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4:53:08

알프레트 폰 슐리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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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1900년~1913년의 독일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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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육군 원수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
Alfred Graf von Schlieffen
파일:external/media-1.web.britannica.com/26404-004-A368B9FF.jpg
이름 Alfred Graf von Schlieffen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1]
출생 1833년 2월 28일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913년 1월 4일 (향년 79세)
독일 제국 베를린
복무 프로이센 왕국군 (1853 ~ 1871년)
독일 제국군 (1871 ~ 1906년)
최종 계급 육군 원수(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주요 서훈 검은 독수리 훈장
붉은 독수리 훈장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군생활
3. 전략가로서의 슐리펜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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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귀족백작이자 군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독일 제국군의 군인으로 최종계급은 원수이다. 독일 제국군의 참모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슐리펜 계획으로 유명하다.

2. 생애

2.1. 초기

슐리펜은 프로이센 왕국귀족 가문이자 많은 군인들을 배출한 전통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에서 태어났지만, 슐레지엔에 있는 고향에서 살았으며 1842년에 학교로 인해 고향을 떠났다.

슐리펜은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으며 처음에는 군대에 입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1853년 군에 입대하게 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사병 복무보다는 직업으로서의 장교 복무를 선택하였다.

2.2. 군생활

1858년, 슐리펜은 프로이센 전쟁 대학에 입학하였고 높은 성적을 거두며 좋은 참모장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1861년 전쟁 대학을 우등 졸업하였다.

1865년 슐리펜은 우수한 성적으로 인해 총참모부 전장 지형 연구 담당에 속해 있었지만 전쟁이 발발하면서 주로야전 기병대에서 활동하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에는 쾨니히그레츠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그 전투에서 포위전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도 종군하여 루아르 계곡에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군공을 세웠다. 이후 바덴 공작 프리드리히 1세 눈에 들어 그의 전속 참모로 활약 후 소령으로 진급하였으며 곧 승진하여 중령, 대령 시절 제1기병 후사르 연대장 등을 역임하고 군부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당시 군부 내 최고 권위자였던 헬무트 폰 몰트케, 알프레트 폰 발더제에게 크게 인정받아 총참모부로 전출되어 서부 권역 전쟁 전략 담당 등을 역임하고 몇년동안 이들 밑에서 함께 일하며 착실하게 후일 발생 가능성 있는 전쟁 전략을 준비했다.

1886년 12월 4일, 슐리펜은 소장으로 진급하여 동-서부 양면전쟁 계획 등을 고안하였고 몰트케가 전역한 뒤 발더제가 참모총장이 되며, 1888년 12월 4일 중장으로 진급한 슐리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참모본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93년 1월 27일에는 기병대장이 되었다.

이후 발더제가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자 슐리펜은 그의 후임으로 독일 제국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는 참모총장으로서 슐리펜 계획을 도입하고 1866년 까지 독일 제국군 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총참모부의 수장이자 일인자로 남았다.

하지만 슐리펜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에서 헤레로족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트로타에게 헤레로족의 진압을 명령하였다. 군부는 독일인들에게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정당화하였으나 그 당시 총리였던 베른하르트 폰 뷜로는 국제적으로 독일 제국이 더더욱 고립될 것을 우려해 참모총장 슐리펜에게 군령의 철회를 요청하였고 슐리펜도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슐리펜은 이 일로 1906년 총참모부 일인자인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육군 원수로서 53년간 군 복무 끝에 예편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전인 1913년 1월 4일,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언은 "오른쪽 날개를 강하게 유지하라"였는데, 자신이 짠 계획과 관련된 유언이었다.[2] 그러나, 그의 후임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는 그의 권고를 무시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를 만들었다.[3]

3. 전략가로서의 슐리펜

슐리펜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는 특히 전략적 통찰력이 뛰어났다. 적군의 움직임을 주시하여 예측하고, 이에 맞춰 독일 제국군의 전략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또한 기동전을 중시했으며, 이를 통해 적을 빠르게 제압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가 주도한 효율적 기동전 개념은 후일 독일군의 전통적인 전술로 자리 잡았고, 이후의 군사 작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슐리펜은 군의 기동성을 극대화하고, 철도 등을 통해 빠르게 군을 투입하어 적을 신속하게 제압하는 전략적 접근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적의 저항이 약한 곳을 집중 공략하여 승리를 거두는 것을 목표로 참모들을 훈련시켰다.

슐리펜은 독일 제국군에 징병제를 부활시켜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더 잘 싸울 수 있게 대비하였으며 대체 부대라는 것을 만들어 야전부대를 지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또한 총참모부를 현대적인 전쟁의 요구에 맞게 개혁했고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독일 제국군의 훈련 프로그램을 개선하는 데 큰 공헌도 하였는데 늘 군사 훈련이 전쟁 준비의 핵심이라고 믿었으며, 독일군이 실제 전투에서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훈련을 체계적으로 개발했다.

참모총장 이전부터 총참모부에서 근무하던 슐리펜은 프랑스 침공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철저한 계산과 분석을 바탕으로 독일 제국 곳곳에 놓인 철도를 통해 기동성을 극대화 하여 사실상 전 유럽을 상대로 하는 슐리펜 계획을 만들었다.[4]

4. 기타

시계마냥 철저하게 시간표대로 생활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새벽녘에 부관과 같이 바깥 순찰을 돌다가 부관이 아침 햇볕에 빛나는 프레겔 강을 보며 감탄하자, 흘끗 쳐다보고는 "사소한 장애물일 뿐!"이라 일갈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영국 사학자 존 키건에 따르면, 슐리펜의 유일한 취미는 밤에 딸들에게 소설이나 동화책이 아니라 군사서적을 읽어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슐리펜은 살면서 두 가지 말을 남겼는데 첫 째는 "전략가는 타고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는 "우리는 살다보면 어디에선가 무엇과 충돌 할 사항이 생기며 이것에 대항하여 이기기 위해 더 강한 사람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적이 우리에 대해 어떤 공격을 선택하든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전을 먼저 선택하는 데 있다."라고 하였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슐리펜'으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유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3]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한스 폰 젝트가 소련과의 전쟁을 조심하라고 권고하였는데, 히틀러는 이를 무시하고 독소전쟁을 일으켜 결국 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였다.[4] 이 작전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개전과 함께 시작되는데, 슐리펜의 후임 참모총장이었던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가 슐리펜의 의도와 다르게 동부전선에 더 많은 사단들을 배치하며 작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