이 있다고 한다. 공부를 무척 잘해서 가만 놔둬도 어떤 대학이든 갈 수 있는 학생이었는데, 입시상담 때 서울대 음대를 가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그리고 나중에 새벽 방송 MC로 활동하는 걸 보고 또 놀랐다.
  • KBS2 퀴즈 프로그램 1 대 100 최초의 상금 획득자다. 2007년 5월 1일 1대100 첫 방송 전반전에서 가수 길정화와 함께 최후의 2인이 되면서 상금 786만원을 나눠가져 393만원을 획득했다.[20] 당시 박승동의 소개란에는 "족집게 수학강사"로 표기되었다. 이때 출제된 문제는 이 곳에서 볼 수 있으며 실제로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고 한다.
  • 2010년 말에는 서초 메가스터디에서 수학의 정석으로[21] 기하와 벡터 2012학년도 수능 대비 강좌를 진행했는데 자기 얼굴을 잡아 늘리고 밀면서 일차변환으로 도형의 형태가 변하는 원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TBS를 제2의 EBS로 개혁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TBS 대표이사 물망에 올라가 있다.
  • 2024년 개념상상학원, 개념폴리아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유튜브 개상TV) 유튜브에서 취미로 각 대학의 논술 문제와 평가원, 교육청 모의고사를 해설하는데 과거의 그 명성은 어디가지 않은 듯 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6.1. 복행렬 논쟁

박승동을 상징하는 논쟁으로 유명하다. 일반인들에게는 중지 짤 다음으로 가장 회자되는 사건. 유명한 이유는 다름아닌 박승동의 마지막 한 마디 때문이다.[22] 원본 그대로를 작성하였으므로 문법상 오류가 다소 존재할 수 있음을 유의하기 바란다.
학생: 일단 AB가 단위행렬 이라면 BA도 단위행렬 이라는 것을 성립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식은 AB=BA=E 라는 식이 성립함이지요. 그런데 이런 명제가 하나 있습니다. (A+B)(C+D)=E 에서 C+D의 역행렬은 A+B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명제는 거짓입니다. 같은 행렬 곱하기 행렬이고 그 괄호 안에 덧셈이라는 연산만 더 해줄뿐인데 위에 식은 맞고 아래식은 틀립니다. 일단 여기서 (C+D)(A+B)=E 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역행렬이 아니라는데요 제가 듣기론 행렬 A+B=a C+D=b 라고 치환해서 계산할수 없을 뿐더러, 복행렬 때문이라고도 하는데요 복행렬이 도대체 뭔가요? 그리고 저 두 식의 차이점이 뭔가요? 정말 궁금합니다 ~!
박승동 : 안녕하세요. 수리영역 박승동 입니다. 죄송합니다. 저의 강의 수강내용 질문에 답변을 합니다,. 임의로 아무 학생의 것을 다 답변드리지 못함을 용서 하세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어디서 이상한 것을 배운 것으로 보입니다. 복행렬이 무엇인지요? 그런 것은 처음 듣습니다. 바르게 학습 하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학생: 선생님의 수강학생이 아니라서 답변을 못 달아주셔도 됩니다. 다만 제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번에 제가 물어봤던 그 명제 A(A+B)=E 일때 (A+B)의 역행렬은 A이다. 이건 거짓입니다. 근데 선생님은 당연히 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물어볼 때 복행렬도 모르시더군요. A(A+B)=E 일때 A는 단행렬 이라고 하고 A+B는 복행렬 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A(A+B)=E 일때 A+B의 역행렬은 A 이다. 이거 거짓입니다. A(A+B)= A^2+AB=E 라고 해봅시다 (A+B)A= A^2+BA 인데요 AB=BA가 같다는 조건도 없는데 저거의 교환법칙이 성립한다고 보십니까? 반례 하나 세워드리고 싶습니다만 좀 쉽지가 않습니다. 찾으면 다음에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전 이상한것을 배워온것이 아닙니다. 아마 바르게 다시 행렬을 학습하셔야 할 분은 선생님인거 같습니다. 참고로 제 수학스승님은 서울대 경영학과 89학번 박기원 수학선생님 이시고요. 선생님이 고등학생 때 수학공부 하실때 책 이름이 수학의 왕도였나? 동경대 수학교수가 쓴 책에서 저것을 봤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강력히 주장하시는 겁니다. 참고로 제 선생님이 서울대 수학과 교수님 한테 확실히 알기 위해 작년에 물어본겁니다.
박승동: 안녕하세요. 수리영역 박승동 입니다. 참 이상한 학생입니다. 바르게 공부하세요, 어디서 이상한 것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수학을 전공한 시람과 비전공자의 확인도 안된 이상한 정보를 믿는지요? 더 이상의 답변의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학생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E 라고 하는 단위행렬의 정의 그리고 역행렬의 정의 입니다. 복행렬이라고 하는 것은 있지도 않습니다. 어디서 그런 것을 배웠는지 좀 이상 합니다.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이 수학을 전공한 사람과 비교가 되는지요? 정신차리고 공부하세요. 나는 서울대학교 수학교육학과 79학번이고 수석 졸업생 입니다. 경영학교 졸업생의 그 이상한 것을 믿는 학생이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그런 이상한 말도 안되는 것을 믿는지요? 그분이 눈이 3개인 사람이 정상이다라고 하면 믿을 학생으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조기입학] 빠른생일을 적용하여 1967년에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2] 석사 논문: A Study on projections in matrix algebras[3] 목소리 및 성량이 모기와 유사하다는 의미로 붙여진 별명.[4] 이 때는 EBS에서 강의하는 대부분의 강사들이 학교 교사였다. 이만기도 당시에는 교사였기 때문에 출연하는 때였다.[5] 90년대말 본고사가 폐지됨과 동시에 수능이 급 쉬워지면서 대성학원은 당시 웬만한 시중교재보다도 쉽게 내용을 바꾼 반면, 종로학원은 과거 명성에 집착하여 물수능 시절에도 여전히 본고사 난이도의 극악한 난이도를 가진 교재로 강의했었다. 결국 이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대성학원이 종로학원을 추월하게 만들었다.[6] 대신 문과는 사회탐구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세계사/세계지리 택1, 이과는 과학탐구에서 물화생지2 택1이었다.[7] 당시는 고등학교 3년 과정이 모두 수능에 포함되었을 뿐만아니라 문과도 사탐 전과목은 물론, 물리1, 화학1, 생물1, 지구과학1까지 필수로 수능을 봐야했던 시절이다. 시험 범위가 미칠듯 광범위했던 대신에 문제는 매우 쉬웠다. 수학의 경우에도 문제가 매우 평이했다. 이후 수능 과목이 대폭 축소되면서 변별력을 위해 난도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쉬운 문제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박승동이라 해도 강의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8] 대표적으로 양승진, 배성민 등이 있다.[9] 수강중이던 한 재수생에게 교과서를 예찬하며 '교과서는 서점에서 사면 비싸니까, KT북에 들어가면 싸게 살 수 있다' 라고 조언까지 했다고 한다.[10] 다른 강사들 중에서도 외국 교과서를 참조하는 강사들은 많다. 대표적인 예가 이기상. 그런데 박승동은 수업 준비를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교과서 자체에 관심이 많은 것도 동기에 포함되어 특이한 것이다.[11] 일례로 아래에서 에몽의 일화로 소개한 부분적분 쉽게하는 방법은 tabular technique(도표적분법)이라는 기술로 대학교 미분적분에서 나오는 스킬이다. 그 외의 스킬도 거의 대부분 외국에서 가르치는 스킬이라고 한다.[12] 학원가에서도 기벡 때문에 나형만 가르치는 나형 전문강사들도 제법 많다고 한다[13] 수학2 공간도형, 벡터가 어려워지는 7차 교육과정 초창기부터 박승동의 수학2를 따라갔다가 불폭탄 문제를 공략하지 못해 3등급을 맞았다는 인강 후기들도 제법 있었다. 특히 이과수학에서 1등급을 맞으면 언어, 외국어를 못해도 의약계열이나 다른 상위권 대학 좋은 과를 갈 수 있는 경우가 있지만 반대로 다른 거 다 잘해도 수학 하나 3등급 맞으면 대학, 과의 급이 달라지는게 이과인지라 좋은 대학을 가려면 아무리 망쳐도 수리 가형 2등급 중반은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박승동의 강의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재수종합반, 현장 단과가 아닌 인강생도 박승동의 강의를 듣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경우도 있으나 다른 상위권 이과생에 비해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재종반에서는 단과나 인강보다는 어려운 것도 많이 알려주는데 정작 아래에서는 그것때문에 수업을 안 듣기도 한다고 나오니 인강에서는 그런 것도 없으니.[14] 당시 서울대학교 합격선은 25점이었다.[15] #[16] "선생님, (중략) 선생님이 서울대 수학과의 레전드이자 전설이셨다면서요?"[17] 당시 박승동이 보여준 풀이법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학생이 답사지를 선택하는 상황으로 간주하여 A가 가나다라 4곳중 2곳을 선택하는 경우의 수 4C2=6을 먼저 구한 뒤, B가 A와 0~2곳을 겹치는 각각의 경우의 수를 구한다. A, B가 2곳이 겹치는 경우의 수 1가지로 C, D의 행선지 자동 결정 / A, B가 1곳이 겹치는 경우의 수 2가지 & B가 나머지 2곳중 1곳을 선택하는 경우의 수 2가지 & C가 1명만 들어간 장소 1곳을 선택하는 경우의 수 2가지 = 2×2×2 = 8가지로 D의 행선지 자동 결정 / A, B가 0곳이 겹치는 경우의 수 1가지 & C가 4곳중에 2곳을 선택하는 경우의 수 6가지 = 1×6 = 6가지로 D의 행선지 자동 결정된 것을 각각 더한 1+8+6 = 15를 맨 처음 구해놓은 A의 2곳 선택하는 경우의 수 6에 곱한 15×6 = 90 이 정답.[18] 2004년 당시의 EBS 강의는 2006년경까지도 볼 수 있었다.[19] 참고로 2004년과 2005년 당시 EBS 수능특강 수학1 문제는 전반적으로 어려운 편이었으며 특히 경우의 수 파트는 정말 지저분한 문제가 여럿 섞여있었다. 답안지의 해설을 봐도 매우 장황하게 늘어놔서 이해조차 안되는 문제였는데 박승동의 접근 방식으로 풀면 죄다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던 것. 박승동 본인이 아주 기발하게 잘 풀었다는 답을 달았는데, 웬만해선 딱딱한 문장으로만 답하는 평소 스타일을 고려하면 아마 뿌듯함을 느꼈던 듯.[20] 이 때는 1인이 도전/포기를 할 수 있었으며 1인 탈락시 남은 생존자들이 상금을 나눠 가지던 시기였다.[21] 그런데 대략 2006년까지만 해도 박승동 본인은 수학의 정석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눈치였다. 2005년에는 한 학생이 수학의 정석 실력편의 어느 문제를 질문했는데, "현재 수능의 출제 경향과는 맞지 않네요."라는 언급을 하기도. 2021년 Q&A에서는 호기심으로 물어본 학생에 수능 준비 여부를 떠나서 정석은 문제 사전같은 책이라고 언급했다.[22] 한편 학생이 듣고 배웠다는 복행렬이 사실 이행렬/쌍행렬(Bimatrix)의 중국어/일본어식 표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