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릇의 일종
사진에서 나오듯 그릇 바닥에 구멍들이 있는데, 여기로 수증기가 들어와 그릇에 담은 내용물을 찐다.
안악 3호분 무덤 벽화의 일부. |
현재까지 알려진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시루는 신석기 말 - 청동기 초 유적인 나진 초도패총에서 발굴되었고, 이후 삼국시대 유적에서도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분 무덤 벽화에는 고구려 여인들이 집안일을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그림 속에는 부뚜막에 놓인 큰 시루와 함께 오른손에는 주걱을, 왼손에는 젓가락을 든 여인이 있는데, 시루에 물을 축여가며 긴 젓가락으로 음식이 익었는지 찔러보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평안남도 평성시 지경동 1호 무덤에서 출토된 시루 유물은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안악 3호 무덤 벽화에 나오는 시루의 형태와 매우 흡사하다. 백제의 시루는 좁고 긴 형태에 쇠뿔 모양 손잡이가 달렸지만, 밑바닥의 구멍은 고구려 후기의 시루와 비슷하다. 링크
그릇에 직접 열을 가해 조리하지 않고 수증기로 찌기 때문에 당연히 물 끓이는 그릇이 따로 필요한데, 이를 '시루솥'이라고 부른다. 시루떡이나 콩나물 시루 같은 표현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느끼겠지만,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어지간한 가정집이라면 하나쯤은 있다.
삼국시대 이래 디자인만 조금씩 바뀌었을 뿐 구조와 원리는 같다. 단지 이름을 찜기, 찜통, 찜솥, 찜냄비 등으로 다르게 부를 따름이다.
이처럼 시루는 한국의 음식 문화의 발달사에서 빠질 수 없는 조리용기로 청동기시대 초부터 사용되었다. 시루는 곡식 농사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징표로 볼 수 있겠다.
한국 외부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조리기구이다. 중국, 일본, 베트남에서는 찜을 할 때 대나무로 만든 정룽을 사용한다. 중국에서는 은허 유적에서 청동기 시루(甗)가 발굴된 적이 있긴 하나, 주로 인신공양 제사에 바쳐진 시신을 조리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듯하다.[1] 중국에서 시루는 늦어도 전한 이후로는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된 모양이다. 특이하게 일본 황실에서 사용한다. 히로히토는 자신이 일본 황실 기마민족정복왕조설[2]을 믿은 이유 몇 가지를 일본 황실 음식 관련 관습에서 꼽았는데, 시루가 그 중 하나였다.[3][4] 쇼와 덴노#s-7.1 문단 참고.
2. 이름
2.1. 실존인물
2.2. 가상인물
3. 경기도 시흥시의 지역사랑상품권
자세한 내용은 경기지역화폐 문서 참고하십시오.4. 일본어 단어
汁(しる)일본어로 국물을 뜻한다. 가령 일본 요리의 기본 상차림인 "一汁三菜"는 국 1가지, 반찬 3가지로 된 차림이다. 이 때문에 일본 서적 번역에서 간혹 이것을 그대로 '즙'으로 오역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レモンの汁'(레몬 즙)처럼 한국의 '즙'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5. 성심당/시루 시리즈
성심당에서 판매하고 있는 케이크 시리즈의 내용은 성심당/시루 시리즈 참고바람.[1] 제물로 바쳐진 두개골이 시루에 담겨진 상태로 발굴되었다. 이렇게.[2] 천황가가 일본 토착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온 가문이라는 설. 히로히토뿐만 아니라 아키히토도 이를 긍정했다.[3] 나머지는 마늘, 숭늉, 숟가락이다. 4가지 모두 일본 전통 민간 식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시루는 떡메, 마늘은 생강, 숭늉은 차(茶)가 그 위치를 대신한다. 숟가락은 당나라에서 들어온 이후 헤이안 시대 초기까지는 귀족들에 의해 사용되었지만 나라의 풍조가 당을 따라가던 '당풍'에서 일본 고유의 문화를 강조하는 '국풍'으로 바뀌자 사장되기 시작했다. 막부하고 지배계층의 문화에 군사적 기조가 추가되면서 퇴출된 후 아이들이나 승려들이 죽을 먹을 때 사용하거나 개항 이후 외국에 기원을 둔 음식(카레라이스, 라멘)을 먹을 때 정도나 사용하게 되었다. 라멘이 외국 음식이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본의 라멘은 마치 한국의 짜장면처럼 중식인 라몐 탕면을 기반으로 변형한 음식이다.[4] 식문화 외에도 양반다리나 어머니를 '오모'라고 부르는 점도 이유로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