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랙스턴 브래그 Braxton Bragg | |
출생 | 1817년 3월 22일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워런턴 | |
사망 | 1876년 9월 27일 (향년 59세) |
미국 텍사스주 갤버스턴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아메리카 연합 육군 |
최종 계급 | 아메리카 연합 육군 대장 |
복무 기간 | 1837~1856 1861~1865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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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노스캐롤라이나주 워런턴에서 태어나 1837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1] 제3포병연대가 초임지이며 2차 세미놀 전쟁에 참가했고 이후 미국-멕시코 전쟁당시 부에나비스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대령으로 전역 후 루이지애나주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했으며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남군 소속 장성으로 복귀해 신병 훈련을 담당했다. 이 때부터 전쟁 내내 겪었던 류머티즘, 소화불량, 편두통 등 여러 건강 문제를 겪었다고 여겨진다.
샤일로 전투에서는 군단장이자 사령관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의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존스턴 전사 뒤 사령관이 된 P. G. T. 보우리가드가 전투 첫째날 마지막 공세를 중단하자 승리의 기회를 놓쳤다며 반발했다. 샤일로 전투에서 브래그의 전과는 남부 대중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었고, 브래그는 남부연합의 6번째 대장으로 승진했다.
보우리가드는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과 갈등이 있었고, 브래그가 보우리가드 대신 1862년 6월 17일부터 남군 미시시피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8월 브래그는 율리시스 S. 그랜트를 대비하기 위해 스털링 프라이스와 얼 반 돈의 군대를 남겨놓고, 자신은 주력군을 이끌고 에드먼드 커비 스미스와 연합하여 켄터키를 침공했다. 켄터키 주민들은 기대보다 남부연합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데이비스가 커비 스미스에게 독자적인 지휘권을 주는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0월 페리빌 전투에서 브래그의 군대 일부가 돈 카를로스 뷰얼의 연방군 일부와 격렬한 싸움을 벌여 승리했지만, 브래그는 전역을 지속하지 않고 컴벌랜드 협곡으로 후퇴를 선택했다. 앤티텀 전투와 제2차 코린트 전투에서 남군이 패배하는 등 브래그의 결정에도 이유는 있었지만, 브래그와 휘하 지휘관들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11월 미시시피군은 테네시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브래그는 계속 이 남군 서부전선 주력부대를 지휘했다. 12월 31일 브래그는 스톤스 리버 전투에서 뷰얼의 후임 윌리엄 로즈크랜스의 연방군 컴벌랜드군을 상대로 우익을 공격했다. 양측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끝에 브래그는 후퇴를 선택했고, 브래그의 부하들은 브래그에게 공개적으로 항명하기 시작했다. 데이비스 대통령은 조셉 E. 존스턴을 테네시군에 감사 임무로 보내고 만약 상태가 좋지 않다면 브래그를 대신해서 사령관이 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존스턴이 본 테네시군의 상태는 좋은 편이었고, 존스턴 본인의 성격상 본인의 평가로 직접 브래그를 대신하는 것은 신사적이지 않게 여겨졌다. 브래그를 리치먼드로 소환하라는 데이비스의 요구는 존스턴이 시간을 끈 결과 흐지부지되었고 브래그는 유임되었다.
6개월 동안 다음 공세를 준비하던 북군의 로즈크랜스는 1863년 6월부터 기동을 시작했고(털라호마 전역), 브래그는 좋은 방어 위치를 선점했음에도 불구하고 로즈크랜스가 준비한 속임수에 넘어가 테네시 동남쪽 끝 채터누가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 롱스트리트의 지원군을 받은 브래그는 9월 치카모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전투 승리의 이유는 로즈크랜스의 실수와 롱스트리트의 공이 더 컸다. 브래그는 채터누가까지 후퇴한 로즈크랜스를 직접 공격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포위를 선택했지만 부족한 병력을 분산시켜 롱스트리트의 병력을 녹스빌로 보내는 전략적 실책을 범했다. 결국 율리시스 S. 그랜트는 지원군을 받아 증강된 대규모 연방군을 이끌고 채터누가 전역에서 승리하여 로즈크랜스를 구원하고 브래그를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국 11월 29일 브래그는 사임했다.
이후 브래그는 리치먼드에서 데이비스 대통령의 군사 조언자로 활동했고, 애틀랜타 전역에서 조셉 E. 존스턴이 존 벨 후드로 교체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전쟁 말기에는 노스캐롤라이나 해안방위를 맡았다가 윌리엄 테쿰세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 뒤에는 남부 각지의 방어를 맡기도 했다. 제1차 포트 피셔 전투에서 남군이 벤저민 버틀러를 상대로 승리하자 요새의 방어력을 과신했지만, 사실 방어 성공은 버틀러의 무능함 때문이 컸고 제2차 포트 피셔 전투에서 지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패전에 일조했다. 브래그 휘하에서 고생했던 존 C. 브레킨리지가 전쟁장관이 되는 등 브래그는 그나마 남아 있던 군 내의 영향력도 잃어버렸고, 데이비스는 브래그의 자리를 만들어주려 했지만 복귀한 조셉 E. 존스턴 휘하의 군단장 정도가 고작이었다. 리치먼드가 함락되어 남서쪽으로 도망치던 데이비스와 합류하여 그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전쟁중 브래그의 플랜테이션은 연방군에 의해 압류당했다. 전후 보험회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나 오래 일한 곳이 거의 없었다. 이집트군 고문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거부하기도 했다. 1876년 갤버스턴에서 길을 걷던 중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15분 뒤 사망했다.
3. 평가
남부연합의 패망에 큰 영향을 미친 남북전쟁 최악의 장군 중 하나로 꼽힌다. 서부전선의 패배가 남부연합의 몰락을 결정했다는 평가가 많으며, 브래그는 서부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한 결정적인 시기에 서부전선의 책임자였고 중요한 패배를 겪었다.자주 전방 돌격을 시도하다가 큰 피해를 입고 실패하는 등 군사적 능력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그가 가장 비판받는 점은 휘하 장군들과의 관계이다. 지나치게 깐깐하고 쉽게 분노하는 성격으로 휘하 군단장들인 윌리엄 J. 하디, 레오니다스 포크, 존 C. 브레킨리지, 잠시 함께 일했던 제임스 롱스트리트까지 수많은 부하들과의 관계가 최악에 가까웠다. 굳이 변명하자면 그와 관계가 나빴던 포크 또한 남북전쟁 최악의 졸장으로 손꼽힌다는 점, 전쟁 내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업무나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 정도이다.
4. 여담
- 에드워드 S. 브래그와 사촌관계이다.
-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군사기지 포트 브래그의 어원이 된 인물이다. 이후 남군 장군의 이름을 배제시키는 분위기에 따라 포트 리버티로 개명했다.
[1] 당시 동기는 조셉 후커, 존 C. 펨버턴, 주발 얼리, 윌리엄 H. T. 워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