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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키나파소 제6대 대통령 블레즈 콩파오레 Blaise Compaoré | |
출생 | 1951년 2월 3일 ([age(1951-02-03)]세) |
프랑스령 오트볼타 와가두구 | |
국적 | [[부르키나파소| ]][[틀:국기| ]][[틀:국기| ]] → [[코트디부아르| ]][[틀:국기| ]][[틀:국기| ]] |
종교 | 가톨릭 |
재임 | 제6대 대통령 |
1987년 10월 15일 ~ 2014년 10월 30일 | |
부르키나파소 법무장관 | |
1985년 ~ 1987년 | |
복무 | 부르키나파소 육군 |
계급 | 부르키나파소 육군 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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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키나파소의 6대 대통령이자 독재자.1980년대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토마 상카라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지만 상카라를 배신, 직접 살해한 후 27년간 장기집권하며 상카라의 정책을 모두 뒤집어버리고 독재 정치를 일삼으며 부르키나파소를 오늘날과 같은 파탄국가로 전락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2. 생애
프랑스 몽펠리에 보병학교를 졸업한 콩파오레는 귀국해 군에 입대, 육군 대위로 진급했다. 1976년 모로코 육군훈련센터에서 상카라 전 대통령을 만나 정치적 동지가 된 콩파오레는 1983년 당시 총리이던 상카라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뒤 법무장관을 맡았다.그런데 토마 상카라의 예전 동료였던 콩파오레는 상카라와 반대성향이었다. 이 때문에 상카라의 급진적 정책에 대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정책을 철회해달라고 수차례 건의했으나[1] 전부 묵살당하며 상카라의 정적이 되고 말았다. 1987년 10월 15일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정부를 전복하고 상카라를 와가두구 외곽으로 끌고 가 직접 사형을 집행했으며, 이때 12명의 장교도 함께 처형됐다. 고작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절친에 의해 수십발의 총을 맞고 처형된 상카라는 시체가 토막난 채 서둘러 이름없는 무덤에 매장됐다.[2] 그리고 '개정'이라는 정책을 진행해서 상카라가 실시하던 정책들을 모두 중단시켰다.
물론 토마 상카라가 처형된 후에도 CDRs의 일부 세력은 며칠 동안 콩파오레 군부에 대한 무장투쟁을 계속했지만 콩파오레는 대통령이 된 후 그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동료이자 혁명지도자인 앙리 종고(Henri Zongo)와 장바티스트 부카리 링가니(Jean-Baptiste Boukary Lingani)와 삼두정치를 해오다가 1989년 9월에 쿠데타 공모 혐의로 즉결 재판 후 처형했다. 그나마 극미량의 양심과 죄책감은 있었는지 콩파오레는 집권 후 인기가 떨어질 때 내지 몰락했을 때 자신이 과거에 상카라의 동료였다는 것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지지와 용서를 호소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1990년에 블레즈 콩파오레 정권은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다당제 허용을 주요 내용으로 한 신헌법을 채택했다. 1991년 실시된 대선에서 블레즈 콩파오레는 25%의 득표율로 7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1야당은 토마 상카라의 처형에 항의하여 대선을 보이콧 했다. 1997년 실시된 총선에서 CDP는 111석 중 101석을 휩쓸면서 압승을 거두었다. 1998년 실시된 대선에서 콩파오레는 재선에 성공했다.
그의 통치 시기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는 다비드 웨드라오고(David Ouédraogo)가 살해된 사건이 가장 유명하다. 1998년 12월에 인디펜던트지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인 노르베르 종고(Norbert Zongo)가 콩파오레 대통령의 동생인 프랑수아 콩파오레(François Compaoré)의 집에서 발생한 절도사건에 대통령 경호실이 개입해 용의자인 운전기사 다비드 웨드라오고가 고문을 받고 살해된 사건을 기사화했는데, 그는 교통사고로 위장된 현장에서 동료 3명과 함께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었다. 국경없는기자회는 종고의 몸에서 두 개의 총알을 발견하고 콩파오레와 그의 경호대가 종고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있다고 발표하자, 부르키나파소 당국은 국경없는기자회의 일원인 로베르 메나르(Robert Ménard)를 추방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국내외에서 콩파오레 정권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마침내 대통령 경호원들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추방된 로베르 메나르는 "범죄를 사주한 자들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데도 명령을 이행한 자들만 처벌받는 정의에 만족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2000년에는 블레즈 콩파오레 정권은 대통령의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고, 2번에 한해서 연임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또한 2002년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자 콩파오레의 당인 CDP는 111석 가운데 57석을 얻어 다수당이 되었다.
2005년 8월에도 블레즈 콩파오레는 차기 대선에도 출마하겠다고 발표했다. 부르키나파소 야당은 콩파오레의 대선 출마가 헌법위반이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출마를 막을 수는 없었다. 2005년 10월 부르키나파소 헌법위원회는 사사오입 개헌과 엇비슷하게 헌법을 개정할 당시 콩파오레는 현직 대통령이었으므로 그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때까지 이 조항은 적용되지 않으며, 따라서 2005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렸다. 이에 대선을 앞두고 16개의 야당은 콩파오레의 낙선을 위해 연합한다고 발표했지만, 대통령 후보를 사퇴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2005년 11월 실시된 대선에서 콩파오레는 야권 분열을 틈타 80.35%을 얻어 12명의 후보자들을 따돌리며 3선에 성공했다. 이후 콩파오레는 2010년 열린 4번째 대선에도 출마해 81%라는 득표율로 4선에 성공했다. 이 대선에는 6명의 군소 후보들이 콩파오레에게 도전장을 냈으며, 53%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5선까지 도전하며 장기집권을 할 줄 알았으나...
그의 5선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는 5년 중임이 끝나는 2015년 선거에 다시 출마하기 위해 30일 국회에서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헌법 개정안 표결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에게 반대하는 군부 쿠데타까지 일어나자 결국 대통령에서 물러나 코트디부아르로 망명했다. 그의 사퇴 소식에 반정부 시위대는 축제 분위기를 보였다고 블룸버그 통신은 전하기도 했다.
2015년 대선에서는 콩파오레 정권에서 총리를 지냈다가 2014년 반정부 시위를 지지한 로크 마르크 크리스티앙 카보레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웃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망명한 콩파오레는 토마 상카라의 죽음과 자신은 연관이 없다고 부인해오고 있으나, 정부 당국은 2015년 초에 상카라의 묘지에서 상카라의 시신을 발굴해 조사를 벌였다.
결국 부르키나파소 군사법원은 2015년 12월 21일 1987년 토마 상카라와 그의 지지자 12명을 처형한 혐의로 블레즈 콩파오레에 대한 국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후 2022년 4월 6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22년 7월 8일에 콩파오레는 망명지 코트디부아르에서 약 8년 만에 귀국했다.# 그 후 상카라를 죽인 것에 대해 국민들과 상카라의 유족들에게 사죄했다. #
3. 나락으로 떨어진 나라
그의 통치 아래 부르키나파소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부르키나파소의 보건위생 상황은 의료진의 부족과 의료시설의 부족 등 극도로 열악해졌는데, 부르키나파소의 어린이들은 현재까지도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려 있으며, 상당수의 국민들이 한센병, 수막구균 감염증, 과립성 결막염, 주혈흡충병, 사상충증, 말라리아, 결핵 등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평균수명은 2020년 기준으로도 62.7세에 불과하다.내륙국가인데다가 사막성 기후를 가져 수자원과 부존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경제개발 환경이 열악한 부르키나파소는, 콩파오레가 축출되고 8년이나 지난 2022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194개국 중 179위인 824달러로 아프리카 최빈국 중 하나로 꼽힌다. 2021년 기준으로 문맹률도 46%에 달하고, 2022년 인간개발지수 수치도 세계 191개 국가 중 184위에 머무르는 극빈국으로 남아 있다.
4. 기타
- 라이베리아의 군벌이던 찰스 테일러를 좋아했는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테일러를 소개시켜준 바가 있으며, 1990년대 초반에 테일러에게 군인들과 자원을 지원해줬다고 한다.
끼리끼리
- 블레즈 콩파오레는 부르키나파소가 1962년 한국과 수교한 이후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1997년 9월 2일부터 4일까지 방한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또한 1988년 9월에는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