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3-30 16:10:59

서창석(1892)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서창석
徐倉錫[1]錫으로 기재하고 있으나, 1925년 3월 13일 수형인명부 등 독립운동 관련 행형기록물과 1924년 12월 7일 시대일보 기사, 이천서씨병부상서공파보 권4 295쪽 등 여러 자료에서 모두 徐倉錫으로 기재하고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추강(秋崗)
본관 이천 서씨[2]
출생 1892년 10월 25일
전라도 나주목 암태도 오산리
(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 993번지)
사망 1953년 3월 10일 (향년 60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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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2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유공자 서상렬은 조카이고[3], 서태석은 7촌 재종질(再從姪)이다.

2. 생애

1892년 10월 25일 전라도 나주목 암태도 오산리(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 993번지)에서 아버지 우정(又亭) 서진현(徐珍鉉, 1860. 6. 26 ~ ?)[4]과 어머니 밀양 박씨(1855. 2. 6 ~ 1895. 6. 21)[5] 사이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6] 이후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 989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고, 암태면 도창리에 거주하기도 했다.

1923년 12월 고향 무안군 암태면에서 암태도소작인회 위원장에 취임했고, 서태석과 함께 지주들의 부당한 소작료 징수에 저항하여 소작료 저감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4년 7월 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 바 소요상해 혐의에 대해 구류갱신 처분을 받았고, 1924년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 바 소요 및 상해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목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에 공소하여 서태석·손학진(孫學振)·김연태(金淵泰)와 함께 대구복심법원에 송치돼 있던 중, 11월 11일 보석으로 출옥했다.

1924년 12월 22일 암태공립보통학교에서 개최된 암태청년회 임시총회에서 암태청년회가 기존의 회장제를 위원제로 개혁하자 박복영(朴福永)은 위원에, 서창석은 서태석·손학진·김연태·박응언(朴應彦)·박용규(朴用産)·서동오(徐東五, 1896. 5. 14 ~ 1980. 3. 22)[7]·손길언(孫吉彦)·박종식(朴鍾植)·김상규(金相奎)·강봉춘(姜奉春)·김정순(金正順)·조군명(曺君明)·서병석(徐邴晳, 1902 ~ 1931. 11. 7)[8]·서동수(徐東洙)·박재일(朴在一)·손채옥(孫采鈺)·김문일(金文一)·김문철(金文喆)과 함께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1월 17일에는 김문일과 함께 암태도 동부에 거주하는 천병래(千炳來) 등 10여 명의 청년들을 독려해 암태도에 사립학교를 세울 교육비를 징수해 중앙교육기관에 납부하도록 했다.

이후 지난 암태도 소작쟁의에 대해 검사 측에서 공소했으나 1925년 3월 13일 대구복심법원[9]에서 이른 바 소요 및 상해 혐의에 대해 공소 이유 없음으로 기각되었고,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까지 했으나 1925년 5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소요 및 상해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불구속처분을 받고 다시 풀려났다.

1926년 7월 23일 개최된 제18회 암태농민조합 집행위원회에서 김상규·박덕용(朴德用)과 함께 모내기 기간에 무리하게 소작료를 질수하려던 지주 천후빈(千后彬)과 소작인을 무리하게 감금한 경관에게 파견할 질문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1926년 9월 무안군 자은면에서 자은도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당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된 소작인들의 석방을 주선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구류 25일을 받기도 했다.

출옥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포목상을 경영했으며, 8.15 광복 이전까지도 일본 제국 경찰의 시찰 대상에 포함되어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10]

이후 1953년 3월 10일 별세했다.

202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독립유공자 공적정보1925년 1월 10일 시대일보 기사에는[2]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익롱공파(益聾公派)-난정공계(懶亭公系) 31세 수(洙) 항렬. 족보명은 서택수(徐宅洙).[3] 서상렬은 서창석의 첫째 남동생 서광수(徐光洙, 1902. 8. 26 ~ 1961. 5. 28)의 장남이다.[4] 초명 서진기(徐珍奇), 자는 문보(文甫).[5] 박학언(朴學彦)의 딸이다.[6] 어머니 밀양 박씨는 아버지 서진현의 첫째 부인이고, 둘째 부인 김해 김씨(1868. 5. 10 ~ ?) 김라율(金羅律)의 딸은 슬하에 서광수 등 2남 3녀를 두었다.[7] 호는 소성(小聲), 족보명은 서기수(徐奇洙), 초명은 서기열(徐奇烈). 서창석과는 30촌 지간이다.[8] 독립유공자 서태석의 동생이다. 이명 서병석(徐丙晳), 서민석(徐岷晳), 족보명은 서상택(徐相澤), 이천서씨병부상서공파보 권4 283쪽에는 1897년 5월 20일생으로 등재돼 있다.[9] 1925년 3월 13일 집행원부에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기재돼 있다.[10] 1945년 3월 생산된 《昭和二十年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쇼와 20년 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에 등재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