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05:22:06

베이커 소총

Baker Infantry Rifle
Pattern 1800 Infantry Rifle
파일:FCE3348E-6EAF-4CE5-A956-CCC6F8C34761_1_105_c.jpg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종류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플린트락 소총
원산지 [[틀:깃발|
파일:기.svg
기 명칭
영국
]][[틀:깃발|
파일: 깃발.svg
깃발 명칭
영국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파일:영국 국기.svg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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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
<colbgcolor=#c7c7c7,#353535><colcolor=#000,#fff> 역사 <colbgcolor=#ffffff,#121212><colcolor=#000,#fff>1801년~1837년[1]
개발 에제키엘 베이커
개발년도 1798년~1800년
생산년도 1800년~1838년
생산수 22,000정
사용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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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된 전쟁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미영전쟁
브라질 독립 전쟁
텍사스 혁명
기종
파생형 Cavalry carbine
세부사항
탄약 .615 (15.6 mm) 납탄[2]
급탄 단발
전장식
작동방식 플린트락
총열길이 762mm (30.375인치)
전장 1162mm (45.75인치)
중량 4.08kg (9파운드) }}}}}}}}}
1. 개요2. 개발3. 운용4.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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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폴레옹 전쟁 시기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채택하여 쓰던 플린트락 소총. 1800년 화이트 채플의 에제키엘 베이커라는 총기 장인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이래 1830년대까지 영국군의 라이플로 활약했다. 주로 라이플 연대에서 채택해서 썼다. 정확히는 1801년부터 1838년까지 쓰였다.

2. 개발

1774년 퍼거슨 소총이 개발되어 일부 경보병 부대에서 활용되기 시작했으나 미국 독립 전쟁에서 미국 민병들의 켄터키 라이플 저격에 호되게 당한 영국군[3]은 본격적으로 라이플 도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1800년 1월에 쿠트 매닝햄 대령이 1개 연대의 전열보병을 맡아 시범적으로 라이플 군단을 구성하게 된다.[4]

이렇게 구성된 라이플 부대는 런던 근교의 울리치에서 온갖 종류의 라이플들을 시범적으로 운용했다. 당시 라이플을 대규모로 운용한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군 수뇌부는 최적의 라이플을 찾느라 꽤나 고생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쓰이던 라이플까지 가져다 써보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채택된 라이플이 에제키엘 베이커가 설계한 이 베이커 라이플(Baker rifle)이었다. 기존의 라이플들은 일반 머스킷에 강선만 판 조악한 물건이었기에 불필요하게 총열이 길고 무거웠으나 에제키엘 베이커의 라이플은 상대적으로 총열이 짧은 것에 비해 명중률이 우수했다.

사실 에제키엘 베이커가 처음 제시한 두 개의 시제품은 기존의 물건처럼 일반 머스킷과 동일한 크기에 동일한 탄약을 쓰도록 되어 있었다. 탄약이 부족할 경우에는 얼마든지 인근 전열보병 부대에서 빌려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제95라이플 연대가 발족할 무렵 이 시제품을 받아본 쿠트 매닝햄 대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각시켰는데 상기한대로 불필요하게 길고 무겁다는 것이 이유였다. 베이커는 그의 요구에 따라 총열의 길이를 줄여 라이플을 경량화시켰다. 그렇게 채택된 것이 베이커 라이플이다.

쿠트 매닝햄 대령이 경량화에 집착한 것은 라이플을 운용하는 부대가 전면교전이 아닌 척후를 맡을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독립 전쟁으로부터 미국 라이플 척후병들의 위력을 톡톡히 배운 영국군은 운용교리도 그대로 답습했다. 전면 교전이 아니라 척후병으로서 비정규전을 치르며 경보병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느릿느릿한 일반적인 전열 보병보다 빠르게 많이 움직여야 했다. 라이플이 일반 머스킷만큼 무겁고 길어버리면 척후병들의 기동성을 지나치게 낮추게 될 것이었다. 미국 민병들이야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만큼 최적의 동선을 짜서 체력 부담을 줄일 수 있었지만 본토 침공의 가능성이 거의 없어 필히 원정군일 영국군 라이플 연대는 그러한 점을 기대할 수 없어 말 그대로 정찰부터 정보수집까지 모든 역할을 수행해야 했으므로 무장의 경량화는 필수였다. 오늘날에도 특수부대가 경량화한 화기를 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총구의 직경은 15.9mm였으며 라이플의 무게는 4.08kg정도로 당대의 머스킷보다는 1kg정도 가벼웠다. 전체 길이는 116.2cm로 역시 당대 머스킷보다 50cm정도는 짧았으며 순수 총열 길이는 76.2cm에 불과했다. 이것이 표준형의 규격이며 생산된 곳에 따라 세밀한 차이는 있었다. 다만 이건 당대 어느 나라의 무기든 똑같았다.

파일:watac_0024.jpg
이렇게 머스킷보다 짧은 길이 때문에 검기병 돌격에 취약한 점이 있었는데 그를 보완하기 위해 라이플 보병들에게는 24인치(약 60cm)짜리 초대형 총검이 지급되었다. 위 사진의 총검이 바로 24인치 총검이다.[5] 무슨 중세 아밍소드도 아니고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갖고 다니기가 지나치게 거추장스러웠던지 이를 개선해보고자 온갖 잡다한 경량화 시도가 있었지만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고 구관이 명관이더라는 결론만 나왔다고 한다. 결국 24인치 초대형 총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3. 운용

가장 유명한 사례는 역시 '그린 재킷'으로 유명한 19세기의 특수부대 제95보병연대, 즉 제95라이플 연대일 것이다. 아서 웰즐리 휘하였던 이 라이플로 무장한 95연대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 내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여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는 토머스 플렁켓이라는 병사가 550m 혹은 최대 730m[6]에 달하는 거리에서 이 라이플로 프랑스의 오귀스트 마리 프랑수아 콜베르 샤바네 장군을 저격하고 연이어 그의 부관도 저격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당연히 조준경 따위는 없었다.[7] 플렁켓의 실력이 대단하기도 하지만 이 라이플의 명중률이 뒷받침되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1837년 브런스윅 라이플에 대체되었다. 하지만 생산 자체는 1841년까지도 계속되었다.

4. 매체에서의 등장

  • 나폴레옹: 토탈 워 - 영국군 라이플 연대의 화기로 등장한다. 라이플 보병들의 우월한 재장전 속도야 병사들의 능력으로 보지만 80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명중률에는 분명 베이커 라이플의 영향이 있다. 덕분에 영국의 라이플 연대는 최강의 척후병으로서 최고의 명중률을 자랑하지만 6부대로 생산 제한이 걸린다.
  • 샤프 시리즈 - 제95라이플 연대가 중심이므로 당연히도 그 병사들의 손에 들려 자주 등장한다.
  • 유럽전쟁 4 - 보병 장비로 등장한다. 아이템은 최대 두 가지를 장비할 수 있다. 장비하면 해당 장군에게 보병 공격력 +4를 달아주는데, 문제는 퍼거슨 라이플의 공격력이 +6이라서 콩라인이다. 무과금 유저라면 이 정도에도 감지덕지.


[1] 영국 육군 기준.[2] 후술하겠지만 이 총기에 쓰이는 탄환은 현대의 탄두와 탄피가 일체화된 탄환이 아닌 탄두와 화약이 분리된 플린트락 방식이다.[3] 보통 전열보병간 교전에서 장교는 표적이 되지 않았으나 미국 민병들은 압도적인 수와 화력으로 무장한 영국군을 상대로 켄터키 라이플을 주로 이용한 장기전형 유격전을 펼치며 뛰어난 사격술로 장교들을 노려서 저격하곤 했다.[4] 명칭은 Rifle Corps로 여러 사단을 거느린 군단 같지만 실상 1개 연대 규모였다. 이 당시에는 사단조차 최신 개념이라 프랑스 정도를 빼면 군 편제로서의 군단이 등장하지 않았을 시점이다.[5] 23.5인치짜리 총검을 썼다는 말도 있는데 이 당시가 다 그렇듯 정확한 규격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시절이라 세밀한 크기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6] 정확한 거리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문 위키피디아의 경우 베이커 라이플 항목에는 550m, 제95라이플 연대 항목에는 730m라고 적혀있다. 어찌됐든 당시 라이플 사수에게 기대되는 사격 거리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쏜 것은 분명하다.[7] 어찌나 멀리서 쐈는지 콜베르 샤바네 장군은 스스로 저격의 위험에 처한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장군이 쓰러지고 나서야 부관이 달려온 것을 볼 때 부관조차 그 거리에서 저격의 위험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