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2 17:08:03

신장 제61연대 농장 화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배경
2.1. 화환2.2. 회관
3. 사고 전개
3.1. 영화 상영3.2. 화재
4. 대피와 피해

1. 개요

伊犁61团场火灾

1977년 2월 18일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훠얼궈쓰시 제61연대 농장 회관에서 발생한 화재.

2. 배경

연대 농장(团场)은 신장 생산 건설 군단을 구성한 재향군인 가족이 거주하는 군사 정착지로 제61연대 농장은 국경 도시인 호르고스에서 9km 떨어진 알리말리에 위치해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춘절을 기념하지 않았으나 마오쩌둥이 죽으면서 춘절을 다시 기념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폭죽등이 다시 유통된 상태였다.

2.1. 화환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수많은 어린이들이 동원되어 죽음을 기리기 위해 1000개의 애도 화환을 손수 만들어야 했고 다 만든 화환은 민속 전통에 따라 소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연대 소속 장교들은 화환을 태웠다가는 마오쩌둥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 될 걸 우려하고 화관을 다른 곳에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군인들은 2m 짜리 화단을 무려 1000개를 공동회관에 전시했다.

마오쩌둥의 장례식에서 1977년 춘절까지 5개월 동안 신장의 날씨 때문에 화환에 있는 나뭇가지와 종이가 말라버렸고 불꽃만 튀면 활활 탈 준비가 된 상태로 만들게 되었다.

2.2. 회관

농장 회관은 1966년에 지어진 건물이었으며 마오쩌둥의 정치를 비판하는 장소였다. 회관의 넓이는 약 760㎡였다.

1975년 공산당 간부들의 회의로 인해 건물을 리모델링 했는데 지붕을 일반적인 철이 아닌 기름칠 한 펠트와 아스팔트로 마감을 한 나무로 했기 때문에 불이 붙기 더 쉬어졌고 원래 있던 문 7개 중 6개를 사고가 발생하지 않을거니까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패쇄하거나 잠궜고 임시 대피로로도 사용된 17개의 큰 창문을 벽돌을 쌓아서 바람만 들어올 정도로 줄여났다. 주민들은 이 회관을 보고 감옥이라 하는 등 굉장히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3. 사고 전개

중국인들은 1977년 춘절을 공산주의 영화나 충성무용, 혁명가극 등을 보면서 새해를 축하했고 61연대도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3.1. 영화 상영

군인들과 마을 주민들은 6.25 전쟁 중 중공군 참전을 묘사한 북한 영화 전우(戰友)를 야외에서 관람할 예정이었으나 바깥 온도가 영하 20~30도까지 떨어지며 회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연대 선전관은 화환 훼손이나 안전상의 이유로 회관 사용을 제지하였으나 주민들의 부탁으로 결국 화환을 뒤로 빼서 사람들을 앉히기 시작했다.

3.2. 화재

오후 9시 30분에 영화가 시작되었고 영화 상영 중 아이들이 여러 번 폭죽을 터뜨렸지만 군인들은 폭죽을 압수하지 않고 직원들은 영화 상영을 멈추겠다고 말하면서 제지를 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기 몇 분 전인 11시 15분에 중국인과 북한 군인이 포옹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기 위해 많은 아이가 화환 더미의에 올라가 앉은 상태였다. 이때 소학교 6학년이었던 12세 소년 조광휘(赵光辉)가 회전하는 팽이 모양 폭죽인 "굴을 파는 쥐"(地老鼠)에 불을 붙였고 폭죽이 떨어지며 화환에 옮겨붙게 되었다. 지붕에 설치된 전선에 불이 붙어 짙은 연기가 퍼졌고 불타는 나무 천장과 아스팔트가 지붕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4. 대피와 피해

대피 공간이 작은 출구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고 영화를 보기 위해 의자를 가져온 아이들은 탈출하면서도 의자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출구가 더욱 막혔다. 앞에 있는 사람이 넘어지게 되면서 압사하게 되고 약 2~3m 높이의 시체 더미가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탈출구에서 사망하거나 떨어지는 잔해에 맞아 사망했고 소수의 아이들만이 북쪽에 있었던 잠긴 문에 구멍을 뚫어 탈출에 성공했다.

이 사고로 무려 694명이 사망하고 161명이 장애를 입게 되었다. 사망자 중 597명이 어린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