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5:42:09

아베 신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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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 }}}}}}}}}


1. 개요2. 긍정적 평가3. 부정적 평가
3.1. 한국과의 관계
4. 총평

1. 개요

일본의 전 내각 총리대신인 아베 신조의 평가를 서술한 문서.

2. 긍정적 평가

일본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받았다. 그의 아베노믹스잃어버린 10년을 끝냈다고 평가를 받은 적도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한동안 다시금 경제를 회복하여 선진국으로서의 위상도 많이 회복했었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강한 친미, 반중을 토대로 안정적인 외교 관계를 형성하였다.

문화 쪽으로도 발전을 하고자 많은 예산을 투여하였다. 이는 그가 영화광인 부분도 한몫하였다.

3. 부정적 평가

아베노믹스의 한계점을 지적하여 끝내기는커녕 잃어버린 40년을 향해 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비판은 일본 내에서 주로 받고 있는 평가이다. 자세한 건 잃어버린 10년아베노믹스 참고.

무리하게 강행한 2020 도쿄 올림픽 개최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애초에 코로나19 방역 실패로 국가 위상 회복과 올림픽 특수는 이미 오래전부터 물 건너간 상황이고 코로나 사태가 아니더라도 개최 전에도 많은 논란과 구설수에 시달렸는 데다 어느 지도자라도 코로나 사태라는 국가적 위기에서 올림픽 개최는 쉽지 않을 거라는 의견이 많았던지라 더욱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1] 아베가 사퇴한 후 들어선 스가 내각에서 커버를 치려고 해도 기존의 부정적 평가를 모두 만회하는 건 불가능했고 빚더미에만 올랐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3.1. 한국과의 관계

아베 신조는 일본 내 극우/혐한 세력들의 구심점 역할을 한 인물인지라 여러 망언과 행보로 인해 한국 내에서 평판이 매우 나쁘며, 사실상 한국과 일본의 외교 관계를 안 좋게 만든 장본인으로도 평가받는다. 사실 의외로 과거 아베 신조 본인은 1차 집권기 때까지만 해도 한국 문화나 한일 관계에 대하여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자민당 내 다소 진보적인 외교 성향을 가진 인물로 꼽혔다. 그러나 2차 집권기 이후로 잘 알다시피 당내 강경 성향의 대표 주자가 되며 한국에 배타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꼽힌다.

우선 첫째 그는 어린 시절이 좋지 못했다. 그의 가문이 일단 외가 친가 다 명문가인 데다가 유독 도쿄 대학에 가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고 이에 아버지 아베 신타로도 너도 도쿄대에 가자며 공부를 안 하는 그에게 공부를 하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베 신조는 아베 신타로가 정치인으로 바빴기에 어린 시절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자라지 못했고 그런 그를 돌봐주며 키워준 실질적 부모는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였다. 때문에 아베 신조가 기시 노부스케의 보수 사상을 본받았을 가능성도 높다.[2]

둘째로 당을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우선 상당한 고령화 사회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과거 일본 제국이 패망하던 시기에 태어났기에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때문에 더더욱 일본 노인층은 대부분이 보수다. 자유민주당은 보수 정당이다. 즉 아베 신조는 이들에게 표를 받으려면 한국을 까내리려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그를 평생 괴롭힌 궤양성 대장염으로 일찍 단기 총리로 마감하다가 다시금 총리가 된 것이기에 그는 더욱 강박이 심할 수밖에 없었고, 점점 친한파에서 혐한파스럽게 변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아베 신조를 완전한 친한파이지만 순전히 정치적 이유로 돌아선 것이라는 의견을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2차 집권기 이후로는 강경 발언을 하며 실질적 동맹인 한국을 배척하는 외교 성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젊은 시절에도 친한 성향을 보인 것이 본인의 진짜 의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냥 한국 문화에 우호적인 성향이었을 뿐 정치적으로는 반감이 있거나, 당내 위치를 잡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행동했다는 반론 역시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의 가정사를 보면 아베가 친한이 되기보다는 혐한이 되기가 더 쉬운 환경이었으며, 젊은 시절에도 완전 친한이기보다는 지한파에 가까웠다는 평을 받는다. 2006년 그의 발언을 분석하면 '같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서 협력'하자는 내용인데, 이는 대한민국의 보수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바와 유사하다. 사실 일본에서는 아베를 진짜 극우라기보다는 고이즈미의 뒤를 잇는 포퓰리스트에 선거를 잘하는 선거꾼 이미지가 있지 이념이 확실한 정치인이라고 보는 경향이 컸다. 즉, 소신을 가지기보단 환경에 따라 갈대같이 변할 수 있는 정치인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본의 변화한 정치 환경과 그에 따른 새로운 이념, 본질적으로는 45년 패전 이후 70년 만에 돌아온 일본 민족주의, 국가주의자로서의 귀환이 아베를 급격하게 우회전시킨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일본은 철저하게 지방 정권의 연합체고 천황이라는 상징적인 구심점을 세우고 쇼군이 지방 권력을 중재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일본 제국 군부 독재 시절에만 잠깐 깨졌던 이 유구한 방식인 55년 체제의 붕괴 이후 정치 개혁을 위해 소선거구제로 중의원 선거 방식을 바꾸면서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일본 정치사에 길이 남을 포퓰리스트가 등장하고 비주류였던 고이즈미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자민당에서의 당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부 독재 때 쓰던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꺼내 들었다. 아베는 고이즈미의 직계 제자고 원래도 기시 노부스케의 후손으로 군부 독재를 옹호하는 입장이며 특히 동일본 대지진 이후 혼란에 빠진 일본인들의 정신적 단결을 위해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더욱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위해 필연적으로 인접국을 악마화하는 배타주의가 발동하게 되고 혐한은 역사 이래 유구한 일본 국가주의의 국밥 같은 존재였다. 그런 점에서 아베는 후술할 통일교과의 관계때문에 반공정치인이라고는 정의할 수 있지만 그 외는 그때그때 다른 선거꾼,정치꾼 정도이나 아베의 2차 집권기 빠르게 우경화된 일본의 사회분위기에 편승하기 위해 극우성향을 드러냈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당 내에서 아베가 당권을 쥐고 있을때 오히려 아베쪽이 훨씬 온건하다는 평가까지 받았을 정도.

여기에 뒤늦게 통일교 게이트가 아베의 극우화를 부추겼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아베 1차 내각의 빠른 붕괴는 아베의 지지 기반이 자민당 내에서도 취약했다는 걸 드러낸 방증인데, 통일교의 지원을 통해 세를 불리고 파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통일교의 성향인 극단적 반공이 이들 국회 의원에게 주입되었다는 것. 일본인들은 정치에만 무관심한 게 아니라 주변 소수 민족에도 무관심하기 때문에, 정말 한류에 관심 있는 일본인이 아닌 한 대한민국인과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문제는 일본의 통일교가 제일 혐오하는 일본공산당이 정작 한국과는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일본공산당을 싫어하는 고령층이 자민당 주 지지층이기도 하니 일본공산당과 조총련, 한국을 세트로 묶어서 디스하고 이를 어떻게든 자위대의 강화 = 평화 헌법 폐기로 이어가는 논리가 아베 신조의 주요 유세 레퍼토리였다. 자기 속내와 같은 세력이 선거 자금과 인력도 지원해 주는데 당연히 그들 입맛에 맞는 정치를 하지 않겠는가. 아베의 극우 태세 전환은 뒷배를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건 통일교만 그런 게 아니라, 일본회의로 대표되는 일본의 극우 종교 단체들은 모두 국가신토의 영향 아래 국가가 뒷배를 봐주는 대신 국가에 충성하도록 신도들을 세뇌하는 종교의 국유화로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강화하길 원했던 집단이기에 통일교와 같이 경쟁적으로 아베파를 지지하고 지원했다.

4. 총평

21세기 초 가장 영향력 있는 일본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보수 방류로 대표되는 일본 강경 우익의 구심점이자 최대 거물이기도 했다. 한국 관련 망언과 정책으로 한국에서의 평가는 매우 나쁘지만, 일본 내에서는 좋은 평을 받는 총리 중 하나였다. 물론 개혁, 정책의 한계와 문제가 적지 않았지만 그의 후임인 스가 요시히데가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아베 신조는 이후에도 좋은 평을 받는 내각 총리대신으로 남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아베 사후 자민당이 통일교와 깊은 커넥션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아베 본인 또한 오래전부터 통일교와 교류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본국인 일본에서도 평가가 급격히 추락했다. 사이비 종교와의 유착 관계가 그간의 모든 긍정적인 평가를 깎아먹을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평가.
[1] 올림픽 개최를 강행해 놓고는 정작 아베는 올림픽 개회식에 불참하기도 했다.[2] 기시 노부스케전범 용의자이기도 했다. 그것도 A급. 물론 용의자였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기에 확정 지을 수는 없다. 단 통일교 친화적 면모만큼은 확실히 물려 받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