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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틀리 왕국 5대 군주 სიმონ I | 시몬 1세 | ||
제호 | 한국어 | 시몬 1세 |
조지아어 | სიმონ | |
라틴어 | Simon I | |
가족 | 루아르사브 1세(아버지) 타마르(어머니) 다비트 11세(동생) 바크탕(동생) 알렉산드레(동생) 레반(동생) 네스탄-다레얀(아내) 기오르기 10세(장남) 루아르사브(차남) 알렉산드레(삼남) 바크탕(사남) 엘레네(장녀) 파흐리잔 베쿰(차녀) | |
생몰 년도 | 1537년 ~ 1611년 | |
재위 기간 | 1556년 또는 1558년 ~ 1569년(1차 재위) 1578년 ~ 1599년(2차 재위)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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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틀리 왕국 5대 군주.2. 생애
카르틀리 왕국 4대 군주 루아르사브 1세와 이메레티 왕국의 군주 바그라트 3세의 딸 타마르의 장남이다. 동생으로 다비트 11세, 바크탕, 알렉산드레, 레반이 있었다. 1556년 또는 1558년 카르틀리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가리시에서 이란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이 전투를 언덕에서 지켜보던 루아르사브 1세는 이란 도망병들의 공격을 받고 치명상을 입고 며칠 후 사망했고, 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당시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수도 트빌리시는 이란군에게 넘어가 있었기에 고리를 새 수도로 삼았다. 그는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이란군에 맞서 싸우는 한편, 1559년 카헤티 왕국과 동맹을 맺고 레반 왕의 딸인 네스탄-다레얀과 결혼했다. 1560-61년 트빌리시 해방 작전에 착수했으나 1561년 4월 치케디디 전투에서 패배했다. 1562년 그의 형제인 다비트 11세는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다우드 칸으로 개명했다. 사파비 제국 샤한샤 타흐마스프 1세는 다우드 칸에게 군대를 맡겨 카르틀리를 치게 했다. 그는 1567년 디고미 전투에서 다우드 칸을 격파했고, 1569년 사마들로에서 다시 한 번 물리쳤다.
그러나 1569년 파츠키시 전투에서 퇴각하는 적군을 무리하게 추격했다가 생포되어 이란으로 끌려갔다. 타흐마스프 1세는 다우드 칸을 카르틀리 국왕으로 세웠고, 그는 1578년까지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1578년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과의 전쟁이 벌어지자, 새 샤한샤 이스마일 2세는 그를 카르틀리 왕으로 복위시켰다. 그는 이란의 충직한 봉신으로 자처하며 유격전을 벌여 롤우리, 고리 등 여러 요새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시켰다. 1579년, 그의 군대는 카르틀리 왕국의 수도 트빌리시를 포위했다. 오스만 제국은 트빌리시에 갇힌 수비대를 구하기 위해 병력과 식량을 파견했지만, 그는 이들을 모조리 물리쳤으며 여세를 몰아 투르크군에게 지배당하고 있던 사타바고도 해방시켰다.
1580년 여름, 무라트 3세는 오스만군 수장 라라 파샤를 해임하고 시난 파샤를 임명해 카르틀리를 완전히 정복하게 했다. 1581년, 시난 파샤는 이메레티 왕 기오르기 2세에게 시난 파샤로부터 카르틀리 왕권을 넘겨줄 테니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라고 권유했고, 기오르기 2세는 이에 혹해 받아들였다. 이후 이메레티 왕국, 밍그렐리아 공국, 구리아 공국 연합군이 카르틀리 북부를 침공했고, 시난 파샤는 그와 직접 대결했다. 그 결과 카르틀리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오스만과 이메레티 연합군은 트빌리시에 입성했다.
하지만 1582년, 그는 사파비 제국에서 파견한 원군과 합류하고 마누카르 2세 자켈리와 동맹을 맺은 뒤 반격을 가해 이메레티, 밍그렐리아, 구리아, 삼츠헤, 오스만 연합군을 무크란 전투에서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1584년, 무라트 3세는 시난 파샤를 해임한 뒤 페르하드 파샤에게 대군을 맡겨 카르틀리로 파견했다. 1587년 삼츠헤와 사타바고가 오스만군에게 넘어갔고, 1580년대 말에 트란스코카서스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이렇듯 전세가 기울자, 그는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상을 맺었다. 오스만 제국은 그를 카르틀리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공물을 납부하게 했다. 또한 1590년 사파비 제국과 협약을 맺어 조지아 전체를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삼았다.
1588년, 그는 일전에 오스만 제국과 연합하여 자신을 공격했던 이메레티 왕국에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메레티 왕 레반은 이에 맞섰으나 고판토 전투에서 참패하고 레흐쿠미 지방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카르틀리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여 압박을 가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고 레반은 왕위를 유지했다. 1590년, 그는 재차 이메레티를 침공하여 바그라트 4세를 축출하고 이메레티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를 장악한 뒤 수비대를 배치하고 떠났다.
그러나 밍그렐리아 공작 마누치르 다디아니가 쿠타이시를 공략하고 로스톰을 왕으로 내세웠다. 그는 재차 군대를 동원하여 쿠타이시로 쳐들어갔고, 로스톰은 밍그렐리아 공국의 수도 오디시로 피신했다. 그는 스칸다, 크바라, 카츠키, 스베리 등 여러 요새를 장악하고 수비대를 배치한 뒤, 로스톰이 달아난 오디시로 진군해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옵슈크비티 전투에서 마누치르 다디아니에게 패배하고 잔여 병력을 수습해 카르틀리로 철수했다. 그 후 로스톰과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포로와 인질을 교환했다.
1595년 이란, 카헤티 왕국과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해, 1599년 고리 요새를 공략했다. 이에 메흐메트 3세는 자파 파샤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반격에 나섰다. 1599년 나키두리 전투에서 패배하여 적에게 생포된 뒤 이스탄불로 이송되어 예디쿨레 감옥에 수감되었다. 메흐메트 3세는 "모로코에서 카스피해까지, 코카서스에서 페르시아만까지 모든 도시에 카펫을 걸고 3일 동안 시몬의 포획을 축하하라"라는 칙령을 내렸다. 이후 옥중에서 여생을 보내다 1611년 사망했고, 유해는 조지아로 돌아가 므츠헤타에 있는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카헤티 왕국의 군주 레반의 딸 네스탄-다레얀과 결혼하여 네 아들 기오르기 10세, 루아르사브, 알렉산드레, 바흐탕과 두 딸 엘레네, 파흐리잔 베굼을 낳았다. 그가 이스탄불로 끌려간 뒤 장남 기오르기 10세가 카르틀리 왕국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