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버스의 얼굴마담[1]
1. 노선 정보
베이징 공교 시내버스 1번 | |||||
기점 | 베이징시 차오양구(쓰후이 환승센터) | 종점 | 베이징시 스징산구(라오산 차고지) | ||
종점행 | 첫차 | 05:00 | 기점행 | 첫차 | 05:00 |
막차 | 23:00 | 막차 | 23:00 | ||
배차간격 | 출퇴근 2~3분/평시 5분 | ||||
운수사명 | 베이징 공교 | 운행거리 | 24.8km | ||
노선 | 쓰후이 환승센터(쓰후이역) - 다왕루역 - 궈마오역 - 융안리루커우베이 - 베이징역 서부 - 둥단루커우베이 - 톈안먼동역 - 톈안먼시역 - 시단루커우동 - 푸싱먼역 - 난리스루역 - 무시디시 - 쥔스보우관역 - 궁주펀역 - 우커쑹차오둥 - 위취안루시커우 - 바바오산역 - 라오산 - 라오산 차고지 |
베이징 공교 시내버스 심야1번 | |||||
기점 | 베이징시 차오양구(쓰후이 환승센터) | 종점 | 베이징시 스징산구(라오산 차고지) | ||
종점행 | 첫차 | 23:20 | 기점행 | 첫차 | 23:20 |
막차 | 04:50 | 막차 | 04:50 | ||
운행횟수 | 일 12회 | 배차간격 | 20~40분 | ||
운수사명 | 베이징 공교 | 운행거리 | 24.8km | ||
노선 | 주간 노선과 동일. |
2. 개요
베이징시 차오양구부터 스징산구까지 24.8km를 운행하는 노선.베이징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시내버스 노선이자 중국 최초의 유료 시내버스 노선이다.[2]
3. 역사
-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고 중일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전시상태로 돌입하여 폐선. 당월 30일에는 베이핑과 톈진이 일본군에 넘어갔고, 8월에 중국군이 베이핑을 되찾기 위해 총력전을 벌였으나 또 졌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전쟁 내내 베이핑을 되찾지 못했다.
- 8년간 지속된 기나긴 중일전쟁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끝나고[4] 5개월 뒤, 1946년 2월 1일 다시 개통하면서 첸먼-동안스창[5]-자오다오커우로 구간이 완전히 바뀌었고, 길이도 5.78km로 줄었다. 이때는 제 2차 국공내전이 진행중이었지만[6] 국민당이 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운행중이었다.[7]
- 하지만... 1948년 8월 20일 제 2차 국공내전에서 전세가 뒤집혀 국민당이 밀리기 시작하는 바람에 두번째로 폐선.[8] 그리고 나서 겨우 1년 뒤에 국민당이 국공내전에서 지면서 타이완으로 도망침과 동시에 본토에서는 중화민국의 시대가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 1950년, 중국 정부에서 쳰먼-자오다오커우 구간으로 1번을 부활시켰다. 노선 길이는 폐선 직전과 동일한 5.78km. 이때 중국은 군대를 한국의 전쟁터로 파병보낸 사이 남은 병력으로 티베트 [9]를 침공했다. 티베트의 국력이 너무 약했기에 가능했던 것.
- 1951년 4월 7일, 수요 부족으로 인해 구 옛 베이징 버스 6[10]과 통합되면서 첸먼 - 주스커우 - 광안먼으로 노선이 변경되었다. 노선 길이는 11.96km. 이 시기에 인민해방군은 6.25 전쟁을 거의 처음 상태로 리셋시켰다.[11]
- 1952년, 노선 길이가 11.7km로 변경됐다.
- 1958년 12월 2일, 샹동-둥즈먼으로 노선이 변경되며 길이도 13.13km로 늘었다. 이때 중국 전역에서는 모주석이 해로운 새라고 교시한 참새를 때려잡고있었다.
- 1959년 3월 10일, 광안먼 - 안딩먼으로 노선이 변경되었다. 노선 길이는 11.7km. 이 해에는 참새 때려잡은 업보덕에 전국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12]
- 1959년 5월 29일, 겨우 49일만의 노선 개정으로 인해 자오다오커우 - 안딩먼으로 노선 변경. 노선 길이는 6.68km로 거의 반토막났다. 5달 뒤에는 모주석과 흐루쇼프가 카드 게임을 하며 합작사업을 모조리 파기해 지하철 계획이 줄줄이 연기되었다.
- 1960년 9월 28일, 수요 부족으로 인해 세 번째로 폐선. 이때쯤에는 자연재해와 기근이 동시에 터지면서 대약진운동이 제대로 망해가고있었다.
- 1961년 7월 5일, 궁주펀 - 중산궁위안 - 둥단 - 바왕펀 간 14.82km의 노선으로 또 부활했다. 또한, 이때부터 1인당 1자오[13]의 표값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도 중국은 전해부터 지속된 기근과 자연재해로 막장이었다.
- 1961년 8월 16일, 둥단역이 둥단역과 왕푸징역으로 분리되었다.[14] 이 시기에 대약진운동이 대략 4천만의 사망자를 남긴 채 끝났다.
- 1970년 노선 길이가 14.28km로 변경되었다.
뭐든 다 때려부술 시기에 살아남았단게 기적[15]
- 1971년 1월 28일, 베이징역-공후이다러우[16]간 15.78km 구간으로 노선이 변경.
- 1972년 11월, 수요 상승을 위해 노선이 일부 변경되며 길이도 16.13km로 늘었다.
- 1973년 4월 15일, 1970년 시절 노선으로 조정되었다.
- 1982년 10월, 궁주펀 심환도가 생기면서 노선 길이가 14.6km로 변경.
- 1989년 천안문 6.4 항쟁 당시 계엄령 선포로 인해 일시 운행 중단.
- 1995년 6월, 베이징 인민대표의 건의가 받아들여지며 궁주펀-류다오베이리 간 18.8km 구간을 포함하여 마관잉, 바왕펀까지 잇는 노선으로 변경되었다.
- 2009년 4월 26일, 4번과 통합되며 펑타이구를 경유하게 되었다.
- 2012년 10월 20일 쓰후이 환승센터가 개업하며 1번 포함 총 28개 노선이 이곳으로 옮겨갔다.
- 2014년 12월 28일, 운임 체계가 변경되었다.[20]
- 2016년 5월 23일, 용딩루커우동역(상행), 샤거우루커우시역(하행), 동추이루커우역, 완쇼우루커우시역이 증설되었다.
4. 특징
- 쓰후이 환승센터부터 바바오산역까지 선형이 정확히 직선이고, 베이징 지하철 1호선과 겹친다.
- 현재도 버스 안내양이 존재한다.[22]
- 2017년부터 들여온 광통사의 전기 굴절버스는 타 굴절버스,[23] 친환경버스[24]와 다르게 도색이 빨간색[25]이고, 중국 시내버스 최초로 차내에 공기청정기를 달았다.
그걸 이제서야 달다니
===# 시간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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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버스 1번 첫•막차 시간표 2019년 1월 3일 기준 | |||||||||
출발 시간 | 쓰후이 환승센터발 | 라오산 차고지발 | |||||||
첫차 | 05:00 | 05:00 | |||||||
배차간격 평시 5분, 출퇴근 2-3분 | |||||||||
막차 | 23:00 | 23:00 |
베이징 버스 심야1번 시간표 2023. 10. 1. 확인 출처 | |||||||||
회차 | 출발시각[26] | ||||||||
1 | 23:20 | ||||||||
2 | 23:40 | ||||||||
3 | 00:00 | ||||||||
4 | 00:35 | ||||||||
5 | 01:10 | ||||||||
6 | 01:45 | ||||||||
7 | 02:20 | ||||||||
8 | 02:55 | ||||||||
9 | 03:30 | ||||||||
10 | 04:10 | ||||||||
11 | 04:30 | ||||||||
12 | 04:50 |
베이징 심야버스 대부분은 이 시간표대로 운행한다.
5. 연계 철도역
- 베이징 지하철 1호선: 쓰후이역[27], 다왕루역[A], 궈마오역[B], 융안리역[30], 젠궈먼역[C], 둥단역[D], 왕푸징역[E], 톈안먼둥역[34], 톈안먼시역[35], 시단역[F], 푸싱먼역[G], 난리스루역[38], 무시디역[39], 쥔스보우관역[H], 궁주펀역[I], 완서우루역[42], 우커쑹역[43], 위취안루역[44], 바바오산역
- 베이징 지하철 2호선: 젠궈먼역[C], 푸싱먼역[G]
- 베이징 지하철 4호선: 시단역[F]
- 베이징 지하철 5호선: 둥단역[D]
- 베이징 지하철 8호선: 왕푸징역[E]
- 베이징 지하철 9호선: 쥔스보우관역[H]
- 베이징 지하철 10호선: 궈마오역(베이징)[B], 궁주펀역[I]
- 베이징 지하철 14호선: 다왕루역[A]
[1] 이 버스는 한국 언론에서도 소개되었다.[2] 가장 오래된 노선은 1935년 8월 22일에 개통한 베이징 버스 5.[] [4] 당장 중일전쟁 도중에 미국을 건들어 전선을 무리하게 확대한 것이 일본군의 패전 요인이었다.[5] 동안시장. 재래시장할때 그 시장 맞다.[6] 국공합작은 중일전쟁 끝나자 마자 파기되었다.[7] 이때 한국은 미군정/소련군정 시기였다.[8] 국민당의 부정부패가 매우 심각해서 새로 점령한곳에서까지 비리를 저지르는 바람에 중국인들이 국민당이 아닌 공산당 편을 들면서 전세가 뒤집어졌다. 한마디로 자업자득.[9] 중국에서는 시짱(西藏)이라고 부른다.[10] 현재 6번하고는 크게 다른 노선이다.[11] 1951년 1월에 유엔군이 혹한기를 겪으며 주춤하는 사이 한국군이 점령한 북한 땅을 모조리 되찾고 서울까지 다시 가져갔다가 3월에 보급 문제로 38도선으로 후퇴했다가 4월에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한달 내내 총공격을 했지만 실패.[12] 베이징도 예로부터 동으로는 관료들, 서로는 갑부들이 살았다고 하나 기근에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배급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13] 0.1위안. 이때만해도 1자오(1마오)는 물론 1펀도 전혀 똥값이 아니었다. 이때는 시골에서는 1위안이 큰돈 취급받았던 시절이다.베이징은 갑부동네라 돈이 넘치니 1자오가 똥값이었나보다[14] 지하철 둥단역과 왕푸징역보다 무려 37년 빨랐다.[15] 문혁 초기에 반달리즘이 극성이었다.[16] 당시 1호선이었던 첸먼역, 쉬안우먼역 경유. 이 역들은 나중에 베이징 지하철 2호선으로 바뀐다.[17] 현 젠궈로[18] 현재도 1번은 랑자위안역을 경유한다.[19] 이때부터 펑타이구 경유가 아니라 스징산구 경유로 바뀌었다.[20] 1위안 기본요금제였던 요금제가 기본 10km 2위안, 기본요금 거리 이후 5km당 1위안으로 변경. 모든 노선이 해당된다.[21] 당초 계획대로면 한번에 전기 굴절버스로 전 차량 교체해야 했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단가탓인지 무산되었고, 차량을 순차적으로 도입 후 기존 차량을 5번 등 다른 노선에 이적시키고 있긴 하나, 이 역시 중국의 경기 침체로 진척이 느렸다. 참고로 같은 전기 굴절버스인 현대 일렉시티 굴절버스의 가격이 대당 9억원이다. 광통사의 버스에 계기판 재탕 등 여러가지 원가 절감을 하긴 했으나 이 역시 가격이 5억 이상으로 추정된다.[22] 대부분의 굴절버스 운용 고수요 노선은 안내양이 존재한다.[23] 굴절버스는 굴절버스 전용 어두운 노란색+회색+파란색 도색을 한다.[24] 전용 도색은 하늘색+회색+흰색+형광색이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버스도 같은 도색이지만, EV로고에 PLUG-IN 표식이 있다.[25] 일반 버스는 이것보다 조금 더 어두운 빨간색 도색을 한다.[26] 쓰후이발/라오산발 모두 같은 시각에 출발한다.[27] 쓰후이 환승센터에서 하차[A] 바왕펀동 또는 바완펀서 하차[B] 다베이야우동 또는 다베이야오시에서 하차[30] 융안리사거리에서 하차[C] 르탄로에서 하차[D] 둥단사거리동에서 하차[E] 왕푸징에서 하차[34] 천안문동에서 하차[35] 천안문서에서 하차[F] 시단사거리서에서 하차[G] 푸싱먼내에서 하차[38] 난리스로에서 하차[39] 무시디동에서 하타[H] 군사박물관에서 하차[I] 궁주펀에서 하차[42] 완서우사거리서에서 하차[43] 우커쑹교동에서 하차[44] 위취안사거리서에서 하차[C] [G] [F] [D] [E] [H] [B] [I]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