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포위전 Siege of Sarajevo | |
보스니아 전쟁의 일부 | |
기간 | |
1992년 4월 5일 - 1996년 2월 29일 | |
장소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 |
결과 | |
데이턴 협정 체결 세르비아군 철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영토가 분할됨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스릅스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UN NATO | |
지휘관 |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하키야 투라일릭† 세페르 할릴로비치 라심 델리치 요반 디브야크 드라간 비키치 엔베르 하지하사노비치 무스타파 하이룰라호비치 탈리잔 바히드 카라벨리치 네자드 아이나지치 무산 토팔로비치† 이스메트 바이라모비치 유수프 프라지나 라미즈 델라리치 자임 이마모비치† 엔베르 세호비치† 블라디미르 샤프 이반 불리치 | 밀루틴 쿠카냐츠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토미슬라프 시프치치 스타니슬라브 갈리치 드라고미르 밀로셰비치 |
베르나르 잔비어 루이스 맥켄지 프랑수아 미테랑 레이턴 W. 스미스 주니어 | |
병력 | |
보스니아 군인 70,000명 | 스릅스카 군인 13,000명 |
피해 규모 | |
보스니아 6,137명 전사 | 유고슬라비아 2,241명 전사 |
민간인 5,434명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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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psada Sarajeva (보스니아어, 크로아티아어)Opsada Sarajeva / Опсада Сараjева (세르비아어)
Siege of Sarajevo (영어)
Le siège de Sarajevo (프랑스어)
Die Belagerung der Stadt Sarajevo, Belagerung von Sarajevo (독일어)
Осада Сараева (러시아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1992년 4월 6일부터 1996년 2월 29일까지 1425일간 지속된 도시 포위전. 이 기록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대표적인 포위전이었던 레닌그라드 전투 지속기간의 2배에 달하며 2차대전 이후 가장 오래 지속된 포위전으로도 꼽힌다.
2. 발발
1992년 보스니아 전쟁 개전 이전부터 세르비아계 정당과 단체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연방에서 독립을 시도할 시 우리 또한 독립하여 세르비아계의 나라인 스릅스카 공화국을 세울 것"을 선언하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은 국민투표를 거쳐 독립을 강행했고 마침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한다. 국민투표를 보이콧하고 '스릅스카'의 깃발 아래 조직되어 있던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이 지도하는 무슬림 공화국이 유럽 한복판에 서는 것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걸고 보스니아를 전격 공격한다.1992년 4월 4일 세르비아 민병대(스릅스카군)는 사라예보 서남부의 사라예보 국제공항을 봉쇄했으며 사라예보 시내를 관통하는 밀랴츠카 강 남부의 시가지를 점거하고 시내로 진입하였다. 이 사건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사라예보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독립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건국을 축하하며 세르비아 민병대를 막아서고 있었고, 홀리데이 호텔을 점거한 세르비아 민병대의 저격으로 첫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다.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주도하던 연방 정부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직접적으로 개입하진 않았지만 보스니아 전쟁에 대비해 전쟁 발발 직전부터 은밀하게 라도반 카라지치가 주도하던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민병대로 편입되고 있었다.[1] 그 덕에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민병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13,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이에 상응하는 기갑, 중화기로 무장하고 사라예보를 포위해 1425일간 사라예보를 드나드는 모든 물자와 사람을 통제하였다. 사라예보에는 7만명 규모의 보스니아 정부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도시군대로서 화력과 작전계획이 충분하지 않았고,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지의 요새를 빼곡히 점거한 세르비아 민병대를 밀어내지 못했다.
AP 통신 : 사라예보 포위전, 1995년 6월 16일 |
보스니아군이 도시 포위를 뚫기 위해 세르비아 민병대의 거점을 포격하며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교전은 포위기간 내내 이어졌으나, 보스니아군은 종전에 이르기까지 자력으로 포위를 뚫는 데 실패하였다. |
개전 초반에 빠르게 형성된 포위망을 보스니아 정부군 스스로 끝까지 뚫어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서방세계의 지원 미비를 꼽아볼 수 있다. 당시 서방세계는 유럽에서 또 다시 전쟁이 벌어졌다는 점에 대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독립하려는 보스니아가 이슬람교 우세 국가라는 점과 보슈냐크인들의 이슬람 신앙을 오스만 제국의 잔재로 부정적으로 여기는 시각들이 혼재하여 수도 사라예보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공세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실패하였다. 보스니아 정부군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은 서방세계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해 놓고 세르비아의 개입을 모르쇠하며 형식적인 평화 협상만을 언급한다고 비판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았다.
3. 도시 포격
3.1. 국립도서관 포격
불타는 BiH 국립도서관(비예치니차). 1992년 8월 25-26일. |
사라예보 포위가 시작된 4월로부터 4개월간 세르비아 민병대는 도시 포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막상 도시 내에 주둔한 정부군과의 직접 교전을 통한 소모전은 피하고 있었다. 사라예보에 대통령궁과 내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전국토를 점거하기 전에 이들부터 잡아버리면 전국에 점조직으로 흩어질 무자헤딘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국제사회의 어그로를 끌지 않고 조용히 전체 영토를 집어삼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내전의 근간에 인종간의 증오가 깊이 뿌리박혀 있는 바, 세르비아 민병대는 보스니아 정부 지지도가 높은 민간인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직접적으로 시내로 진공하는 대신 비군사적 목표물들에 포격을 감행한다. 이로 인해 수십 만 권의 역사적 원본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던 BiH 국립도서관이 완전히 불타고 만다.
포격으로 화재가 발생한 도서관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관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물은 대피되지 못했다. 화재를 진압하러 온 소방관조차도 포격에 이은 저격을 받아 물러나고 도서관이 완전히 잿더미가 될 때까지 손을 쓸 수 없었다. 최종적으로 80% 이상의 유물이 영구적으로 손실되었다고 전한다.
재개관식에서 축사를 하는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 2014년 10월 5일. |
"우리는 후손들에게 '악은 결코 승리할 수 없으며, 역사를 불태우는 짓은 헛수고'임을 경고합니다." |
3.2. 마르칼레 시장 포격
마르칼레 시장(사라예보) |
두 차례 학살이 벌어진 시장의 위치. |
Markale market shelling or Markale massacres
Masakri na Markalama / Масакри на Маркалама
1994년 2월 5일,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대부분의 전선이 교착된 시점에서도 사라예보는 여전히 포위중이었으며, 시민들은 평소와 같이 봉쇄 속에서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몰리는 정오(발칸 중부 시각으로 정오, 보스니아 시각으로 11시 경)를 기해 시내에 갑작스런 박격포 포격이 개시되었다. 백주대낮에 시내 한복판에 장을 보러 나온 많은 시민들이 포격에 희생되었다. 최종적으로 68명의 사망자, 144명 이상의 부상자가 집계되었다.
마르칼레 시장 2차 포격. 1995년 8월 28일. (큰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영상으로, 시청에 주의를 요함) |
UN과 NATO로 대표되는 주변 국제사회는 이미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고, 이 2차 포격 당시 파리에서는 평화 회담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포격으로 다시 한 번 농락당한 서방세계는 3년간 이어온 '신사적인 중재'를 끝내기 위해 세르비아 민병대가 더이상 호전적으로 보스니아를 윽박지를 수 없도록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로써 딜리버리트 포스 작전(Operation Deliberate Force)이 NATO에 의해 한 달 간 개시되고, 그제야 비로소 세르비아 민병대 측에 예절이 주입되어 데이턴 협정을 체결해 종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자칭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이자 세르비아 민병대의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는 두 차례 포격에 대해 보스니아 측이 서방세계의 지지를 얻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해 이 두 차례의 학살 모두 세르비아 민병대의 소행으로 판명되었고 라도반 카라치치는 이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는다.
4. 저격수 거리
사라예보 중심가 지도. 도심 정중앙을 밀랴츠카 강이 횡으로 관통하고 있다. |
도심의 남쪽 일부 지역과 남쪽 변경 산지를 장악한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장악하지 못한 중북부 도심을 향해 3년간 테러를 가했다. 밀랴츠카 강 이북 첫블록 연선이 모두 저격수 거리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남쪽 산지를 중심으로 직선으로 죽죽 그어진 붉은 점선은 오늘날 BiH 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의 국경이다. |
사라예보는 시가지 남부를 밀랴츠카 강이 관통하며 남북에 각각 산지를 낀 도시이다. 특히 사라예보의 중심가는 이 준분지의 남부, 밀랴츠카 강변에 위치했는데 강의 남부와 바로 이어진 산간 요새는 모두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빠르게 장악한 상태였다. 오늘날 사라예보의 경계상 도시 동남부의 산악지대가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의 공격이 가장 거셌던 요새였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남부 산지를 점거하고 도시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구역의 무슬림을 추방, 살해, 약탈하였으며 산악 요새와 강남의 고층건물들을 거점으로 삼아 사라예보 중심가를 공포로 몰아넣기 위한 민간인 저격을 벌인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저격총 뿐만 아니라 경기관총, 대공포 등 멀리 쏠 수 있는 화기라면 포격만 빼고 무엇이든 거리낌없이 사라예보 시내에 쏟아부었다. 물론 3년간의 포위동안 도시 포격 역시 빈번하게 이루어졌지만 이에 대해서는 '보스니아 정부군이 선공하여 원점에 반격하였다'라거나, 주로 야간에 사격하여 원점을 알 수 없도록 하는 식으로 '보스니아 정부군이 선동을 위해 스스로 쏘았다'고 주장하는 등 여러 변명을 댔다.
AP통신 : 시민들에게 가해지는 무차별 총격. 1995년 6월 12일. (큰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영상으로, 시청에 주의를 요함) |
거리의 시민들과 차량에 대한 무차별 저격이 계속 이어진다. 29초경에 승용차 뒷유리가 총격에 맞아 깨지는 것을 볼 수 있다. |
AP통신 : 도심 한복판에서 저격수에게 사망한 11세 아이. 1994년 8월 12일. (큰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영상으로, 시청에 주의를 요함) |
집앞에서 놀던 아이가 저격당하여 급히 실려간다. 아이의 어머니는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아이의 아버지는 이미 저격으로 어머니를 잃은 데에 불행이 겹쳤다.[3] 실려가는 모습과 저격당한 현장, 병원에 도착한 시신이 고스란히 기록되었음. |
3년간의 무차별 저격과 포격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은 11,541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물론 노약자도 포함되어 1,600명에 달하는 어린이들 또한 저격수에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상자의 수는 5만 명을 넘는다.#
AP통신 : 저격수 거리에서 지게차를 몰다 사살당한 병사. 1995년 4월 15일 (큰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영상으로, 시청에 주의를 요함) |
유엔 평화유지군 임무를 위해 투입된 프랑스군이 컨테이너 박스로 저격수 거리에 민간인 통행을 위한 바리케이드를 설치한다. 컨테이너를 조작하던 프랑스군 지게차 운전병[4]이 카메라가 보는 앞에서 저격수[5]의 총탄에 사망한다. |
저격수들의 무차별 사격은 민간인만을 노린 것도 아니었다. 도시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비무장 상태로 작업하는 유엔 평화유지군 역시 저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자폭은 세르비아계에게도 어떻게든 중립적 입장을 취해 주려고 평화회담을 주선하던 서방세계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이었고, 결국 세르비아계는 매우 우세했던 전쟁을 치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비긴 것만도 못한 평화협정을 체결해야만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이 저격수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들킨 상태에서 생포당한다면 그야말로 상상도 못할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민간인을 무차별 사격하는 것만으로도 중범죄인데, 그것도 모자라 도시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비무장 상태로 작업하던 유엔 평화유지군한테 대놓고 악랄하게 저격질을 해댔으니 잡히면 자신들의 악행에 걸맞은 최후를 목숨으로 치러야 했다.[6]
5. 도시 마비
AP통신 : 물, 전기, 가스 등 모든 자원이 끊긴 사라예보. 1995년 9월 18일 |
6. 종결
1995년 12월 14일 맺어진 데이턴 협정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 양측의 존재의 공인, 내전을 둘러싼 세 민족정당의 갈등 봉합과 화해가 선언되었으나 포위전은 평화협정 이후에도 한동안 지속되었다. 협정만으로는 서로를 신뢰하기 너무 멀리 갔기 때문일 것이다. 이 봉쇄전의 마지막 피해자들은 1996년 1월 9일 그르바비차(사라예보 강남의 시가지) 포격으로 발생한 19명의 사상자(1명의 사망자 포함)였다.오늘날 사라예보 홀리데이 호텔 인근의 강변도로와 시가지는 '저격수 거리'라는 관광 스팟으로 보존되어 있다.
7. 여담
사라예보 포위전이 1년 지난 1993년 4월부터 3개월 간 사라예보 시민들이 자원하여 사라예보 국제공항이 소재한 부트미르(Butmir)에서 사라예보 국제공항 활주로 밑을 통과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의 경계지역인 도브리냐(Dobrinja)를 잇는 터널 'Objekt D-B'을 건설했다. 당시 사라예보 국제공항은 UN평화유지군이 관리하던 곳이어서 사라예보 포위전 당시 이 터널을 통해 여러 구호품들을 안전하게 이송하는 통로로 활용됐다. 현재는 '사라예보 터널' 혹은 일명 '희망의 터널'이라는 이름으로 관광명소가 됐다. 이 터널의 기점 중 하나였던 가정집이 후에 발각되면서 집주인이 세르비아 민병대의 무차별 공격으로 사망했는데, 이 집 벽에는 당시의 총탄 흔적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아이언 메이든이 보스니아 전쟁 중인 1994년 12월 사라예보 터널과 사라예보 국제공항을 방문하여 위문공연을 벌였다. 훗날 25주년이 되는 2019년 사라예보 시에서는 전쟁 중 위문공연을 제안한 브루스 디킨슨에게 사라예보 명예시민을 표창하기도 했다.
WWE 캐스터로 유명한 마이클 콜은 원래 WWE 활동을 시작하기전 유명한 CBS의 종군기자로서, 이 사라예보 포위전 때 무려 9개월 동안 사라예보에 들어가 포위전을 취재했었다.
포위전 기간 동안 거리에 나와 시민들을 음악으로 위로했던 첼리스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Vedran Smailović)는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고 불리며[7] 서방 언론에도 알려져 존경받았으며, 그를 비롯한 사라예보 시민들을 소재로 한 소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도 나왔다.
게임 This War of Mine에는 '저격수 거리'라는 장소가 등장하는데, 이 사라예보 포위전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게임은 보스니아 전쟁에서 레딧의 한 유저가 겪은 경험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보스니아 전쟁에서 많은 요소를 따 왔다.
[1] 세르비아나 몬테네그로 본토 출신은 귀국시키고 반대로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을 보스니아에 집결시킨 다음 소속 변경 시키는 식이었다.[2] 정식 명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 대학 도서관"(National and University Library of Bosnia and Herzegovina (NUL) / La Bibliothèque nationale et universitaire de Bosnie-Herzégovine (NUBBiH)).[3] 영상에 아이의 아버지가 분에차 소리를 지르는데 "어떻게 아무 죄 없는 내 딸을 죽일수가 있냐"며 하소연 하는 장면이다.[4] 이름은 에리크 아르도앙 (Eric Hardoin)으로, 향년 3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아내와 두 딸이 있었으며, 사라예보로의 2번째 파병이었다고 한다.[5] 0:28~29 경에 첫 번째 총성이 들리면서 화면 왼쪽 상단 AP 로고가 있는 쪽에 총알의 궤적이 날아가는 장면이 찍혔다. 이후 1:00 경에 두 번째 총성이 들리면서 뒤에 보이는 건물 꼭대기층 발코니에서 총구 화염이 보인다. 이 총격은 지게차 상단의 유리창에 맞았고 군인은 맞지 않았지만, 지게차에서 급히 내리는 도중에 세 번째 총격에 맞아서 사망했다. 방탄복을 입고 있었지만 내리던 도중 방어가 취약한 옆구리가 노출되었고 하필 거기에 저격당해 치명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후반부에 들것에 이송되는 영상을 보면 오른쪽 옆구리 부위에 총상을 입은 것이 보인다. 영상에서는 저격 직후에 살아있었지만 이송하는 중이나 병원 도착 후에 사망한 듯하다.[6] 저격수는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히면 살아남기 어려운 병종이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사람 좋기로 유명했던 오마 브래들리마저 저격수는 "조금" 거칠게 다뤄도 굳이 말리지 않겠고 할 정도로 적군 저격수의 대접은 상상을 초월했다. 거기다 이 자들은 전쟁범죄까지 저질렀으니... 심지어 이 저격수들은 죽기 전에 총알과 훈장을 삼켜야 했다.[7] 특히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자주 연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