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 Светла́на Ио́сифовна Аллилу́ева | |
출생 | 1926년 2월 28일 소련 모스크바 |
사망 | 2011년 11월 22일 미국 위스콘신주 리치랜드 센터 |
가족 | 아버지 이오시프 스탈린 어머니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이복오빠 야코프 주가슈빌리 오빠 바실리 스탈린 |
국적 | [[소련|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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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Ио́сифовна Аллилу́ева, 1926년 2월 28일 ~ 2011년 11월 22일)[1]는 스탈린의 후처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스탈린 생전에는 바실리 스탈린과 같이 스베틀라나 스탈리나(Светлана Сталина)라고 불렸지만, 스탈린 사후에는 어머니의 성씨인 알릴루예바(Аллилуева)로 바꿨다.2. 생애
어린 시절에는 고명딸이라는 이유로 스탈린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랐고, 성장한 후에는 소련 최고의 대학인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했다. 언어에 재능을 보여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가 매우 유창했고[2], 이를 통해 번역가 겸 교수로 일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처음에는 매우 좋았지만 첫사랑이었던 알렉세이 카플레르와 관련된 사건을 시작으로 점차 틀어졌다. 알렉세이 카플레르는 작가로 스베틀라나보다 나이가 두 배 많고, 유대인인 데다[3] 서방 문물을 밀수해서 즐겨 보는 불온분자였다. 스탈린은 경호대장 블라시크를 통해 딸에게서 꺼지라 경고했지만 카플레르는 강경하게 거절했다.이후 카플레르는 스탈린에 의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종군기자로 파견됐지만 살아돌아와서 다시 스베틀라나와 연애를 했다. 결국 스탈린은 카플레르를 굴라그로 보내버리고, 스베틀라나를 불러 카플레르가 영국 스파이라고 말하며 그동안의 도청기록을 보여주었다. 스베틀라나는 자신은 카플레르를 사랑한다며 울었고, 스탈린은 스베틀라나의 뺨을 후려갈기고 '지금은 전시인데 넌 너무 약해빠졌다'고 비난했다. 스베틀라나는 자서전에서 이때부터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후 스베틀라나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와 연애를 해서 스탈린의 눈밖에 났고 스탈린의 불만을 알아챈 베리야가 세르고에게 "스베틀라나는 너에게 감정이 없으니 접어라."라고 말해 관계가 끝났다. 그 뒤로도 스탈린이 탐탁찮아하던 야코프의 친구 그리고리 모로조프와 만나 결혼했다. 스탈린은 결혼에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사위를 자신의 별장에 초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얼마 안 가 스베틀라나는 모로조프와 이혼했고, 스탈린이 사후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자신의 성인 스탈리나를 어머니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성에서 따온 알릴루예바로 바꾸었다. 이후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 유리 즈다노프와 두 번째로 결혼했으나 자식을 낳고 얼마 안 가 이혼했다.
이후 인도의 공산주의자와 동거하다가 그가 병사하자 각지를 거친 끝에[4] 소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해[5] '나의 아버지 스탈린'이라는 글을 써 큰 돈을 벌고, 세 번째 남편 윌리엄 피터스를 만나 '라나 피터스(Lana Peter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사기와 사업 실패로 인해 재산을 탕진하고, 본인 주장에 의하면 CIA에 의해 감시를 당하는 등 악재가 겹쳐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1984년 두 명의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는 소련으로 다시 귀국해 소련 국적을 회복한 후,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미국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다." 라고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그러나 2년도 못 돼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 말에는 영국에서 잠시 살다가, 말년에는 미국의 위스콘신주의 소도시 리칠랜드센터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해 고립된 생활을 하다 2011년 11월,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3. 여담
아버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으며, 사망 1년 전 미국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어딜 가든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을 남겼다.#국내에서는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반공주의자가 된다"는 말로 유명한데, 이는 거짓으로 실제 스베틀라나가 그런 발언을 했다는 증거는 전무하다.
친오빠인 바실리 스탈린과는 사이가 나빴지만 나이 차가 큰 이복오빠인 야코프 주가슈빌리와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야코프의 아들이자 강경파 스탈린주의자였던 조카 예브게니 주가슈빌리(1936년 ~ 2016년)와는 관계가 그야말로 원수 지간이라 고모 스베틀라나가 죽을 때까지 예브게니는 자신의 고모를 배신자이자 패륜아라고 욕했으며 장례식 참석은 물론이고 추모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1] 공식적으로 알려진 스탈린의 자식 중에서 유일하게 레닌과 아버지가 만든 소련의 끝을 보기도 했다.[2] 한번은 스베틀라나에게 스탈린이 루스벨트가 보내온 편지를 건내주면서 한번 번역해볼 수 있겠냐고 했는데 스베틀라나가 능숙하게 번역하자 스탈린이 놀라면서도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3] 스탈린은 유대인에 관해 차별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4] 이 과정에서 죽은 동거인의 화장한 유골을 갠지스 강에 뿌려주려던 시도가 소련의 눈치를 본 인도 당국에 의해 거부당하고, 로마 등 각지를 전전하면서 살았다. 그 과정에서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각종 종교인과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5]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스베틀라나의 망명으로 스탈린과 가족의 명예와 영향력이 실추되길 바랐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스탈린 격하를 하던 흐루쇼프와 달리 당내 보수파인 브레즈네프는 어느 정도 스탈린을 대우해 준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