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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B6C1><colcolor=#fff> 세르비아 대공 {{{#fff {{{+1 부칸 1세}}} }}} {{{#fff Вукан I}}} | |
출생 | 1050년경 |
사망 | 1112년경 (향년 약 61~62세) |
재위 | 라쉬카 주판 |
1083년 ~ 1091년 | |
세르비아 대공 | |
1091년 ~ 1112년 | |
아버지 | 페트리슬라프 |
형제 | 마르코 |
가문 | 부카노비치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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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대공국 초대 대공. 동로마 제국의 침략을 버텨내면서 세르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로 부상했다. 부카노비치 왕조의 시조로 간주되는 인물이다.2. 생애
아버지 페트리슬라프는 두클랴 초대 국왕 미하일로 1세와 그리스 출신 2번째 아내 사이의 아들이다. 형제로 마르코가 있었다. 1083년, 두클랴 2대 국왕 콘스탄틴 보딘은 동로마 제국이 로베르 기스카르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라쉬카와 보스니아를 공략했다. 이후 조카인 부칸과 마르코를 라쉬카의 주판(župan)으로 선임했고, 친척인 스테판을 보스니아의 크냐지로 선임했다. 이후 마르코는 기록상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지만, 부칸은 보딘의 세르비아 평정을 도왔다.1090년, 요안니스 두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두클랴를 침공해 보딘을 격파하고 생포한 뒤 디라히온 테마의 모든 영토를 동로마 제국으로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그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되어 두클랴 및 아드리아 해 연안만 직접 통제할 수 있었다. 반면 보딘에 의해 라쉬카 주판에 선임되었던 부칸은 1091년 두클랴로부터 독립한 뒤 세르비아 대공(Veliki Župan)을 칭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페체네그족과 전쟁을 치르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동로마 제국의 국경지대를 꾸준히 침공했다.
레부니온 전투에서 페체네그군을 섬멸한 뒤,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부칸을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1092년, 황제의 명령을 받은 디라히온의 스트라테고스가 군대를 이끌고 부칸의 영역을 침공했지만 기습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 1093년, 부칸은 동로마 제국을 침공해 코소보 일부를 약탈하고 리플란 시를 함락한 뒤 파괴했다. 이에 진노한 알렉시오스 1세는 대군을 일으켜 코소보로 진군했다. 부칸은 코소보에서 즈베찬(Zvečan)으로 후퇴한 뒤, 스코페에 있던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자기 의사를 밝혔다. 그는 현지 동로마 총독들이 세르비아를 여러 번 침공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에 부득이 보복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면서, 인질을 넘겨주고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며, 배상금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그의 약속을 믿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고, 현지 총독들에게 국경의 파괴 된 건물을 수리하고 세르비아 인질을 인수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부칸은 알렉시오스 1세의 독촉 편지를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인질을 보내는 걸 계속 연기했다. 이에 황제는 사촌 요안니스 콤니노스에게 군대를 맡겨 부칸을 응징하게 했다. 동로마군은 리플란 시 인근에서 시트니차 강을 건너 즈베찬 맞은 편에 방어벽으로 요새화된 숙영지를 건설했다. 이에 부칸은 요안니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은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원하고 인질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요안니스는 이를 믿고 방심했다. 현지 수도자가 그런 그에게 "부칸이 비밀리에 군대를 모으고 있다"고 고발했지만, 요안니스는 이를 믿지 않고 그 수도자를 거짓말쟁이이며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얼마 후, 부칸은 야습을 감행해 동로마군 진영을 파괴했다. 대다수 병력이 잠자는 도중에 살해되거나 전투 도중 적의 칼에 찔러 죽거나 시트니차 강에 빠져 죽었고, 요안니스는 얼마 안 되는 병력만 챙겨 리플란으로 도망친 뒤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다. 부칸은 여세를 이어가 코소보와 메토히자를 경유해 마케도니아 북부를 휩쓸며 스코페, 고르니, 폴고르카 분지 일대를 약탈한 후 브란예 시 주변을 황폐화한 뒤 라쉬카로 귀환했다. 1094년, 알렉시오스 1세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세르비아 국경으로 진군해 폐허로 변한 리플란에 입성했다. 이에 부칸은 사절을 보내 이번에는 진짜로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하면서, 약속된 인질을 제공하기로 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부칸의 조카인 우로시 1세와 스테판 부칸을 포함한 인질 20명을 받고 돌아갔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선전하자, 세르비아인들이 대거 그에게 가담하면서 세르비아 내륙 지대의 지배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1099년, 두클랴 국왕 콘스탄틴 보딘이 사망했다. 그 후 장남 미하일로 2세가 즉위했지만 얼마 안가 숙부 도브로슬라프가 두클랴 귀족들의 후원에 힘입어 찬탈했다. 1102년, 부칸은 또다른 두클랴 왕위 주장자 코차파르를 앞세워 두클랴를 침공했다. 브로슬라프는 모라차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뒤 라쉬카로 이송되었고, 달마티아 대부분이 약탈되었다. 이후 부칸 1세는 코차파르를 두클랴의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코차파르는 부칸 1세의 간섭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통치하려 했고, 이로 인해 둘의 동맹은 끊어졌다. 1103년, 부칸 1세는 재차 군대를 파견해 코차파르를 몰아내고 그의 친족인 블라디미르를 두클랴의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 후 블라디미르는 부칸 1세의 딸과 결혼해 입지를 강화했고, 부칸이 다시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일 때 지원군을 보냈다.
1106년 봄, 부칸은 동로마 제국을 재차 침공해 요안니스 콤니노스를 격파하고 국경 지대를 약탈했다. 이에 알렉시오스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세르비아 국경으로 진군하자, 그는 그해 11월 인질을 재차 알렉시오스 1세에게 넘기고 평화 협약을 맺었다.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아예 밟아버리고 싶었겠지만, 워낙 험준한 지형에 숨어서 유격전을 벌이는 그들을 단시일에 토벌하기 힘든 데다가, 투르크, 쿠만, 프랑크 등 다른 적들도 신경써야 했던 터라 부칸에게 집중하기 어려웠기에 어쩔 수 없이 부칸과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데, 학자들은 1112년에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가 죽은 직후에 일어난 사건은 명확하지 않으나, 부카노비치 가문 사이에 권력 투쟁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부카노비치 가문의 일원인 자비다[1]는 1113년 제타로 피신했고, 거기서 많은 아들을 낳았다. 그중 막내아들인 스테판 네마냐가 훗날 세르비아 대공이 되었다. 한편, 부칸 사후 세르비아 대공위는 부칸 1세의 조카인 우로시 1세가 물려받았다.
[1] 부칸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고 부칸의 조카 우로시 1세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