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20 20:02:22

신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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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거창 신씨[1]
출생 1897년 7월 21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이리[2][3]
(현 황해북도 평산군 용궁리)
사망 11월 2일
묘소 황해북도 평산군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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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신표성(愼表晟)은 1897년 7월 21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이리(현 황해북도 평산군 용궁리)의 평민 집안에서 아버지 신종은(愼宗殷, 1876 ~ ?. 5. 16)과 어머니 광산 김씨[4] 사이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금암면 한포리(현 평산군 한포리)로 이주하였다.# 그는 일찍이 서당에서 3년간 한문을 배우고 1919년 5월까지 약 2년간 평산군 금암면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하였으며, 이후에는 한포리에 사는 안해민(安海珉)[5]의 고용인으로 일했다.#

1920년 4, 5월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참사(參事)로 평산군 서봉면 봉동(현 황해북도 평산군 봉천리)에 살던 정의도는 신표성이 서기로 일하는 금암면사무소를 방문, 신표성에게 자신이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현 황해북도 사리원시) 손재흥(孫再興)의 집에서 가져온 독립신문 호외를 보여주면서, "미국 상원에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결국 조선은 독립이 될 것이니 너도 독립운동에 진력하라."고 하자, 신표성은 "나는 고용되어 있는 신분이므로 그런 일은 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정의도는 상해임시정부프랑스 정부가 서로 특별 협약을 맺어 조선인으로서 1,000원을 프랑스 정부에 납부하면 7년간 옷과 식량을 무상 제공받으며 학업에 전념할 수 있다며 공부하러 가는건 어떤가하며 권유하였고 표성이 이에 승낙하자, 손재흥을 찾아가면 수속을 해줄 것이라고 하면서 돌아갔다.

이에 신표성은 임시정부로 가기로 결심하고서, 일전에 1919년 1, 2월경에 밭을 팔아 얻은 돈 750원과 1920년 4, 5월경에 소를 팔아 얻은 돈 70원을 주인 안해민에게 맡겨둔 것을 비롯해, 그 밖에 13개월 치 월급을 받지 않고 맡겨 둔 195원에 1920년 6월 7일에 그 돈에 이자를 가산한 1,073원 18전을 주인 안해민에게 공부하러 가겠노라며 받아서 손재흥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해 6월 6일경 손재흥을 방문하여 정말 프랑스정부에 1,000원을 납부하면 7년간 공부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사리원 독립청년단 단장 손재흥은 상해에 가는 데에는 여비가 120원이므로 다만 1,000원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그 돈으로 차라리 상해임시정부에 금 500원을 기부하라고 했다. 신표성은 처음에는 기부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손재흥이 상해임시정부 간부 손정도를 알고 있다며 그 분을 소개해주겠노라 하여 결국 돈을 기부하였다.

같은 해 7월 20일 손재흥과 함께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석박리(현 황해북도 중화군 금산리)에 있던 김태용(金泰鏞)의 집으로 가서 김치은(金致殷) 등과 회합한 자리에서, 김태용·김치은과 함께 그동안 모집한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임무를 맡았다. 이를 위해 평안북도 의주군 위화면 하단동(현 평안북도 신의주시 하단리)의 선착장에서 임시정부 파견원 최명식을 만나기로 했다. 같은 해 8월 1일 김태용·김치은과 함께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평원군 숙천면, 평안북도 박천군·정주군·선천군 등지를 거쳐 의주군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8월 2일 임시정부 재무원 최명식을 기다리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1920년 8월 12일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분국에 송치되었으며, 같은 달 3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그에 대한 예심이 청구되었다. 같은 해 1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었고, 이듬해인 192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같은 해 10월 29일 출옥한 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 등에 대해선 자료가 미비하여 알 수 없다. 다만 거창 신씨 족보에는 그의 기일이 11월 2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201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참판공파 30세 성(晟), 성(珹) 항렬.[2] 1914년 이리의 일부를 분리하여 평산군 금암면 재궁리가 신설됨.[3]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4] 아버지 신종은의 재취(再娶)였다. 정실부인 여흥 민씨는 불임(不姙)이었다고 거창 신씨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5]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유지로 추정된다. 1913년 6월 신계군 소방조에 제공하는 기구 구입비용에 쌀과 조 각각 5말씩 기부하여 1915년 3월 2일 조선총독부로부터 나무잔을 수여받았다.# 이후 1917년 4월 29일까지 누천(漏川)지방금융조합의 감사로 재직하였다.# 1918년 2월 1일 누천지방금융조합 감사에 재취임해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남천(南川)금융조합 감사로 있다가,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1921년 4월 24일 정기총회에서 중임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재취임하였다.# 1923년 4월 24일 남천금융조합 감사에 재취임하였다.# 1925년 4월 25일 남천금융조합 감사에 재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