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9 15:32:48

벨리보르 바소비치

유고슬라비아의 前 축구선수
파일:벨리보르 바소비치.jpg
<colbgcolor=#eee,#191919> 이름 벨리보르 바소비치
Велибор Васовић / Velibor Vasović
출생 1939년 10월 3일
유고슬라비아 왕국 포자레바츠
사망 2002년 3월 4일 (향년 62세)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베오그라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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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체 180cm
직업 축구선수(수비수[2] / 은퇴)
축구 감독
경력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FK 파르티잔 (1958~1963)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1963)
FK 파르티잔 (1964~1966)
AFC 아약스 (1966~1971)
감독 FK 파르티잔 (1971~1973)
FK 프롤레테르 즈레냐닌 (1975)
앙제 SCO (1975~76)
파리 생제르맹 FC (1976~1977)
파리 생제르맹 FC (1978~1979)
자말렉 SC (1982~1983)
에트니코스 피라에우스 FC (1983)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1986~1988)
AC 벨린초나 (1989)
국가대표 32경기 2골 (유고슬라비아 / 1961~1966)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클럽 경력2.3. 국가대표 경력2.4. 감독 경력2.5. 은퇴 후 활동2.6. 사망
3. 플레이 스타일4. 수상
4.1. 선수
5. 감독

1. 개요

유고슬라비아축구선수 출신 감독.

AFC 아약스 최초의 외국인 주장이다. FK 파르티잔AFC 아약스 두 구단에서 전설적인 선수로 평가받고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포자레바츠(Požarevac)에서 몬테네그로 출신 부부였던 세무사무소 직원 지보진 바소비치(Živojin Vasović)와 주부 옐레나 "옐카" 라우셰비치(Jelena "Jelka" Laušević)의 9번째 자녀로 1939년 10월 3일에 태어났다. 그에게는 4명의 형과 3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그의 누이 중 하나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바소비치가 태어난지 얼마 안 돼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1941년 4월 나치 독일의 침공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분열로 바소비치의 아버지 지보진은 독일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4년 동안 포로 생활을 보냈고 그의 형제들은 파르티잔 저항 운동에 합류했다. 포자레바츠에서 초등 교육을 마친 바소비치는 그의 가족을 따라 베오그라드로 이사갔다. 1953년에 바소비치의 아버지 지보진이 으로 사망한 후, 그의 외삼촌 다비드 라우셰비치가 가족을 돌보게 되었다. 이 때 국가안보국(UDB)의 고위직에 오른 외삼촌은 바소비치에게 축구를 소개해주었다. 베오그라드에서 바소비치는 제1 베오그라드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중등 교육을 시작했고, 동시에 1954년, 15세의 나이에 작은 지역 팀인 FK 노비 베오그라드에서 축구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2.2. 클럽 경력

1955년, 바소비치의 축구 재능을 알아본 FK 파르티잔의 유스 코치 플로리얀 마테칼로(Florijan Matekalo)가 그를 스카우트하여 파르티잔의 유스 시스템으로 영입했다. 바소비치는 파르티잔 유스팀에서 파흐루딘 유수피와 블라디차 코바체비치 등의 유망주들과 함께 성장했으며, 쌍둥이 형제인 스르잔과 즈베즈단 체비나츠, 그리고 브란코 페요비치도 당시 유스팀의 일원이었다. 1958년 6월, 18세의 바소비치는 1군으로 승격되어 정식 데뷔를 하게 되었다. 소위 "마테칼로의 아기들"이라 불리던 재능 있는 세대의 일원으로서, 바소비치는 파르티잔 1군에 데뷔하여 수비수로서의 능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첫 시즌에는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기 위해 노력했으며, 리베로 포지션에서 안정적인 플레이로 감독의 신뢰를 얻어갔다.

1960-61 시즌, 바소비치는 파르티잔의 핵심 수비수로 자리매김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뛰어난 수비력과 함께 공격 참여도 활발히 하며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이 시즌 우승은 바소비치에게 첫 번째 주요 트로피였으며, 그의 선수 경력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후 바소비치는 1961-62, 1962-63 시즌에도 파르티잔의 핵심 수비수로 활약하며 팀의 리그 3연속 우승에 기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에도 발탁되어 1961년에 데뷔했다. 국제 무대에서도 그의 뛰어난 능력은 빛을 발했으며, 특히 1962년 11월 4일에는 벨기에를 상대로 한 UEFA 유로 1964 예선에서 국가대표 첫 골을 기록했다.

1963년 여름, 파르티잔에서의 계약이 만료되는 시점에 바소비치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팀 동료인 파흐루딘 유수피와 함께 그는 파르티잔의 핵심 멤버였고 국가대표 선수였다. 하지만 파르티잔 구단은 바소비치의 외삼촌 다비드 라우셰비치가 파르티잔 이사회 멤버였기 때문에, 유수피에게만 많은 돈을 제안하고 바소비치는 가족 연줄로 인해 적은 돈으로도 잔류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이에 분노한 바소비치는 라이벌 구단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기술 감독 아카 오브라도비치를 찾아가 이적 의사를 전했다.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비상 자금을 동원해 바소비치에게 당시 기준으로 메르세데스-벤츠 차량 두 대를 살 수 있는 500만 유고슬라비아 디나르를 지불했다. 이 충격적인 이적 소식에 파르티잔 측은 경악했다. 클럽 회장이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장군이었던 일리야 라다코비치는 즉시 츠르베나 즈베즈다가 제안한 금액의 두 배를 제시했지만 이미 계약은 성사된 후였다. 바소비치는 끊임없는 전화와 편지, 조직된 팬 시위, 심지어 한 JNA 장교로부터 경기 중 저격 위협까지 받았다. 1986년에 인터뷰에서 이 당시의 일화를 회상하길,
나와 유수피 둘의 계약은 1963년 여름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당시, 우리는 둘 다 FK 파르티잔의 핵심 멤버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국가대표 선수이기도 했다. 내 삼촌 다비드 라우셰비치는 FK 파르티잔 이사회 멤버였기 때문에 클럽의 수뇌들은 '유수피에게 많은 돈을 듬뿍 쥐어 줘서 그가 떠나지 못하도록 막아야겠다. 반면, 바소비치는 그의 삼촌인 다비드 라우셰비치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니 돈을 조금만 줘도 바소비치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물론, 나는 그럴 의사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즉시 도시 건너편에 있는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기술 감독인 아카 오브라도비치(Aca Obradović)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그에게 직접적으로 '오브라도비치 감독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가 자금만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면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이적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금을 긁어모아 내게 돈을 지불했다. 이 사실을 FK 파르티잔 사람들이 알게 되자마자, 그들은 기겁을 했다. FK 파르티잔 회장이자 JNA 장군인 일리야 라다코비치(Ilija Radaković)는 곧바로 FK 츠르베나 즈베즈다가 내게 제의한 금액의 두 배를 주도록 승인했다. 내 전화는 끊임없이 울려댔고, 그들은 편지를 보내고, 팬들을 동원한 시위를 조직했다. 또한, 나는 살인위협도 받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시합하는 동안 나를 저격용 소총으로 암살하겠다는 JNA 장교 1명이 날 위협하는 편지를 난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정식 편지와 같았는데, 심지어 그는 자신의 이름, 집 주소, 전화번호까지 모두 적어 놓았다.
파일:Велибор Васовић.png
파르티잔의 주장

1963년 9월 1일, 바소비치는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새 경기장 마라카나의 개장식이 된 첫 경기에서 NK 리예카를 상대로 데뷔했다.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2-1로 승리했고, 바소비치는 밀란 초프와 보이칸 멜리치와 함께 중앙 수비진을 형성했다. 팀은 겨울 휴식기 전까지 리그에서 5점 차로 선두를 달렸다.

그러나 겨울 휴식기 동안 파르티잔의 회장 라다코비치가 더 많은 돈을 제안하며 바소비치를 설득했고, 바소비치는 파르티잔으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계약 중이었던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이적을 허락하지 않았고, 바소비치는 심지어 파르티잔과 함께 훈련을 시작하는 등 일방적인 행동을 취했다.

법적 혼란 속에서 바소비치는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라인업에서 빠졌지만 여전히 급여는 받고 있었다. 몇 달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한 바소비치는 결국 파르티잔의 부회장 체다 좀바의 지시로 유고슬라비아의 최고 정치 권력자였던 알렉산다르 란코비치 연방 내무장관과의 면담을 시도했다. 그는 친구이자 팀 동료인 즈베즈단 체비나츠의 도움으로 란코비치와 45분간 면담을 가졌고, 몇 달 후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기술 감독 오브라도비치는 바소비치의 파르티잔 복귀를 허락했다. 대신 보상으로 파르티잔의 회장 라다코비치는 즈베즈단 체비나츠의 츠르베나 즈베즈다 이적을 허용했다.

이렇게 바소비치는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단 한 시즌[3]만 뛰고 1964년에 파르티잔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츠르베나 즈베즈다 이적과 복귀는 유고슬라비아 축구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이적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바소비치의 파르티잔 복귀는 순탄치 않았다. 많은 파르티잔 선수들은 그의 행동을 일종의 협박으로 보았고, 구단이 특정 선수를 위해 과도하게 양보한 것에 불만을 표했다. 더욱이 그의 복귀는 클럽 이사회 내부의 갈등, 특히 라다코비치 회장과 미르코 네네지치 사무총장 사이의 분쟁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분쟁은 라다코비치 회장이 네네지치 사무총장의 재정 관리 권한을 박탈하는 내부 결정에서 비롯되었다.

1964-65 시즌이 알렉산다르 아타나츠코비치 신임 감독 아래 시작되었을 때, 파르티잔은 리그 선두를 달렸지만 이사회의 갈등이 점차 선수단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4년 12월, 겨울 휴식기 전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팀 내에 두 개의 대립 진영이 명확히 형성되었다. 바소비치는 라다코비치 회장을 지지하는 그룹의 리더가 되었고, 블라디차 코바체비치, 조란 밀라디노비치와 몇몇 유스 선수들이 이 그룹에 합류했다. 반면 유수피는 네네지치를 지지하는 반대 진영을 이끌었고, 밀란 갈리치, 라도슬라프 베체야츠, 요아킴 비슬라브스키, 그리고 아타나츠코비치 감독도 이 진영에 속했다. 미루틴 쇼스키치, 이반 추르코비치, 요시프 피르마예르, 브란코 라쇼비치는 중립을 지켰다.

반대 진영은 심지어 바르다르 스코페와의 시즌 전반기 마지막 경기에 출전을 거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팀의 절반과 감독이 빠진 상황에서 라다코비치 회장은 마일 코스에게 임시로 감독직을 맡겼고, 코스는 가까스로 11명의 선수를 모아 경기에 임했다. 파르티잔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겨내어 겨울 휴식기에 들어갈 때까지 리그 선두를 유지했다. 스코페 사태 다음 날, 아타나츠코비치 감독은 해임되었고, 두 파벌은 1965년 1월 베오그라드 대학교 법학부에서 열린 클럽 총회에서 최종 대결을 준비했다.

총회에서 두 선수 그룹은 화해에 도달했지만, 이 사건은 유고슬라비아 최고 권력층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원수에게 직접 보고하는 이반 고슈냐크 장군이 파르티잔 경영진 내 JNA 장군들의 문제를 알게 되었고, 티토가 이 소식을 접하자 신속하게 조치했다. 그는 클럽 이사회에 관여한 모든 장교들을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하도록 명령했다. 라다코비치 장군은 슬로베니아로, 라도이차 네네지치 장군은 스코페로 재배치되었다. 민간인인 블라디미르 두이치가 새 클럽 회장이 되었고, 감독직은 마르코 발록에게 맡겨졌다.

수개월 후, 파르티잔은 AC 밀란과 친선경기를 치렀는데, 이 경기는 바소비치가 밀란의 페루 국적 수비수 빅토르 베니테스와 격렬한 몸싸움을 벌여 악명을 떨쳤다. 이 싸움은 양 팀 벤치까지 휘말리는 대규모 난투극으로 번졌다. 비록 불쾌한 사건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최근까지 분열되었던 파르티잔 선수단의 단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팀 내 갈등이 해소된 후, 파르티잔은 1964-65 시즌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에서 또다시 우승을 차지하며 바소비치에게 통산 네 번째 리그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이어서 바소비치는 FK 파르티잔을 이끌며 유러피언컵에서 큰 활약을 펼쳤고, 팀을 결승까지 올려놨다. 특히 준결승에서 바소비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인상적인 수비력을 보여주며 2-0, 0-1의 전후반전 스코어로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

결승전에서 만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바소비치는 전반 10분 만에 선제골을 넣으며 파르티잔에 희망을 안겼다. 그러나 아마시오와 세레나의 골로 레알 마드리드는 경기를 뒤집었고, 파르티잔은 1-2로 패하여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바소비치는 이로써 유고슬라비아 클럽으로는 최초로 유러피언컵 결승에 오른 파르티잔의 주장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결승전 직후, 파르티잔의 주전 절반이 팀을 떠났고, 바소비치 또한 새로운 도전을 찾고자 했다. 처음에는 분데스리가1860 뮌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로 이적을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득점까지 터뜨릴 정도였던 바소비치의 공격 본능과 수비진의 리더다운 모습을 고평가했던 리누스 미헬스가 바소비치에게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냈다. 미헬스는 바소비치를 아약스를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로 낙점했고, 결국 바소비치는 AFC 아약스로 이적하여 네덜란드 축구의 새 챕터를 열게 되었다.
파일:크라위프, 바소비치, 케이저르.jpg
요한 크루이프, 벨리보르 바소비치, 피트 케이저르

피트 케이저르스야크 스바르트와 함께 아약스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바소비치는 뛰어난 리더십과 수비지휘능력 그리고 패싱력과 수비력을 겸한 토탈 풋볼리베로로서 놀라운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시즌 동안 바소비치는 아약스에서 총 145경기에 출전해 13골을 기록하며 팀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바소비치가 아약스에 합류했을 당시, 1966년까지만 하더라도 아약스는 유럽 정상을 노릴 만한 팀은 아니었다. 스바르트와 케이저르, 슈퍼루키 크루이프 등이 포진한 공격진은 분명 막강한 화력이었지만 수비진은 유럽 무대에서 통할만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평가였다. 그러나 바소비치의 영입과 함께 아약스의 수비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했다.

특히 어린 선수들이 많았던 아약스에서 바소비치는 자신의 위닝 멘탈리티를 주입했으며, 토탈 풋볼의 기둥 중 한 명으로서 요한 크루이프의 훌륭한 멘토가 되었다.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구축하던 토탈 풋볼 시스템에서 바소비치는 높은 위치에서의 압박 수비와 빠른 공수 전환의 핵심이었다. 그의 경험과 지능적인 포지셔닝은 아약스가 공격적인 오프사이드 트랩을 구사할 수 있게 했으며, 이는 후에 네덜란드 축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의 수비 능력은 단순히 골을 막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바소비치는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당대 최고의 리베로로 손꼽혔으며, 이탈리안 스타일의 전통적인 후방 수비수가 아닌 현대적 의미의 스위퍼였다. 뛰어난 볼 간수 능력과 넓은 시야, 정확한 롱패스를 겸비한 그는 수비에서 공격으로의 전환을 주도했다. 또한 필요시 미드필더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도 갖추고 있었다.

바소비치 자신의 말에 따르면, "난 미헬스와 함께 공격적인 수비를 창조해 낸 설계자다. 내가 맡은 부분은 오프사이드 반칙을 유도하거나 골을 넣기 위해 벽 가운데 서있는 역할을 했을 뿐이지만, 경기장 위에서 훌륭한 선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훈련보다 100배는 도움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난 아약스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자신의 영향력을 설명했다.

배리 훌쇼프와 뤼트 크롤, 호르스트 블랑켄부르크 등 어린 수비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훌쇼프는 바소비치와 함께 중앙 수비진을 이뤘으며, 크롤은 이때의 경험으로 나중에 리베로로 뛴 경험도 있다. 이러한 영향력 덕분에 바소비치는 팀원들에게 엄청난 신뢰를 받았고, 아약스의 주장 완장까지 차게 되었는데, 이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주장이 된 것이었다.

바소비치가 이끄는 아약스의 수비진은 매 시즌 발전했다. 1966-67 시즌에는 아직 적응 과정에 있었지만, 바소비치의 지도 아래 1967-68 시즌과 1969-70 시즌에는 훨씬 더 안정적이고 조직적인 수비를 보여주었다. 특히 1969-70 시즌에는 리그 34경기에서 단 13실점이라는 놀라운 수비력을 과시했다.

바소비치는 아약스와 함께 에레디비시 1966-67, 1967-68, 1969-70 시즌 3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KNVB 베이커 1966-67, 1969-70, 1970-71 시즌 3번의 컵 우승도 함께 차지했다. 유럽 무대에서도 바소비치는 빛났다. 1968-69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바소비치는 AC 밀란을 상대로 페널티킥으로 득점을 했으나, 이번에도 1-4로 패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밀란의 스타 플레이어들인 잔니 리베라, 피에리노 프라티, 쿠르트 함린에게 완패한 이 경기는 바소비치에게 큰 실망을 안겼지만, 동시에 더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실망스러운 결과에도 바소비치는 포기하지 않고 팀을 또다시 1970-71 유러피언컵 결승으로 이끌었다. 이 대회에서 아약스는 16강에서 셀틱 FC, 8강에서 루마니아의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 준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차례로 꺾었다. 바소비치는 주장으로서 중요한 순간마다 팀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또 다시 진출하게 된 결승전에서 바소비치는 주장 자격으로 선발 출전하였고, 90분 내내 완벽한 수비를 이끌었다. 바소비치가 지휘한 수비진들은 그리스 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활약을 펼쳤고, 그렇게 팀과 함께 파나티나이코스 FC를 2-0으로 누르며 마침내 염원하던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아약스 역사상 첫 번째 유러피언컵 우승이었으며, 이후 아약스가 3연속 우승을 달성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시즌이 끝나고 미헬스 감독은 FC 바르셀로나로 떠났고, 바소비치도 신생 구단이었던 파리 생제르맹 FC로 이적하길 원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부터 심해진 천식 증상으로 인해, 바소비치는 1971년, 31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선수 경력은 비교적 짧았지만, 13시즌 동안 4개의 유고슬라비아 리그 우승, 3개의 네덜란드 리그 우승, 3개의 네덜란드 컵 우승, 그리고 1개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포함한 화려한 성적을 남겼다.

바소비치의 은퇴는 아약스와 네덜란드 축구계에 큰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가 아약스에 가져온 변화와, 토탈 풋볼의 발전에 미친 영향력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는 분명 아약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외국인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많은 축구 전문가들은 현대 축구에서 리베로 포지션의 진화에 바소비치의 공헌이 지대했다고 평가한다.

2.3. 국가대표 경력

바소비치는 유고슬라비아 국대에 1961년 데뷔하여 1966년까지 32경기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다. 그의 국가대표 첫 골은 1962년 11월 4일 베오그라드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한 UEFA 유로 1964 예선에서 터졌으며, 이 골로 유고슬라비아는 3-2로 승리를 거두었다. 두 번째 골은 1965년 11월 7일 역시 베오그라드에서 노르웨이를 상대로 한 1966 FIFA 월드컵 예선에서 기록했으며, 이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다만 메이저 대회에서는 족적을 남기진 못했다. 1962년 월드컵 당시 바소비치가 엔트리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참가를 못하였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4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바소비치는 이 성공을 함께하지 못했다. 1964년 유럽선수권대회1966년 월드컵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예선에서 탈락하여 본선에 참가하지 못했다. 특히 1966년 월드컵 예선에서는 프랑스, 노르웨이, 룩셈부르크와 함께 한 조에 속했지만 프랑스에 밀려 탈락했다. 유로 1968은 바소비치가 해외로 이적하는 바람에 그대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게 되어 예선에도 참가하지 못하였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축구협회는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을 국가대표로 선발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2.4. 감독 경력

1971년 선수 은퇴 직후, 바소비치는 곧바로 FK 파르티잔으로 돌아와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그는 1971-72 시즌 후반기부터 1973-74 시즌 전반기까지 약 2년간 파르티잔을 이끌었다. 이후 프롤레테르 즈레냐닌을 잠시 지휘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앙제파리 생제르맹[4]을 이끌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다양한 해외 구단에서 지도자 경험을 쌓았다. 1982-83 시즌에는 이집트의 자말렉을, 1983년에는 그리스의 에트니코스 피레우스 FC를 지휘했다. 1986년에서 1988년까지는 자신이 선수로 뛰었던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감독을 맡아 1987-88 시즌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는 그의 감독 경력 중 유일한 리그 우승이었다. 마지막으로 1989년에는 스위스의 벨린초나를 지휘했다. 다만 선수 시절의 화려한 경력에 비하면 그의 감독 경력은 상대적으로 평범했다.

2.5. 은퇴 후 활동

감독 경력을 마친 후, 바소비치는 베오그라드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주목할 만한 은퇴 후 활동은 유고슬라비아 축구협회(FSJ)에 대한 비판과 개혁 노력이었다.

바소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축구협회의 지도부, 특히 오랫동안 회장을 맡은 밀란 밀라니치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끈질긴 비판자 중 하나였다. 그의 비판은 특히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1997년 바소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축구의 발전과 번영을 위한 협회'(Udruženje za razvoj i prosperitet jugoslovenskog fudbala)라는 조직을 설립하여 FSJ에 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이어갔다.

2000년 여름 내내 그는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부인 미라 마르코비치가 이끄는 정당인 유고슬라브 좌파(JUL)가 세르비아 전역에서 조직한 다양한 정당 집회에서 연설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은 2000년 10월 10일, 밀로셰비치 정권이 전복된 지 5일 후에 일어났다. 당시 바소비치는 약 12명의 경호원들과 함께 베오그라드 시내 테라지예 광장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축구협회 사무실에 침입했다. 그들은 정권 붕괴 이후의 혼란을 틈타 축구협회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2.6. 사망

벨리보르 바소비치는 2002년 3월 4일, 6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베오그라드의 노보 그로블레(New Cemetery) 명사의 거리(Alley of Distinguished Citizens)에 안장되었다.

바소비치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인 미르야나 프레라도비치(Mirjana Preradović)와 결혼하여 블라미디르(Vladimir, 1963~), 알렉산다르(Aleksandar,1968~)를 낳았는데, 벨리보르 바소비치는 후에 세르비아의 여배우인 브랑카 요리치(Branka Zorić)와 재혼하였다. 벨리보르 바소비치의 차남 알렉산다르는 장녀 타라를 2009년에, 둘째이자 장남 스테판을 2015년에 낳았다.

3. 플레이 스타일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리베로의 선두주자였다. 기본적인 수비력도 뛰어나지만 이탈리안 스타일의 전통적인 후방 수비수인 스위퍼랑은 거리가 멀었다. 뛰어난 볼 간수 능력과 넓은 시야 그리고 정확한 롱패스를 가지고 있었으며 베켄바워와 함께 리베로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바소비치는 "난 미헬스와 함께 공격적인 수비를 창조해 낸 설계자다. 내가 맡은 부분은 오프사이드 반칙을 유도하거나 골을 넣기 위해 벽 가운데 서있는 역할을 했을 뿐이지만 경기장 위에서 훌륭한 선수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훈련보다 100배는 도움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난 아약스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했다.

4. 수상

4.1. 선수

5. 감독


[1] 현재 국적으로 따지면 세르비아이다.[2] 스위퍼[3] 정확히는 6개월[4] 1976-77 시즌 전반기, 1978-79 시즌 전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