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ley Druckenmiller | |
이름 | Stanley Freeman Druckenmiller 스탠리 프리먼 드러켄밀러 |
국적 | 미국 |
출생 | 1953년 6월 14일 ([age(1953-06-14)]세)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 |
학력 | 보든 칼리지 (영문학,경제학/학사) |
직업 | 기업인, 투자자, 자선사업가 |
배우자 | 피오나 빅스[1] |
재산 | 56억 달러 (한화 약 6조 3,300억 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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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3년 6월 14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생 기업인이자 투자자로 듀케인 패밀리 오피스[2]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1988년 조지 소로스가 설립한 퀀텀펀드(Quantum Group of Funds)[3]를 운용해 천문학적인 수익률을 올린 펀드매니저로 조지 소로스, 줄리안 로버트슨, 마이클 슈타인하트와 함께 헤지펀드 업계의 황금기를 이끈 굇수.세계 경제의 흐름을 바탕으로 투자하는 글로벌 매크로 투자 기법의 달인으로, 소로스에게 파운드화 공매도를 제안한 사람이 드러켄밀러다.[4] 조지 소로스와 더불어 전세계 통화위기 가운데서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투자자이다.
천재적인 분석 능력과 트레이딩 실력으로 30년간 연평균 30.4%의 수익률을 올렸으며, 손실이 난 해는 단 한 해도 없었다. 이는 월스트리트를 포함한 전세계 투자 업계에서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간혹 증권사의 트레이더들이 1년에 수백%의 수익률을 올리긴 하지만 드러켄밀러 만큼의 큰 자본을 운용해 연평균 30% 이상의 수익률을 기록한 투자자는 짐 사이먼스가 유일하다. 단타, 스윙 트레이딩의 귀재인 리처드 데니스와 마이클 마커스 또한 드러켄밀러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긴 했지만 운용자산은 수백, 수천억원 규모였다.
심지어 전설적인 투자자들인 워렌 버핏, 조지 소로스, 피터 린치 또한 20% 대의 수익률로 드러켄밀러의 수익률을 뛰어넘지 못했다. 다만, 이 셋은 드러켄밀러 대비 적게는 열 배에서 많게는 백 배 더 큰 대규모 금액의 포트폴리오를 운용했다는 점을 고려해 비교해야한다. 수익률은 포트폴리오가 커질수록 크게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피터 린치는 개방형 공모펀드라서 워렌 버핏 및 조지 소로스 및 스탠리 드러켄밀러 대비 큰 핸디캡을 지니고 투자했다.
펀드매니저 스콧 베센트는[5] 드러켄밀러를 짐 로저스의 분석능력과 조지 소로스의 트레이딩 능력을 갖춘 월스트리트 최고의 돈 버는 기계라 평가했다.
2. 생애와 커리어
1953년 6월 14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났다. 듀폰에서 화학 공업자로 일하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해 필라델피아에서 아버지 밑에서 홀로 자랐다.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릴때 부터 총명해 보딩스쿨인 칼리지에이트 스쿨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보든 칼리지에서 영문학과 경제학을 전공했으며[6] 훗날 조지 W 부시 정권의 경제 자문이자 미국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로렌스 린지(Lawrence B. Lindsey)와 함께 핫도그를 팔아 용돈벌이를 했다. 보든 칼리지 졸업 후, 미시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려 했으나 PNC 파이낸셜의 원유 애널리스트로 스카웃 제의를 받아 중간에 중퇴하게 된다.[7]1977년, PNC 파이낸셜의 애널리스트로 취직해 일년만에 리서치 부서의 헤드가 된다. 1981년, 자신이 설립한 헤지펀드를 운용하고자 PNC에서 번 돈을 기반으로 듀케인 캐피탈(Duquesne Capital Management)을 설립한다. 이 후, 드뤠피스(Dreyfus Corporation)에 취직해 고객에게 투자 조언을 해주는 컨설턴트가 된다. 드뤠피스의 컨설팅 업무와 듀케인 캐피탈 운용을 병행하고자 피츠버그와 뉴욕을 오가며 생활하다 1986년 드뤠피스 펀드의 펀드매니저로 승진해 피츠버그로 완전히 거처를 옮기게 된다.
드뤠피스에서 최고 수익률을 올리는 펀드매니저로 단숨에 회사의 일약 스타가 된다. 드뤠피스 펀드 운용 중, 조지 소로스가 집필한 금융의 연금술(The Alchemy of Finance)을 읽고 감명받아 소로스와 토론하고자 소로스를 찾아가게 된다. 소로스는 첫 만남 직후 드러켄밀러에게 스카웃 제의를 하지만 드러켄밀러는 드뤠피스에서 투자 성공에 대한 합당한 보수를 줄 것으로 생각해 소로스의 제안을 보류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드뤠피스 보수에 실망해 결국 소로스가 운용하는 플래그십 펀드인 퀀텀펀드에 빅터 니더호퍼를[8] 대신하기 위해 입사한다. 입사 후, 소로스와 함께 파운드화 공매도를 이끌었으며 소로스와 함께 영란은행을 굴복시킨 사나이로 불리게 된다. 독일, 스웨덴 등 여러 나라의 통화위기 가운데서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으며 퀀텀펀드의 황금기를 이끈 펀드매니저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천문학적인 수익률을 올리다 2000년에 기술주 투자에 실패해 펀드에 수조원의 손실을 입히게 되어 결국 소로스를 떠나게 된다[9]. 퇴사 후, 자신이 설립한 듀케인 캐피탈을 운용하다 2018년 헤지펀드 업계에서 완전히 은퇴한다. 듀케인 캐피탈을 운용하는 동안 연평균 30%의 수익률을 올렸으며 손실을 기록한 해는 단 한 해도 없었다[10]. 현재 안정적인 수익률을 추구하기 위해 가치주에 활발히 투자하고 있으며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에도 투자하고 있다[11].
2023년 11월 1일 복지와 전쟁 예신 관련하여 연방정부의 과도한 지출을 비판했다. 코로나 버블 이전 시기와 비교해 보았을 때 GDP 대비 지출이 너무 과하다고 언급했다. 전날인 31일에는 경기 침체를 예상하며 2년물 미국채를 매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국채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는 국채 수익률은 최근 대침체 이후 최고치에 도달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빌 애크먼의 경우 지정학적 리스크와 경기침체 우려로 인해 30년물 미국채에 대한 숏포지션을 청산한 바 있다.
2024년 4월 23일, 인공지능 검색엔진 업체인 Perplexity가 시리즈 B1 라운드에서 6,270만 달러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에 투자자로 합류했다.
3. 투자 철학
투자 스승인 조지 소로스의 영향을 받아 글로벌 매크로[12] 전략을 바탕으로 많은 양의 레버리지를 사용해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탑다운(top-down) 투자자이다.[13]. 은퇴 후,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전의 공격적인 투자보다는 가치주, 성장주[14] 위주로 투자 하고 있으며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닷컴, 스타벅스,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 등에 큰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외에도 비트코인 등 여럿 암호화폐에도 투자하고 있다.4. 기타
- 조지 소로스의 오픈소사이어티재단을 비롯한 많은 기관에 활발한 기부를 하는 중이다. 2009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액수를 기부한 사람으로 한화 약 8,000억원을 미국의 교육기관과 빈곤 퇴치 기구에 기부했다. 외에도, 모교인 보든 칼리지에 300억원 이상을 기부했으며 뉴욕 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 연구비를 기부했다.
-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반트럼프 인사인 니키 헤일리 지지를 선언했다.
- 한 때 주식 포트폴리오에서 쿠팡이 비중 1위인 적도 있었다.2022년 6월 30일 기준 1943만3430주 보유. 17일 기준 3억4830만 달러(약 4659억 9100만원) 어치
[1] 억만장자 펀드매니저 바튼 빅스(Barton Biggs)의 딸[2] 패밀리 오피스로 전환하기 전까지는 헤지펀드 였다. 조지 소로스, 데이비드 테퍼 등 여러 펀드매니저들이 은퇴 후 자신들이 운용하던 헤지펀드를 패밀리 오피스로 전환하는 중이다.[3] 조지 소로스가 설립한 Soros Fund Management(SFM)의 플래그십 펀드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에 이어 투자자에게 가장 많은 수익금을 돌려준 헤지펀드. 여러 유명 투자자를 배출한 펀드로도 유명한데, 스탠리 드러켄밀러, 짐 로저스, 빅터 니더호퍼 등이 퀀텀펀드 출신이다.[4] 많은 사람들이 소로스가 주도한 거래로 알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소로스는 드러켄밀러에게 더 많은 레버리지를 사용해 공매도 하도록 자문 해준 자문자 역할이었다. 결국 소로스의 자문으로 15억 달러에서 100억 달러로 공매도 금액을 늘려 파운드화를 공매도해 일주일만에 10억 달러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드러켄밀러의 통찰력과 소로스의 대담함이 없었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세기의 거래인 샘.[5] Soros Fund Management의 CIO였던 인물로 이 사람도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천재.[6] 본래 영문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3학년 때 들은 경제학 수업에 매료되어 금융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7] 박사 과정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중퇴 후 한말이 걸작이다. “These people are crazy. They’re trying to shove the economy into a math formula. It doesn’t make any sense” (이 사람들<미시간 대학교 교수, 학생들>은 미쳤어. 경제학을 수학 공식으로만 설명하려 하잖아. 그건 말도 안되잖아.)[8] 미국의 전설적인 트레이더로 소로스 밑에서 최고 수익률을 올리는 펀드매니저 였으나 투자 실패로 펀드에게 큰 손실을 입혀 자진 퇴사했다. 퇴사 후, 자신의 트레이딩 실패를 기반으로 한 책을 집필하며 살고 있다. 여담으로 일본의 슈퍼개미 투자자 BNF의 이니셜이 빅터 니더호퍼의 이니셜을 꼬아 만든 것이다.[9] 불과 3일만에 일어난 일로 자신의 감정적인 투자로 일어난 실수라고한다.[10] 대침체 등 여러 조정과 경기 침체동안 계속해서 플러스의 수익률을 기록한 전무후무한 수익률이다. 특히, 드러켄밀러와 같이 공격적인 투자를하는 헤지펀드들은 불가능한 기록.[11] 또 다른 억만장자 펀드매니저 폴 튜더 존스(Paul Tudor Jones II)와 함께 암호화폐에 긍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대표적인 투자자 중 한명이다.[12] 기업의 펀더멘털보다는 세계 경제에 초점을 두는 투자 전략[13] 다른 성격의 투자 방식으로는 기업인 펀더멘털을 분석해 투자하는 바텀엄(bottom-up) 투자 방식이 있다. 워렌 버핏, 피터 린치 등 대부분의 유명 투자자들이 사용하는 전략이다.[14] 사실 성장주 투자는 공격적인 투자 방식이다. 하지만, 드러켄밀러가 주로 사용하던 많은 레버리지를 사용한 글로벌 매크로 투자 방식보다는 보다 안정적인 투자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