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19 19:59:48

베네딕트 비스코프

성인
베네딕트 비스코프
Benedict Biscop
파일:베넷.png
<colbgcolor=#050407><colcolor=#f6d03f> 본명 비스코프 바두싱[1]
(Biscop Baducing)
출생 628년경
데이라 왕국
사망 690년 1월 12일 (향년 61~62세)
노섬브리아 왕국 위어머스
종교 기독교
직업 성직자(수도자), 교사
재임 기간 제7대 성 어거스틴 수도원장[2]
669년~671년
초대 몽크위어머스 성 베드로 수도원장
674년~682년
성인명 베네딕토 비스코프[가톨릭]
베네딕트 비스코프[성공회]
[언어별 명칭]
라틴어: 베네딕투스 비스코프
(Benedictus Biscop)
영어: 베네딕트 비스코프
(Benedict Biscop)
프랑스어: 브누아 비스코프
(Benoît Biscop)
독일어: 베네딕트 비스코프
(Benedict Biscop)
스페인어: 베니토 비스코프
(Benito Biscop)
이탈리아어: 베네데토 비스코프
(Benedetto Biscop)
축일 1월 12일
수호 음악가, 화가, 학습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군인 시절2.2. 세 번의 로마 방문2.3. 수도원 건립과 두 번의 로마 방문2.4. 두 번째 수도원 건립2.5. 죽음과 시성
3. 여담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영국수도자, 교사, 수집가.

앵글로색슨 7왕국 시대에 활동한 베네딕토회 소속 수도자이며, 특히 당시 노섬브리아 왕국 내에선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원장이었다. 또한 영국 최초의 석조 기독교 건축물인 몽크위어머스재로우 수도원과 그 내부에 다양한 도서 및 사료들을 모은 대형 도서관을 설립했고, 미술과 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기독교의 교리, 역사, 성가 등을 사제들에게 교육함으로써 베다와 같은 유능한 인물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에서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1월 12일이다.

2. 생애

2.1. 출생과 군인 시절

비스코프는 628년 데이라 왕국의 강력한 귀족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앵글로색슨 7왕국 시대에 왕의 국정을 보조하고 국가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가신인 테인(thegn) 집안 출신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질 높은 교육을 받은 비스코프는 어렸을 때부터 당시 국왕 오스위그(Oswig)의 신하로 지내며 653년까지 왕실에서 성실히 근무를 했다. 그는 안정적이고 풍족한 생활을 향유했고, 여러 왕족 및 귀족들과 교류를 하며 신임을 얻었다.

2.2. 세 번의 로마 방문

653년경 당시 25살이던 비스코프는 기존의 일상을 그만두고 자신의 소유지들을 모두 왕에게 바친 뒤 친구 윌프리드(Wilfrid)와 함께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다. 이것이 영국 본토인 최초의 로마행 성지순례이자 비스코프의 첫 번째 로마 방문이었다. 그러나 여행길 도중 윌프리드가 당시 리옹대교구대주교인 앙몽(Ennemond)에 의해 발이 묶이게 되었다. 그렇게 비스코프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친구를 두고 여정을 이어 가 결국 홀로 로마에 당도했다. 종교적 열정이 넘치는 도시의 풍경에 매료된 그는 그곳에서 기독교 서적들을 구입하고 자국의 교회 발전에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을 기록한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12년 뒤인 665년경 비스코프는 로마에 두 번째 방문을 했다. 오스위그 왕의 아들 에알프리드(Ealhfrith)가 그와 동행하고 싶었으나 국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비스코프는 첫 번째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홀로 로마로 향했다. 여전히 쉽지 않은 여정이었으나 그는 우연찮게 자신의 친구 윌프리드를 만나게 되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윌프리드는 신앙심을 더욱 굳건하게 하는 좋은 말들을 함으로써 비스코프가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마침내 로마를 두 번째로 방문한 그는 첫 번째 로마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성당들과 수도원들을 탐구한 후, 눈길을 끄는 책들과 미술 작품들을 대량으로 구하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고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비스코프는 홀린 듯이 지중해에 있는 프로방스 근교 섬 레랭(Lérins)에 이르렀다. 자신이 이곳에 이유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이라 직감한 비스코프는 그곳의 수도원에서 665년부터 667년까지 약 2년 간 수련의 길을 걸어 베네딕트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레랭에서 2년을 보낸 뒤 비스코프는 로마에 세 번째 방문을 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로마에서 뭇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책들과 여러 물건들을 수집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비스코프의 깊은 신앙심과 완숙한 성품을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교황 비탈리아노가 그에게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도르와 함께 캔터베리로 돌아가기를 요청했다. 이에 비스코프는 테오도르와 귀국길에 올랐고, 비스코프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의 비범함을 알아본 테오도르는 그를 캔터베리에 소재한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 수도원(Monastery of SS. Peter and Paul)[5]수도원장으로 임명했다. 비스코프는 그곳에서 2년 동안 그곳에서 성실히 자신의 직분을 수행했다.

2.3. 수도원 건립과 두 번의 로마 방문

비스코프는 세 차례의 로마 여행을 통해서 얻은 로마 교회의 전통과 건물 구조에 대한 지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고국에 알맞는 수도원 모델을 탐구했다. 시의적절하게도 당시 노섬브리아 왕국의 국왕 에지프리드(Ecgfrith)는 수도원 건립을 위한 토지를 그에게 하사했다. 땅은 타인 위어의 위어머스(Wearmouth)[6]에 위치해 있었다. 이에 비스코프는 당시 수도원을 지을 수 있는 기술자가 노섬브리아 왕국에는 없었기 때문에 로마로 떠나 그곳에서 수많은 성당들과 수도원들을 지은 석공들을 데리고 왔다. 이것이 그의 네 번째 로마 방문이었다. 이후 674년 로마로부터 건너온 석공들이 국왕으로부터 할당받은 토지에 수도원을 완공했다. 수도원은 성 베드로 수도원(Monastery of St Peter)으로 명명되었으며 비스코프는 자연스레 초대 수도원장이 되었다.

비스코프는 한 번 더 로마로 떠나 그곳에서 지인에게 잠시 맡겨 둔 자신의 책들과 미술 작품들뿐만 아니라 성인의 유품들을 되돌려 받았다. 아울러 그는 건물을 장식해 줄 별도의 석공들 및 유리장이들과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가대 선창자를 고용하고 최종적으로 수도원을 공인하는 교황 아가토의 칙서를 받은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때는 679년이었고 이것이 비스코프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로마 방문이었다.

성 베드로 수도원에 도착한 비스코프는 드디어 자신이 오랫동안 바라 왔던 염원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열렬한 애서가이자 미술 애호가였던 그는 자신이 예전에 로마에서 구입한 다양한 책들과 미술 작품들, 그리고 성인들의 유품들을 바탕으로 도서관을 꾸미기 시작했다. 책들의 대부분은 라틴어코이네 그리스어로 된 기독교 관련 서적이었지만 고대 철학 서적과 세속적인 문학 작품들도 있었다. 그렇게 책장을 가득 메운 책의 수는 수백 권이나 달해 당시 왕국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서관이었고, 쉽게 구할 수 없는 희귀 도서들도 포함되어 유럽 각지의 학자들이 해당 도서관을 방문해 필사한 도서들은 유럽에서 가장 귀중한 소유물로 여겨졌다. 특히 베다가 이곳에서 자신의 저서들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비스코프의 관심사는 책과 미술에 이어 이제 음악으로 향했다. 예전부터 음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왔던 그는 수도자들에게 그레고리오 성가를 포함한 로마 교회의 전례에 사용되는 각종 성가들을 가르쳐 주고자 마지막으로 로마를 방문했을 때 고용했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요한과 함께 음악 교실을 열었다. 교실에는 성 베드로 수도원의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노섬브리아 왕국 내 다른 지역의 성당에서 온 성가대원들도 그의 수업을 들으러 자리를 잡곤 했다.

2.4. 두 번째 수도원 건립

682년 성 베드로 수도원이 왕국 내에 널리 알려지자 자신의 임무를 충분히 완수했다 생각해 수도원장직을 내려놓기로 결정한 비스코프는 자신의 사촌 에오스터윈(Eosterwine)을 자신의 후임자로 임명했다.

한편 에지프리드(Ecgfrith) 국왕은 수도원의 성공에 크게 기뻐했고, 비스코프에게 재로우(Jarrow)에 있는 토지를 하사하면서 두 번째 수도원 건립을 촉구했다. 이에 비스코프는 그곳에서 프랑크 왕국에서 온 석공들과 유리장이들과 함께 위어머스의 성 베드로 수도원의 자매 수도원 공사를 착수해서 685년에 완공했다. 수도원은 성 바울로 수도원(Monastery of St Paul)으로 명명되었고, 초대 수도원장으로는 체올프리드(Ceolfrith)를 임명했다. 체올프리드는 위어머스의 성 베드로 수도원 출신으로서 재로우의 새로운 수도원을 꾸려 나가기 위해 베다를 비롯한 동료 수도자 20명과 함께 위어머스를 떠난 인물이었다. 그렇게 두 개의 수도원을 세움으로써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비스코프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포함한 그가 예전에 방문했던 17개의 수도원에서의 관습을 바탕으로 공통된 규율을 만들었다.

비스코프는 위어머스의 성 베드로 수도원과 재로우의 성 바울로 수도원을 통해 영국의 교회 역사와 건축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는 영국에서 기독교 건축물을 짓는 데에 최초로 돌을 사용하는 것을 도입했고, 또한 기독교 건축물에 유리를 사용하는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이 모든 건 그간 다섯 번의 로마 방문을 통해 발상해 낸 것이었으며, 그렇게 그는 당시 구조가 각기 천차만별이었던 잉글랜드 수도원을 위한 기준이자 표본을 제시했다.

2.5. 죽음과 시성

두 번째 수도원인 성 바울로 수도원이 건립되고 1년이 지난 686년에 위어머스와 재로우 일대에서 전염병이 나돌았다. 이의 여파로 이듬해인 687년부터 비스코프는 병으로 몸져눕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통을 인내하면서 꾸준히 수도자로서의 직분을 수행했다. 그리고 3년 뒤 690년 1월 12일에 자신이 설립한 수도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스코프의 제자였던 베다에 따르면, 비스코프가 세상을 떠난 뒤 왕국 내에서는 그를 추앙하는 일종의 종교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그를 성인으로 널리 공경하기 시작했을 시기는 980년경 그의 유해와 유품이 케임브리지셔에 있는 소니 수도원(Thorney Abbey)으로 옮겨졌을 때부터였다.

3. 여담

  • 베네딕트 비스코프의 이름을 줄여서 성 베넷(Saint Benet)이라고도 부른다.
  • 685년 노섬브리아 왕국의 국왕 에지프리드(Ecgfrith)는 비스코프가 두 번째 수도원을 완공하자 그 보상으로 수도원이 위치한 위어 강(River Wear) 일대에서 떼어 낸 영토를 그에게 하사했는데, 그 영토를 '분리된 땅'이라는 의미를 지닌 선더드 랜드(Sundered land)라고 불렀고, 시간이 흘러 그 지역은 선덜랜드(Sunderland)라는 정식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4. 관련 문서



[1] 혹은 '바두칭'이라고도 발음한다.[2] 베네딕트 비스코프가 수도원장으로 역임할 당시에는 성 베드로와 바울로 수도원(Monastery of SS. Peter and Paul)이었다.[가톨릭] [성공회] [5] 598년에 설립된 곳으로 현재는 성 어거스틴 수도원(St Augustine's Abbey)으로 불린다.[6] 현재 선덜랜드의 몽크위어머스(Monkwearmouth)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