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1:44:23

세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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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희정, 김정임, 우윤아.

1. 소개2. 활동 내역3. 그 후4. 근황

1. 소개

1988년에 나왔던 걸그룹. 남성 아이돌 그룹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소방차와 함께 나왔다. 아마도 본격적인 댄스 걸그룹으로서는 한국 최초인 듯하다. 물론 이전에도 바니걸스은방울 자매, 희자매, 서울 시스터즈와 같은 여성 그룹이 있었으나, 이들은 계보상 슈프림즈의 흐름을 따르는 정통 소울 음악 그룹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90년대 이후의 아이돌 그룹들과는 정체성이 달랐다. 따라서 세또래가 아이돌 개념 걸그룹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다.[1]

일본의 3인조 아이돌 그룹 소녀대가 한국과 대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컨셉을 따라해서 만든 걸그룹이었다. 당시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창작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인데다다가 저작권 의식도 희박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외국의 컨셉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심하면 표절도 일삼던 시기였다. 사실 1970년대에는 표절수준을 넘어서 외국 곡을 그냥 가져와서 번안하기도 했었다. 소녀대가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가 하면 한국내에서 해적판 디스크가 난무한 것은 물론이고, 1986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일본 뮤지션으로서는 드물게 한국 내 공연[2]을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인기의 절정이었던 곡이 소녀대 최후의 히트곡이라고 불리는 KOREA인데[3], 원곡보다 소녀대 버젼이 더 알려지면서 이 당시에 소녀대의 열풍은 엄청났다.

재미있는 것은 원래 소녀대도 쟈니스 소속의 남성 아이돌 그룹 소년대를 모티브로 등장한 그룹이라는 것,[4] 그리고 1990년에는 대만에서도 이름도 똑같은 소녀대라는 이름의 3인조 그룹이 등장했다라는 것이다. 이 그룹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바로 비비안 수.

2. 활동 내역

1988년 1집, 1989년 2집을 냈다. 멤버는 이희정, 우윤아, 김정임으로 그 당시로서는 걸그룹 다운 상큼한 외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당시는 댄스음악이 가요계의 주류는 아니었고,[5] 거기다 여고생 취향의 소방차와는 달리 걸그룹을 선호할 만한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아서 그저 2군급 가수 정도의 명성밖에 얻지 못 했다. 주로 전국 노래자랑이나 주택복권 추첨 프로그램의 곁다리 공연으로 자주 나왔으며, 라이브는 한 번도 하지 않고 립싱크로만 했다.



참고로, 1집 타이틀곡인 <그대를 사랑해>를 작곡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인순이가 1983년에 발표한 <밤이면 밤마다>를 작곡했던 김정택이었다.

데뷔하자마자 소방차를 따라한다는 이유로 소방차 팬들에게 찍혀서 욕을 많이 먹었다.[6] 그때 당시에는 시덥지 않은 꼬투리를 잡아가며 타 가수를 비난하는게 가요계에선 일상이었다. 대표적으로 강수지심신하고 열애한다고 소문이 나서 심신 팬들에게 시달림을 당했었고, 이지연도 소방차 멤버인 이상원과 사귄다고 소문이 나서 소방차 팬들에게 괴롭힘을 받았으며, 베이비복스의 멤버인 간미연H.O.T.의 멤버인 문희준과 사귄다고 소문이 나서 살해 협박 편지까지 받았었다. 사실상 거의 모든 가수가 욕을 먹었다. 그나마 자유로웠던 사람이 김완선안혜지 정도였다. 김완선의 경우 매니저 담당을 하던 이모가 다른 남성 연예인들과 대화 자체를 못하게 차단했기에 열애설이 날래야 날 수가 없었고,[7] 안혜지는 이쁜 외모와 달리 동남 방언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깬다는 이유로 말 자체를 거의 못 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가요톱10과 같은 쇼 프로그램에도 나오긴 나왔다. 당시 전국노래자랑 초대가수는 지금과 달리 이지연 같은 신세대 가수도 많이 나왔었다. 이후 김정임이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해체되었다가, 이희정과 우윤아가 1990년대 초반에 남성듀오<도시의 아이들>의 김창남이 운영하는 소속사로 옮겨, 탐탐이라는 듀엣에서 각각 이지수와 김현지라는 예명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앨범 링크 타이틀곡 '얘기하지 그랬어' 와 후속곡 '난 참 바보야'[8] 두 곡 모두, 리드미컬한 리듬이 인상적인 김창남 작곡.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각자의 길을 걸었고, 이희정은 이지수라는 예명으로 1993년에 솔로앨범을 냈다. '날 잊었을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작곡가이자 가수로 활동했던 안진우가 만든 발라드 곡이다. 링크 이 때부터 DR뮤직 소속이었다.[9] 1994년 다음 해에도 2집을 발매했는데, '너를 보내며'라는 곡에는 가수 강수지가 작사가로 참여하여 화제가 되었다. 영상링크 베이비복스로 활동했던 모습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자켓이 지금에서 보면 꽤 인상깊게 다가올 수도. 다만, 이지수라는 이름으로 나온 두 장의 앨범은 현재 구하기 꽤 힘들며, 인터넷에도 정보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3. 그 후

멤버 중 한 명인 우윤아는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에 출연하면서 배우 활동도 했다. 그러나 우뢰매 이후에 영화에 출연한 적은 없다.

놀랍게도 이희정은 5년 후인 1998년 이가이라는 예명으로 베이비복스 2집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고.

몇 년 뒤 우윤아는 은퇴한 연예인들의 근황을 취재한 연예가 중계 방송을 통해 언젠가 셋이 다시 뭉쳤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지만, 나이도 적지 않은 데다 이희정은 2022년 모 유튜브에서 진행한 근황 인터뷰에서 자신은 그냥 잊혀진 채로 주부로만 살고 싶다고 하였기 때문에[10] 재결합은 요원해보인다. 이렇게만 하면 별 크게 안 느껴질텐데, 이들은 2022년 기준 50대 중반이다.[11]

여담으로 당시 "별난 여자"라는 개그코너의 호스트였던 박미선이 "세또라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바람에, 진짜 명칭보다 이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곤 했다.

4. 근황

김정임의 근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우윤아의 근황만이 그나마 잘 알려져있는데, 그 당시에도 미모로 화제가 되었고, 탐탐에서도 "아! 예쁜 멤버 한 명 있었던 그 그룹?"이였다고 하면 다들 알 정도다. 한참 전 일이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연예가 중계에서 은퇴한 연예인들을 취재했을 때 인터뷰에 응하기도 했고, 최근의 근황을 보면 50대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미인이시다. 뮤지션 출신 남편 이종철[12]과 결혼해서 남양주시 별내동에서 자동차 테마 카페를 22년째 운영 중이라고 한다. 근데, 가보면 입구에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VT라던가, 포르쉐 996 GT3라던가, 뷰익 포뮬러 F2가 있을 정도로 비범하다. 심지어 개인 자격으로 으로 서울오토살롱에 참가하기까지 했다.

이희정의 경우, 아는 형님에 베이비복스 출신의 이희진이 출연했을 때 희철"예전에 이희정 누님 계셨었는데. 세또래 누님인가?"라고 언급하자 이희진은 "2집 때. 야야야 때."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희정의 나이까지 물어보자 이상민"어우 나이 많으셨지."라고 얘기한다. 강호동은 베이비복스에 자기 또래가 있었다는 사실에 실로 경악했는데, 이희정은 1968년생이라 1970년생인 강호동 보다도 2살이나 많다(...).

어떤 영상의 댓글 중 본인이 이희정의 지인이라는 사람의 댓글로 근황과 뒷이야기가 밝혀졌다. 2022년 9월 21일 시점에서 그 댓글은 삭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가이 문서의 여담 참조.


[1] 어떻게 보면 세또래의 결성은 kpop이 일본 아이돌들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고 의식했다는 점, 또 세또래가 가요계 1군으로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에 의해 kpop이 일본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을 상징해주는 그룹이기도 하다.[2] 국제가요제라는 명목도 있고, 당시에 일본어가 지상파를 탈 수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순수하게 영어로 노래를 불렀다.[3] 사실 이 곡은 소녀대의 대부분 곡들과 마찬가지로 리메이크 곡이었다. 세계적인 디스코그룹 징기스칸의 리더 레슬리 만도키와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 혼성그룹 뉴튼 패밀리의 리드 싱어 에바 선이 서울 국제가요제 참석의 감상을 담아서 곡을 만들어서 공동 발표한 곡으로,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대표하는 곡으로 세계에 알려진 곡 중 하나였다. 여담으로 이 곡을 만든 만도키와 선은 결혼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에바 선(체프레기 에바)은 에든버러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밥 히틀리(Bob Heatlie)와 결혼했다. 그들이 결혼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은 당시 우리 정서로는 연예인 같은 공인들이 대중 앞에서 공개 연애를 한다는 것은 약혼과 같은 의미였고, '한국 찬가'를 부른 이들의 노래를 대대적으로 홍보한 정부의 노력(...) 덕분이다. 이 곡은 가수 박혜령이 한국어 버전으로 불렀다.[4] 이 소년대의 직접적 영향력과 소녀대의 간접적 영향력을 받아서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보이밴드 취급을 받는 소방차이다.[5] 이 문서에도 소방차, 김완선, 안혜지, 이지연 등이 언급되는 등 당시에도 댄스가수들은 인기가 있었다. 댄스가 완전히 주류가 아니었다는 것일 뿐이였다.[6] 공교롭게도 멤버 이희정이 후에 소속되었던 베이비복스도 초창기 시절 H.O.T.를 따라한다는 이유로 H.O.T. 팬들(Club H.O.T.)에게 찍혀서 협박 편지를 받는 둥 수난을 당했었다.[7] 훗날 불타는 청춘 같은 예능에 나오는 건 꿈도 못 꿨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 다 하는 연애도 그렇게 많이 못 해봤다고 토로할 정도.[8] 1994년에 반혜진이라는 가명으로 트로트가수 김서영이 20대 초반에 낸 앨범에서 한 차례 리메이크되었다. 탐탐 앨범에도 수록되어 있는 '하지만'이라는 곡은 이지연 3집에 먼저 수록되었는데, 이지연이 직접 작사했고 김창남이 작곡한 곡인데 김창남이 곡을 아까워 해서 두어차례 리메이크를 한 듯 하다.[9] 이때 매니저도 윤등룡 대표가 직접 맡았다고 한다.[10] 이희정은 2010년 쯤 산악회에서 만난 사람과 재혼을 했다고 한다.[11] 또한 냉정하게 말해서 이들이 가요계에 남긴 업적은 현재 아이돌 걸그룹의 효시 정도밖에 없다. 이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무대나 방송에 이벤트성으로 한 번씩 복귀하는 여가수들도 몹시 많긴 한데 그 사람들은 자타가 생각해도 어느 정도 업적, 명곡,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되고 그렇기에 당시 세대들에게 팬층도 있었고 보편적인 공감과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이들도 좋게 추억하는 사람들이 꽤 많지만 사실 이들보다도 더 반향이 적었던 수많은 가수들이 있는데 그런 가수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자면 세또래는 그런 가수들보다는 좀 괜찮지만 막 돌아올 정도는 아닌 애매한 지점에 걸쳐 있다고는 할 수 있다.[12] 이 분도 80년대에 앨범 두 장 냈던 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