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쿠레시 성채와 시가지의 모습
해변 전경
1. 개요
알바니아어 Sarandë이탈리아어, 터키어 Saranda
그리스어 Άγιοι Σαράντα
알바니아 서남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 블로러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져 있고, 그리스와의 국경과의 거리는 15km 정도에 불과하다. 인구는 약 2만 3천명으로,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각각 43%와 57%로써 알바니아에서 보기 드문 기독교도 다수 도시이다. 민족으로 따지면 알바니아인 57%, 그리스인 41%, 아로마니아인 2% 순이다. 전통적으로 이피로스 지역에 속했고, 전근대 시기에는 작은 항구였다가 20세기 들어 2차 대전 전후에 블로러와 함께 알바니아 남부의 주요 항구로 발전했다. 그외에 백사장이 있어 휴양지이기도 하며, 여름철마다 대형 여객 크루즈 선이 정박하기도 한다. 남쪽의 부트린트 방문 시에 거치기도 한다. 블로러와 유사하게 동남쪽의 언덕에 성채가 있다.
2. 역사
레쿠레시 성채 (Kalaja e Lëkurësit)의 옛 성벽
지명의 유래가 된 40성인 수도원 (아기오이 사란타)
고대 그리스 시기 에피로스에 거주하던 카오니아 인들이 세운 온케스모스 (Ὄγχεσμος)란 도시가 있었고, 바다 건너의 코르키라 (코르푸)와 교류했다. 온케스모스는 카오니아의 중심지인 포에니케의 외항으로써 번영했고, 로마 제국 시기 온케스미테스 혹은 온케스무스라 불리며 브린디시와 여객선이 오갔다. 도시는 안키세스의 항구 (Ἀγχίσου λιμήν)라 불리기도 했고, 동로마 제국기에는 안키아스모스 (Ἀγχιασμός)로 지명이 바뀌었다. 4-5세기 무렵 시내에는 알바니아의 첫 시나고그 (유대 회당)이 세워졌으나, 6세기 들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551년에는 동고트 부족이 습격했고, 고트족 해적이 종종 약탈을 벌였다. 그 영향인지 12세기 기준 도시는 버려져 있었고, 지명 자체가 완전히 잊혀져 인근의 6세기에 세워진 성당인 아기오이 사란타로 대신 칭할 정도였다.
다만 오스만 제국 들어 다시 마을이 형성되었고, 19세기 알리 파샤의 지배 하에 스칼라 혹은 스칼로마로 불렸다. 그러다 1867년부터 행정상 사란다로 표기되기 시작했고, 1878년에 그리스 반군이 점령했으나 오스만측 토벌군이 20개 마을들을 불태우며 진압했다. 오스만 당국은 프레베자를 대체할 항구로써 사란다를 개발하려 했으나 발칸 전쟁 중인 1913년 3월에 그리스 왕국군이 점령했다. 그해 12월 일대는 피렌체 의정서에 의거하여 알바니아 공국령으로 지정되었으나 현지 그리스 주민들이 반발했고, 1914년 알바니아 내의 자치국인 북이피로스 자치공화국이 설립되었다. 1차 대전 중인 1916년, 이탈리아 왕국이 사란더를 점령해 남부 알바니아 보호령으로 삼았다.
1920년 이탈리아 군이 철수한 후로도 이탈리아는 1926-39년에 걸쳐 사란더 항구를 건설하는 등 관심을 보였고, 결국 1939년 2차 대전 개전 직후 일대를 점령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지명을 장녀의 이름을 붙여 '포르토 에다' (Porto Edda)로 개칭했고, 그리스 침공 당시 사란더는 주요 거점으로 활용했다. 다만 그리스 군이 반격하여 1940년 12월에 사란더를 점령했다가 이듬해 4월,
엔베르 호자 정권기에는 사회주의 정책에 따라 항구의 성 스피르돈 성당이 파괴되었다가 1991년 민주화 후 그 자리에 예배당이 세워졌다. 1992년 알바니아 남부의 그리스인 박해 시에 항구의 그리스 상점들이 불타고 오모니아 (그리스 권리 단체) 건물들이 훼손되었다. 1997년 알바니아 금융사기 사건 시의 혼란기에 그리스 주민들이 정부군 탱크를 탈취하는 일이 있었다. 21세기 들어서는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1912년 기준 1백여명이던 인구는 1950년에 1천 5백이 되었고, 1979년에 1만을 돌파하는 등 빠르게 늘었다.
3. 레쿠레시 성채 (Kalaja e Lëkurësit)
성채에서 바라본 시가지 1
성채에서 바라본 시가지 2
성벽
1537년 쉴레이만 대제가 베네치아 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 건설했고, 220명의 수비대가 주둔했다. 20세기 전까지는 주민들이 성채 내에만 거주했고, 내부에는 근대 시기 건물을 재활용한 식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