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29 19:59:43

박우말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박우말례
朴又末禮
파일:박우말례.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박영자(朴永子)[1]
출생 1902년 3월 13일
전라남도 순천군 소안면 장내리
(현 전라남도 순천시 옥천동 72번지)
사망 1986년 12월 7일 (향년 84세)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660-1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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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오한길(吳漢吉)은 그녀의 남편이다.

2. 생애

박우말례는 1902년 3월 13일 전라남도 순천군 소안면 장내리(현 순천시 옥천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로 이주하였다.

1919년 3월 나주군 출신 김복현(金福鉉)이 경성부에서 광주로 내려와 김강(金剛)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10일 오후 3시 30분경 광주시장에서 숭일학교 학생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거사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때 그녀는 태극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거사 당일인 3월 10일 김복현 등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수백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숭일학교 학생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과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수피아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녀도 홍순남(洪順南)·최경애 등과 함께 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그녀는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86년 12월 7일 별세하였다.

201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녀의 유해는 2007년 10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1919년 4월 30일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