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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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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주요부와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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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의 가옥들

1. 개요2. 역사
2.1. 베네치아 공화국령 (1401 ~ 1797)2.2. 프랑스 / 영국의 지배 (1797 ~ 1819)2.3. 오스만 제국기 (1819 ~ 1913)2.4. 근현대

1. 개요

그리스어 Πάργα
영어 Parga

그리스 서북부의 도시. 이구메니차프레베자 사이의 해안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4천명이다. 암벽 해안 사이의 모래 해변과 전통 가옥 등이 아름다워 교통 요건이 열악함에도 관광지이다. 역사적으로는 중세 말엽 15 ~ 18세기에 걸쳐 베네치아 영토로써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오스만 제국 지배를 적게 당한 곳이고, 동시에 오스만 대재상 파르갈르 이브라힘 파샤의 고향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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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의 전통 가옥들

고대에는 인근에 테스프로티아 인들의 도시인 토리네 (Τορύνη)가 있었고,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함대가 악티움 해전 전에 거쳐간 곳이다. 11세기 무렵부터 현 성채 위치에 요새가 세워졌고, 13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이 재건했다. 파르가 도시 자체는 1318년에 에피로스 친왕국령으로 처음 언급되었고, 지명은 슬라브 어원일 것으로 추정된다. 1320년 에피로스 친왕 니콜로 오르시니동로마 제국에 대한 지원을 대가로 베네치아에게 파르가와 일대의 사탕수수 농장을 넘기려 했으나 불발되었다. 1337년 일대는 동로마 령이 되었고, 1338-39년 에피로스 반란 시에도 파르가는 동로마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다만 1347년 세르비아 제국령이 된 것을 시작으로 시메온 우로시를 거쳐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가 에피로스 친왕국 령으로 수복했으나, 1390년대에 알바니아계 국가인 아르타 친왕국 령이 되었다. 이 무렵 진 부아 슈파타가 임명한 파르가 태수 본코는 코르푸와 남쪽 파나리 해안을 장악한 베네치아에 복속했는데, 진 부아 슈파타의 사후 1400년에 아르타를 장악하며 일시적으로 에피로스 북부를 통치했으나 축출되었다. 이후 주민들은 본코를 추방하며 베네치아에 보호를 요청했다.

2.1. 베네치아 공화국령 (1401 ~ 1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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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가 성채

베네치아는 코르푸 총독 하에 파르가를 관장했고, 성주를 두었다. 15세기 중반 들어 알바니아-에피로스를 평정한 오스만 제국은 자주 파르가를 습격했고, 1452년에는 마침내 점령해 성채를 일부 허물었다. 1454년에 파르가를 탈환한 베네치아는 도시에 10년 면세를 주었다. 당시 파르가에는 유대인 주민도 있었고, 15세기 말엽 오스만 측에 잡힌 테오가 후일 파르갈르 이브라힘 파샤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브라힘 파샤의 처형 1년 후인 1537년에는 하이레딘 파샤의 오스만 해군이 파르가를 일시 함락, 파괴와 방화를 자행했다. 한편 16세기 중반에 파르가의 베네치아 당국은 북쪽 마르가리티 (마르글르츠)의 알바니아 베이들과 두 도시 사이의 농토를 두고 대립했다. 1558년 파르가 서북쪽 아기아의 기독교에서 개종한 시파히 장교가 파르가를 습격했다. 1570년에는 그리스 민병대장 엠마누엘 모르모리스가 파르가를 기반으로 베네치아 지원 하에 마르가리티를 제외한 에피로스 북부 해안을 장악했으나 진압되었다. 베네치아 당국은 레판토 해전 직후인 1572년에 파르가 성채를 대대적으로 중수했다. 1640-42년에는 마르가리티 베이들이 파르가를 매우 자주 습격하여 베네치아 대사가 오스만 조정에 항의할 정도였다. 4세기 가까이 베네치아 령으로 유지되던 파르가는 1797년 베네치아의 멸망과 함께 프랑스 령이 되었다.

2.2. 프랑스 / 영국의 지배 (1797 ~ 1819)

파르가를 접수한 프랑스는 알바니아 부대를 창설했고, 프랑스령 에피로스 해안을 노리던 알리 파샤를 공격할 것을 고려했으나 그를 적대하는 마르가리티의 지주 하산 자파리를 후원하는 것에 그쳤다. 1807년 하산 자파리는 영국 해군이 파르가를 위협한다며 러시아의 개입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1812년, 알리 파샤의 조카 다우트 베이가 파르가와 가까운 아기아를 점령한 후 주민들을 죽이거나 노예화했다. 이후 다우트 베이느 파르가를 포위했으나 도중 전사하며 실패했다. 1815년 프랑스 제국이 붕괴되자 파르가 주민들은 봉기하여 주둔군을 축출하고 영국의 보호령이 되길 청했다. 하지만 영국은 1819년 알리 파샤에게 돈을 받고 도시를 넘겼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코르푸 등지로 떠났고, 파르가는 더이상 클레프트와 술리오트 등 반오스만 세력들의 보금자리로 기능하지 못했다. 따라서 오스만 령이 되었을 때에 파르가는 거의 빈 도시였다.

2.3. 오스만 제국기 (1819 ~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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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 파샤는 차메리아의 알바니아 인들을 파르가에 정착시켰다. 이어진 그리스 독립 전쟁 시에 파르가는 고립되었고, 1821년 현지 출신의 술리오트 부대가 도시를 공격했다. 전후 1830년에 대재상 레쉬드 메흐메드 파샤 (쿠타히)가 일대의 안정을 회복한 후 떠난 주민들에게 귀환을 권유하고, 1831년에는 모레아에서 축출된 무슬림 난민들을 정착시키며 파르가는 기존 도시 규모를 회복했다. 파르가엔ㄴ 그리스 영사관이 있었고, 1877년 자체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도 365 가구와 무슬림 180 가구가 거주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종교와 민족에 상관없이 대부분 그리스어롤 사용했고, 일부만 알바니아어를 주 언어로 썼다.

2.4. 근현대

1913년 1차 발칸 전쟁 시에 파르가는 그리스 령이 되었고, 1924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11년 전 오스만 시민권을 선택했던 1500명의 알바니아 주민이 터키로 이주되었다. 이후로도 알바니아 인들의 강제 이주가 계속되자 1927년 무슬림 20 가구가 파르가에 남아있게 해줄 것을 탄원했고, 국제연맹은 이들의 정주를 결정했다.

1941년 이탈리아 군의 점령 후, 1943년 8월 독일 주둔군은 '아우구스투스'라 불린 그리스 저항군의 습격을 받자 누리 디노와 압둘 카심 휘하의 알바니아 부대를 조직해 그리스 마을들에 대해 방화와 살해를 벌였다. 이에 우익 저항군인 EDES가 누리 디노와 만나 무장해제 및 복속을 요구했으나 거절되었고, 1944년 6월 28일에 파르가를 점령한 EDES는 52인의 알바니아 주민을 처형했다. 7월에는 좌익 저항군인 EAM이 40인의 알바니아 주민이 처형했고, EDES의 제지 후에야 보복을 멈췄다. 전후 알바니아계 참 부족은 알바니아로 떠났고, 파르가 인근 및 산지에만 술리오트 등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