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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양주 송씨[1]# |
출생 | 1906년 10월 12일 |
경상북도 영천군 호문면 웅곡동 (現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토계마을)[2] | |
사망 | 1974년 7월 12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20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송영호는 그의 형이다.
2. 생애
송재호는 1906년 10월 12일 경상북도 영천군 호문면 웅곡동(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토계마을)에서 아버지 송인상(宋仁相)과 어머니 류하회(柳河回)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4년 중화민국 베이징으로 건너가서 북경학원(北京學院) 중등과에 입학하였고, 1925년 6월에 졸업하였다.그는 북경학원 졸업 후 1925년 6월 당시 제2유림단(儒林團)의 핵심인 형 송영호가 무관학교 설립자금 모집을 위해 귀국하자, 함께 활동하면서 본인 소유의 논 1,300여 평을 매각한 대금 600원을, 형을 통해 김창숙에게 군자금으로 송금하였다.
그러나 열차를 타고 경기도 경성부에서 고향 영주군으로 돌아오던 도중, 1926년 4월 15일 상주역에서 형 송영호로 오인한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상주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 뒤 상주경찰서와 영주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뒤 본가로 돌아와 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그 사이 1926년 2월 말 임신 중이던 부인 유임이(柳任伊)도 일제 형사들의 고문으로 인해 그해 3월 3일 임신 9개월 차의 태아를 조산하고 3월 6일 옥사했다.
1927년 9월 영주군의 신간회 영주지회 회원 및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 집행위원으로 항일의 선봉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3월 7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국내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이듬해인 1931년 중화민국 동삼성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얼마 뒤 봉천성 안동현(安東縣)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개월간의 구류처분을 받기도 했다.
출옥 후에는 귀국하여 경기도 경성부 팔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팔판동) 등지로 이주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4년 7월 12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송재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5년 10월 28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