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7 16:36:39

부트린트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문화유산
1992년

부트린트
Butrint
2005년

베라트 ・ 지로카스트라 역사 지구
Qendrat historike të Beratit dhe Gjirokastrës
자연유산
2017년

카르파티아 및 유럽의 기타 지역에
생육하는 고대 및 원시 너도밤나무 숲
Pyjeve Primare dhe të Vjetër të Ahut të zonës së
Karpateve dhe Rajonave të Tjera të Evropës
복합유산
1979년

오흐리드 지역의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
Trashëgimia Natyrore dhe Kulturore e rajonit të Ohrit
}}} }}}}}} ||

파일:부트린트.jpg
파일:부트린트 3.webp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부트린트
영어, 불어 Butrint
국가·위치 알바니아 블로러주 부트린트 국립공원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2년
등재기준 (ⅲ)[1]
지정번호 570
파일:부트린트 2.webp

1. 개요2. 역사
2.1. 중세2.2. 베네치아 공화국2.3. 알리 파샤의 점령 (1798년)2.4. 근현대
3. 볼거리

1. 개요

알바니아어, 영어 Butrint
이탈리아어 Butrinto
그리스어 Βουθρωτόν / Βουθρωτός (부트로톤)

알바니아 남부의 도시 유적. 사란더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부트린트 호수와 아드리아해의 연결부에 위치한다. 그리스와의 국경과는 5km도 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섬이었으나 현재는 반도로 이어져 있고, 서쪽에 그리스령 코르푸 섬과 마주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에페이로스 북부 지역의 중심 도시였으나, 1798년 알리 파샤의 포위 후 버려졌다.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에피로스 친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오스만 제국 등 다양한 시기의 유적이 공존하는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003년에는 일대의 습지와 호수가 람사르 습지에 등록되었다.

2. 역사

파일:부트린트 아고라.jpg
아고라 & 아스클레피온 일대
파일:부트린트 4.png
헬레니즘 시기 극장 유적

기원전 7세기부터 그리스계 카오니아 인들이 정착해 마을이 있었고, 코린트 인들의 식민 도시인 코르키라 (코르푸)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베르길리우스에 따르면 트로이 국왕 프리암의 아들이자 예언가인 헬레누스가 부트론톤을 세웠고, 아이네이아스가 방문했다 한다. 부트론톤은 그리스 문명과 외부를 잇는 거점이자 그리스 본토와 마그나 그라키아 (남부 이탈리아) 간의 교역로 상에 있어 중시되었고, 온케스모스 (현 사란더)와 함께 카오니아 지역의 양대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 기원전 5세기 들어 언덕 위의 아크로폴리스가 확장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 코르키라 측이 서북쪽의 크사밀에서 부트론톤까지 성벽을 세우며 일대를 복속시켰다.

기원전 4세기 무렵 도시에는 극장과 아고라, 스토아, 아스클레피온 등이 있었고 아크로폴리스는 삼각꼴의 성벽으로 둘러졌다. 기원전 380년 경에는 둘레 870m에 사자 문과 스케아 문 등 5개의 성문을 지닌 외성이 둘러졌고, 시가지를 방어하기 위한 성벽도 추가되었다. 기원전 3세기에 코르키라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부트론톤의 카오니아 인들은 프로스타테스 (집정관)를 매년 선출해 지도자로 삼았다. 기원전 228년, 부트론톤은 코르키라와 함께 로마에 복속했고 라틴식 표기인 '부트로툼'이 통용되었다. 기원전 2세기 들어 일대는 마케도니아 속주에 편성되었고,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부트로툼을 함께 내전을 치른 퇴역병들을 정착시킬 식민도시로 지정했다.

다만 현지 지주인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가 지인인 키케로에게 항의했고, 후자가 원로원에서 반대 운동을 벌인 끝에 소수의 퇴역병만이 부트로툼에 정착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아우구스투스는 부트로툼에 대대적으로 퇴역병들을 정착시켰다. 그들은 수도교, 목욕탕, 포룸, 님파이온 (분수대), 주택 등을 세우며 시가지를 2배로 확장했다. 번영하던 도시는 3세기에 지진으로 포룸이 붕괴하는 등 큰 피해를 겪었고, 이후 쇠퇴했다. 다만 도시로는 이어졌고, 425년경에는 현지 귀족의 저택인 트리콘크 궁전이 세워졌다. 5세기 말엽 성벽이 보강되었고, 6세기 후반 들어 슬라브인들이 근교에 정착했다. 부트로툼은 에피로스 지방에서 주교구가 계속 이어진 몇 안되는 도시였다.

2.1. 중세

파일:바실리카 부트린트.jpg
6세기에 세워진 바실리카 유적
파일:부트린트 6.jpg
6세기에 세워진 세례당 유적

6~9세기 무렵 부트로툼 혹은 부트로토스는 동로마 제국 하에서 해양 교역으로 번영했고, 여러 성당이 세워졌다. 9세기 초에는 미하일 1세 랑가베스 황제가 성벽을 보강했다. 부트로툼의 주교구는 니코폴리스 (나프팍토스) 대주교구에 속했다. 1081년에는 로베르 기스카르노르만 군대가 일시 점령했다. 12세기의 지리가 알 이드리시는 부트로툼이 여러 시장을 가진, 인구가 밀집된 도시라 묘사했다. 디라히온과 함께 노르만 족의 시칠리아 왕국을 방어하는 동로마 제국의 해안 거점으로써 중시되던 부트로툼은 1204년 4차 십자군 이후 에피로스 친왕국령이 되었다가, 1259년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펠라고니아 전투 패배로 잃은 왕국을 되찾고자 시칠리아 왕국만프레디와 혼인 동맹을 맺으며 할양했다. 1267년에는 만프레디를 죽인 나폴리 왕국카를루 1세 (샤를 드 앙주)에게 넘어가 더욱 요새화되었다.

카를루 1세는 별도의 알바니아 왕국을 세워 부트로툼을 포함시켰다. 1274년 동로마 제국이 도시를 재점령했으나, 에피로스의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는 카를루 1세와 연합해 1278년 재점령했다. 다만 이듬해 압박 하에 니키포로스는 블로러 ~ 부트로툼 해안을 나폴리에 넘겼고, 도시는 '부트린토'로 표기되었다.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가 알바니아 대부분을 재정복한 후로도 부트린토는 코르푸와 함께 나폴리 령으로 남았으나, 1292년 에피로스 령으로 환원되었다. 다만 1294년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나폴리와 혼인 동맹을 맺으며 다시 일대를 할양했고, 그 직후 테살리아 왕국이 일시 점령했으나 물러났다.

1305년 에피로스의 토마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가 부트린토를 또다시 점령했으나 이듬해 휴전을 맺으며 철수했다. 1313년 부트린토는 마지막으로 에피로스 령이 되었다가, 1331년 고티에 드 브리엔의 아테네 공국 원정을 틈타 나폴리 령으로 돌아왔다. 40여년간 10번 넘게 주인이 바뀌는 혼란을 겪은 도시는 인구 감소를 겪으며 쇠퇴했고, 시가지는 옛 아크로폴리스 쪽의 성채로 축소되었다. 1337년 경에는 정교회 주교가 동남쪽 파르가 인근의 글리키로 이주하며 라틴 가톨릭 주교구가 들어섰다. 반세기 가량 안정을 유지하던 부트린트는 1380년 나바라 용병대에게 점령되었으나, 코르푸 귀족 리카르도 알타빌라가 수복해 나폴리 왕국에 환원시켰다.

2.2. 베네치아 공화국

파일:부트린트 성채.jpg
해협 건너편에 세워진 새 성채
파일:2011_Butrint,_Wieża_wenecka_01.jpg
부트린트 성채 밑에 세워진 베네치아 성탑

14세기 중반, 조반나 1세 여왕의 치세에 나폴리 왕국은 같은 앙주 왕가이자 그녀의 6촌인 헝가리 왕국러요시 1세에게 3차례 침공을 당하며 약화되었다. 1381년, 결국 조반나 1세는 폐위되었고 6촌이자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은 카를로 3세가 즉위했다. 다만 얼마 후, 러요시 1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헝가리 왕위를 노린 카를로 3세는 1385년에 카로이 2세로 즉위했으나 이듬해 2월에 암살되었다. 그리고 나폴리 왕국에서는 카를로의 어린 아들 라디슬라오가 계승하는 혼란기에, 사실상 자립한 코르푸의 귀족들이 베네치아 공화국에 항복하자 1380년 이래로 사실상 코르푸에 종속되어 있던 부트린트 역시 함께 베네치아 령이 되었다.

다만 베네치아 상인들은 코르푸를 주로 왕래했기에 부트린트는 군사 거점만으로 이어지며 더욱 쇠퇴했고, 15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이 내륙을 전부 장악하며 고립되었다. 1572년에는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으로 사실상 버려졌고, 베네치아 당국은 물길 건너편에 새로 삼각 형태의 요새를 세워 수비대 외에는 소수의 어부들만 상주시켰다. 1655년과 1718년에 오스만 군대가 일시적으로 부트린트를 장악했으나 베네치아 군이 수복했고, 일대에서 잡히는 물고기는 코르푸로 수출되었다. 그외에 올리브, 목재, 가축 등이 생산되어 얼마 안되는 주민들의 경제적 안정을 책임졌다. 1797년, 베네치아가 멸망하자 코르푸를 포함한 모든 옛 베네치아 영토는 프랑스 령이 되었다.

2.3. 알리 파샤의 점령 (1798년)

파일:알리파샤 부트린트.jpg
파일:알리 파샤 부트린트.jpg
알리 파샤가 코르푸와 부트린트 사이의 섬에 세운 요새

18세기 후반부터 야니아 (요아니나) 총독을 맡으며 그리스 서부의 실권자로 군림하던 알리 파샤는 막 주인이 바뀐 베네치아령 에피로스 해안 (부트린트, 파르가, 프레베자, 레프카다)을 노렸다. 그는 부트린트의 서쪽 하구에 요새를 세워 일대를 봉쇄했고, 프랑스 측은 알리 파샤를 회유해 술탄에게 반기를 들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798년 10월 18일, 알리 파샤는 2만 대군과 함께 부트린트를 공격했다. 루이 프랑수아 장 샤보가 이끄는 수비대는 일주일간 저항했으나, 한계에 몰리자 성채를 폭파시키고 주민들과 함께 코르푸로 철수했다. 뒤이어 프레베자를 점령한 알리 파샤는 이듬해 러시아 군과 함께 코르푸까지 공동 점령했다. 한편 프랑스 군의 철수 당시 파괴되고 버려진 부트린트는 폐허로 남은 채로 한세기 가량 오스만 령으로 남았다. 그동안 기존의 섬은 반도가 되었고,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습지대로 둘러싸였다.

2.4. 근현대

1913년, 1차 발칸 전쟁 후 일대는 그리스 왕국령이 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반발하며 런던 조약에서 알바니아 공국령으로 지정했고, 현지 그리스계 주민들이 에피로스 자치 공화국을 세웠다가 6개월만에 해산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군정을 거쳐 1920년에 알바니아령으로 확정되었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도시는 재건되지 않았고, 북쪽의 크사밀에 새로운 도시가 세워졌다.

3. 볼거리

파일:부트린트 1.png
유적지 전반부
파일:부트린트 석상.jpg
조각상 머리 부분과 바다 방면
파일:부트린트 11.jpg
호수와 맞닿은 성벽
파일:부트린트 극장2.jpg
파일:부트린트 극장.jpg
  • 헬레니즘 시기 극장
    기원전 3세기 경에 세워졌고, 로마 시대에 증축되었다.

파일:부트린트 10.jpg
파일:부트린트 성벽.jpg
  • 아크로폴리스 성벽
    기원전 5세기 경에 세워진 성벽으로, 정문에는 뿔이 달린 소가 조각되어 있다.

파일:부트린트 목욕탕 1.jpg
파일:부트린트 목욕탕.jpg
  • 로마 시대 목욕탕

파일:부트린트 7.jpg
파일:부트린트 세례당.jpg
  • 로마 시대 세례당

파일:부트린트 저택 2.jpg
파일:부트린트 저택.jpg
  • 로마 시대 저택

파일:부트린트 12.jpg
파일:부트린트 9.webp
  • 바실리카 (성당)

파일:부트린트 성.jpg
파일:부트린트 8.jpg
  • 부트린트 성채

파일:부트린트 성채 2.jpg
파일:부트린트 성채 1.jpg
  • 베네치아 성채

파일:부트린트 베네치아 탑.jpg
  • 베네치아 성탑


[1] 오래된 도시 부트린트의 자연 환경 변화로 인해 주민들은 중세 시대 말에 이 지역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는 이 고고학적 유적이 현대의 알바니아 영토에 있었던 고대 및 중세 문명에 대한 귀중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