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
청주 제남군 사람으로 어렸을 때 왕화평을 따르면서 경사에 이르렀는데, 왕화평이 죽자 그를 장사지내고 책 백여 권과 약 수 포대를 장송하는 것에 사용했으며, 손옹은 하영에게서 시해[1]에 대해 듣고 보서와 선약을 얻지 못했음을 한스러워했다.
시랑을 지내고 환계가 죽자 문제가 환계의 부인 복씨를 손옹의 후처로 삼으려 했지만 싫어하면서도 명을 거부하지 못하다가 둘째 딸인 손씨의 권유로 환계가 동료라는 이유로 거절하자 문제는 칭찬하는 상소를 올렸다.
황초 연간에는 발해태수가 되었고 225년에 진류태수를 지내면서 문제가 오나라를 정벌하려다가 실패하고 수춘에서 돌아와 진류군의 경계 지역에 주둔하자 손옹은 문제를 보고 나가서 포훈을 방문했으며, 군영의 보루가 완성되지 않아 표지만 세우고 정식으로 된 길로 가지 않았다.
유요가 심문하려 하자 포훈은 보루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용서하고 문제삼지 않도록 했으며, 군사가 낙양으로 돌아가자 유요가 죄를 지어 포훈이 면직시킬 것을 상주했다가 유요가 손옹의 일을 불문에 붙인 것을 상주했고 이 일로 포훈이 처형되었다.
237년에 노육이 시중에서 이부상서로 옮기면서 명제가 후임을 추천하도록 하자 손옹이 추천되어 시중이 되었다. 241년에 도구일, 맹관, 왕기와 함께 관녕을 추천하는 상소를 올렸다.
노육의 후임으로 이부상서가 되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광록대부, 태사령이 되었고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정충, 조희, 순의와 함께 논어의 주석 중 훌륭한 것을 모아 논어집해를 저술했다.
후에는 건덕정후에 봉해졌다.
[1] 도사의 영혼이 신선이 되고 신체만 세상에 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