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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 왕조의 아미르 & 술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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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أَبُو يُوسُف يَعقُوب بن عَبد الحَقّ아부 유수프 야쿱 이븐 압둘 학크[1]
생몰 1212년경 ~ 1286년 3월 20일
재위 1258년 7월 ~ 1286년 3월 20일
마린 왕조의 5대 아미르로, 실질적인 창건자였다. 그는 무와히드 왕조를 멸하여 모로코를 통일하고, 새로운 수도 페스 엘 제디드를 건설하였으며 안달루스에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다만 그의 통일은 불안정하였고, 남부의 마킬 베두인들과 아틀라스 산지의 산하자 베르베르 부족들은 제대로 복속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4차례의 안달루스 원정 동안 최소 4차례 카스티야 군을 패배시키고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위협한 것은 레콘키스타의 기세를 한풀 꺾어놓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야쿱은 군사적으로 유능하였으며, 외교에 있어서도 불필요한 싸움을 피하는 등 현실적인 모습을 보였다. 당시에 적지 않은 나이이던 50세에 가까운 나이에 즉위한 그는 10여 차례 친정에 나서며 노익장을 과시하였고, 1286년 약 7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에도 안달루스 원정을 마무리하려던 무렵이었다. 젊은 시절의 행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음에도 명군의 모습을 보인 그는 대기만성형 위인이라 평할 수 있다.
2. 즉위
창건자 압둘 학크의 4번째 아들로, 1215년 부친이 사망하고 무려 41년에 걸친 세 형들의 치세가 지난 후에 즉위하였다. 그러고도 28년간 장기 집권한 것을 보면 비록 정확한 출생 연도를 알 수는 없지만 상당히 장수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전임자인 형 아부 야흐야 아부 바크르가 타즈 총독인 아들 아부 유수프 야쿠브를 후계자로 정하였지만 야쿱은 어렵지 않게 조카를 누르고 아미르에 오를 수 있었다.즉위 당시 마린 조는 모로코 북부를 장악하였고 남부의 무와히드 조와 대립하고 있었다. 다만 실질적인 위협은 예상하지 못했던 쪽에서 왔다. 1260년 9월 카스티야 함대가 대서양으로 진출하여 모로코의 주요 항구인 살레를 기습 점령한 것이다. 놀란 야쿱은 14일간 포위한 끝에 도시를 회복하였는데, 이는 마린 조와 이베리아의 기독교 세력 간의 첫 직접적인 조우였다. 보복 습격을 가하라는 중론에도 야쿱은 무와히드 조에 대한 압박을 이어나가는 것에 치중하였다. 사실 무와히드 조가 카스티야 측과 동맹한 것이 습격의 근본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3. 모로코 통일
무와히드 조의 세력은 점차 축소되었고, 1262년 야쿱은 마침내 그 수도인 마라케쉬를 포위하였다. 다만 부흥을 위해 노력한 칼리파 알 무르타다의 방어에 막혀 공격은 실패하였고, 야쿱은 전략을 바꿔 알 무르타다의 사촌인 아부 답부스 이드리스의 반란을 후원하였다. 내전 끝에 1266년 이드리스는 마라케쉬를 점령하였고 칼리파 '알 와시크'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알 와시크는 기존에 야쿱에게 약속한 것과 달리 마라케쉬를 넘겨주기를 거부하고 틀레센의 군주 야그무라센 이븐 자얀에게 마린 조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설득하였다. 1268년 야그무라센이 모로코 동북부를 침공하자 야쿱은 와디 몰루야에서 이를 격퇴하였다. 다시 남쪽으로 진군한 야쿱은 알 와시크를 격파, 마라케쉬를 포위하였다. 약 1년간 이어진 포위 후 1269년 9월 8일 야쿱은 마라케쉬에 입성하였고, 도주하던 알 와시크는 노예에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한세기 가량 모로코를 주름잡던 무와히드 조가 멸망하였다.야쿱은 무와히드 칼리파들이 칭하던 '아미르 알 무미닌'을 불경스럽다고 간주, 대신 무라비트 왕조가 칭하던 '아미르 알 무슬리민' (신자들의 사령관)을 취하였다. 또한 기존 두 제국들의 수도였던 마라케쉬 대신 이드리스 왕조의 고도 페스에 도읍하였다. 통일 후에도 마린 조는 수스 남쪽 다라아 협곡의 마킬 아랍 부족과 시질마사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야쿱은 각각 1271년과 1274년의 토벌 후에야 이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 역사가 이븐 칼둔에 의하면 시질마사 포위 시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화약 대포가 사용되었다고 한다.[2] 그외에 북부의 항구도시 세우타와 탕헤르 역시 1273년에야 복속하였다. 이러한 반란들 중 일부는 자얀 왕조의 야그무라센이 선동한 것이었기에 야쿱은 보복 원정에 나서 1272년 그 수도인 틀렘센을 포위, 모로코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은 후에야 회군하였다. 그래도 마음에 놓이지 않았는지 야쿱은 틀렘센 방면의 감시를 위해 동북 해안에 타운트 성채를 세웠다.
4. 1차 안달루스 원정 (1275년)
1272년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1세가 야쿱에게 말라가, 코마레스, 과디시에서 봉기한 바누 아쉬킬룰라와의 내전에 있어 지원을 청하였다. 당시 야쿱은 모로코 내부를 평정하느라 여념이 없어 개입하지 않았고, 무함마드 1세는 이듬해 사망하였다. 1274년 그라나다의 신임 군주 무함마드 2세는 조공을 대가로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와 휴전에 합의하였으나 후자는 약속을 어기고 반군에 대한 지원을 지속하였다. 분노한 무함마드 2세는 재차 마린 조에 도움을 청하였고 이번에는 타리파, 알헤시라스, 론다 등 영토 서부의 할양을 대가로 걸었다. 마침 모로코를 평정한 야쿱은 구미 당기는 이 제안을 흔쾌히 수용, 이전 모로코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안달루스에 대한 개입을 준비하였다.4.1. 에시하, 메르톨라 전투
1275년 4월 야쿱은 대군과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상륙, 신속히 타리파와 알헤시라스를 점령하였다. 당시 알폰소 10세가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였기에 부재한 상황에서 대규모 적군이 다가오자 바누 아쉬킬룰라는 협상에 나섰고, 내전은 종결되었다. 그라나다 측의 부탁을 손쉽게 이행한 야쿱은 내친 김에 카스티야령 안달루시아를 습격하였고, 무함마드 2세 역시 코르도바를 공격하였다. 그러자 카스티야의 왕자이자 섭정이던 페르난도가 반격에 나섰으나 7월에 병사하였다. 기세를 얻은 야쿱은 대군을 모아 세비야와 코르도바 사이의 요충지 에시하로 진격하였다. 이에 카스티야령 안달루시아 총독 누뇨 곤살레스 엘 부에노가 회전에 응하여 남하하였다. 9월 8일 벌어진 에시하 전투에서 카스티야 군은 패배하였고 사령관 누뇨 곤살레스는 전사하였다.야쿱은 모든 카스티야 전사자들의 목을 베게 하였고, 여세를 몰아 에시하를 공격하였으나 3백의 기사들이 강력히 저항하자 (공성전을 준비하지 않았기에) 철수하였다. 9월 18일 엘헤시라스에 개선한 야쿱은 누뇨 곤살레스의 수급을 효수하였고, 이후 후자의 동맹이던 무함마드 2세에게 보냈다.[3] 위기를 직감한 아라곤 왕자 출신 톨레도 대주교 산초가 카스티야 중부 (톨레도, 마드리드, 과달라하라, 탈라베라) 일대의 기사들을 모아 남하하였다. 카스티야 군은 하엔 부근 마르토스에서 약탈물과 포로들을 대동한 마린-나스르 군대를 포착하였다. 하엔으로 집결하던 로페 디아즈 휘하 병력과 합류할 것을 기다리자는 참모들의 조언에도 산초는 젊은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공격하였다.
10월 21일 벌어진 전투에서 카스티야 군은 대패하였고, 오직 소수의 기사들만 도주하였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대주교 산초 역시 사로잡혔으나, 마린-나스르 측에서 그 귀속을 두고 다투던 중에 살해되었다.[4] 붕괴의 징조를 보이던 카스티야는 그해 말엽 리옹에서 급히 돌아온 알폰소 10세가 병력을 규합해 수비에 임하며 안정을 회복하였다. (예상과 달리) 장기화된 원정에 지쳐있던 야쿱 역시 알폰소 10세가 협상을 청하자 그에 응하였고, 아라곤 왕국이 그라나다를 공격하자 무함마드 2세 역시 2년간 휴전에 합의하였다. 6개월에 걸친 전쟁 결과, 연이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진영은 레콘키스타로 빼앗긴 영토의 회복에 실패하였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공세를 완전히 꺾어놓았다.
5. 2차 안달루스 원정 (1277-78년)
페스 엘 제디드 건설과 함께 세워진 대사원
1276년 초엽 안달루스에서 돌아온 야쿱은 마라케쉬 총독이 마침내 팀넬의 무와히드 잔당을 소탕했다는 낭보를 접하였다. 연이은 승전과 평화를 기념하기 위해 야쿱은 수도 페스의 강 건너에 새로운 도시인 '엘 메디나 엘 베이다' (하얀 도시)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는 후에 페스 엘 제디드 (신 페스)로 발전하였고, 마린 조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1년간 휴식한 야쿱은 기존의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 1277년 6월 재차 안달루스에 상륙하였다. 바누 아쉬킬룰라와 함께 마린 군대는 8월 2일 세비야 외곽에서 카스티야 군을 격파하였다. 야쿱은 과달키비르 강을 따라 몇몇 성채들을 점령한 후 29일 알헤시라스로 개선하였다. 10월 30일 재차 출병한 야쿱은 이번에는 아르키도나 부근에서 무함마드 2세와 합류, 베나메지 성채를 점령하였다. 이후 연합군은 코르도바를 포위하고 근교를 약탈하였다. 알폰소 10세와 일대 마을들이 배상금을 대가로 휴전을 청하자 야쿱과 무함마드 2세는 이에 응하였다.
5.1. 알헤시라스 공방전
11월 28일 알헤시라스로 귀환한 야쿱은 1278년 2월 24일 카스티야와의 휴전이 체결되자 5월 모로코로 귀환하였다. 한편 2차 안달루스 원정 도중 야쿱은 바누 아쉬킬룰라와 함께 싸우며 그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라나다 측의 숙청을 우려하던 바누 아쉬킬룰라는 보호를 대가로 거점인 말라가를 할양하였다. 모로코로 돌아가기 직전 야쿱은 숙부인 우마르 이븐 야흐야를 총독으로 봉하였다. 점차 커지는 마린 조의 영향력을 경계하던 무함마드 2세는 과거의 적과 야쿱 간의 동맹에 경악하였다. 과거 에시하 전투 후의 모욕을 기억하던 무함마드 2세는 선제 공격을 결심, 틀렘센의 야그무라센에게 모로코 공격을 의뢰하는 한편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에게도 지원을 청하였다. 모로코 군의 귀환을 두려워하던 알폰소 10세 역시 흔쾌히 요청에 응하였고, 휴전이 성립되고 한 달도 되지 않은 3월부터 세비야의 함대 100척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마린 조의 교두보인 알헤시라스 공격을 준비하였다.8월 5일 3만에 달하는 카스티야 군은 알헤시라스 근교에 당도하였고, 24척의 선박과 80척의 갤리선으로 이루어진 함대는 지브롤터 만을 봉쇄하여 건너편 지브롤터로부터의 보급을 차단하였다. 다만 수비대의 강한 저항으로 포위는 장기화되었고, 틀렘센 군대가 모로코로 진입함과 동시에 무함마드 2세가 말라가로 남하하자 야쿱은 협상에 나섰다. '3국 동맹'에 포위된 야쿱은 말라가 지배권을 포기하고 바누 아쉬킬룰라에 대한 보호를 철회하였고, 우마르 이븐 야흐야는 무함마드 2세로부터 모트릴 부근 소도시인 무녜카르와 살로브레냐를 할양받음과 함께 5만 디나르 금화의 보상을 받았다. (1279년 1월 31일) 한편 양측의 화해와 상관없이 알헤시라스에 대한 포위는 이어졌고,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2월 알폰소 10세가 친히 당도하여 공격을 지휘하였다. 다만 2달 간의 노력에도 별 성과가 없자 떠났다. 사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카스티야 측은 그라나다가 자신들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한편 거의 1년에 가까운 전투에 대규모의 포위군은 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극심한 더위에 식수까지 모자르며 역병이 돌았다.
특히 함대 승조원들의 경우 괴혈병에 시달렸고, 참다 못한 이들은 선박을 두고 육상 포위망으로 이탈하였다. 봉쇄에도 불구하고 알헤시라스는 전서구[5] 등을 통해 지브롤터에 포위군의 처절한 상황을 알렸고, 이를 접한 야쿱은 탕헤르에 14척의 함대를 모았다. 6월 무렵 야쿱은 재차 안달루스로 향하려 하였지만 네피스 지방의 반란으로 모로코에 머무르게 되자 아들 유수프에게 동원 가능한 전함을 모아 알헤시라스 봉쇄를 풀도록 지시하였다. 7월 19일 유수프는 72척의 함대와 출정하였고 기독교 세력의 확장에 맞서기로 합의한 무함마드 2세 역시 12척을 보태주었다. 다음날 (혹은 25일) 그라나다-모로코 함대는 거의 무방비 상태이던 카스티야 함대를 격파하였고, 장교들을 제외한 포로들은 살해되었다. 이로써 카스티야 측은 해군 전력 전부를 상실하였고, 증원된 수비대는 역습에 나섰다. 포위를 이끌던 왕자 페드로는 군대를 두고 도주하였고, 장교들과 공성 병기들은 수비대에게 사로잡혔다. 패전 후 알폰소 10세[6]는 새로운 휴전에 서명하였고, 야쿱은 포위측 진영이 있던 비야 누에바 쪽에 성채를 건설하여 알헤시라스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6. 3차 안달루스 원정 (1282년)
다만 승리 후 야쿱과 무함마드 2세는 재차 엘헤시라스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였고, 이번에는 전자가 알폰소 10세와 동맹하였다. 야쿱은 말라가를 빼앗긴 것에, 알폰소 10세는 알헤시라스 점령에 실패한 것에 대해 무함마드 2세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1280년 왕자 산초가 이끄는 카스티야 군이 그라나다를 공격하였으나 6월 모슬린 전투에서 매복당하여 격퇴되었다. 이에 1281년 알폰소 10세가 친정하여 그라나다 부근까지 진격하였으나 무함마드 2세가 협상에 응하지 않자 회군하였다. 두 차례의 원정에서 야쿱은 카스티야 측을 도왔고, 무함마드 2세는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와 동맹하였다. (모로코-카스티야 vs 그라나다-아라곤) 1281년 야쿱은 재차 그라나다 측과 동맹한 틀렘센에 보복 원정을 가하였다.그러던 1282년 4월, 무함마드 2세의 사주를 받은 카스티야 왕자 산초가 부왕과의 갈등 끝에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왕을 칭하였다. (산초 4세) 세비야로 피신한 알폰소 10세는 야쿱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동맹의 요청에 부응한 야쿱은 같은해 7월 다시 안달루스에 진입하였다. 10월 야쿱과 알폰소 10세는 협정을 체결한 후 함께 산초가 주둔하던 코르도바로 진격하여다. 하지만 산초가 적극적으로 수비에 응하자 야쿱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1283년 야쿱은 해군을 보내 말라가를 공격하였고, 이에 무함마드 2세가 협상을 청하였다. 왕자 유수프의 중재로 양측은 화해하고 함께 기독교 세력에 맞서기로 합의하였다. 같은해 봄 틀렘센의 야그무라센이 거의 반세기에 걸친 치세 후 사망하였고, 그 후계자인 아부 사이드 우스만은 마린 조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기에 야쿱은 근심을 덜 수 있었다.
7. 4차 안달루스 원정 (1285-86년)
1284년 봄에는 알폰소 10세가 세비야에서 사망하였는데, 유언에서 산초 4세 대신 장손 알폰소를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알폰소의 유언을 존중하기로 한 야쿱은 다시 안달루스에 개입하였다. 한편 무함마드 2세의 공격에 시달리던 바누 아쉬킬룰라 역시 야쿱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무함마드 2세는 기존 동맹이던 산초 4세에게 복속하는 등 밀착 관계를 강화하였다. 다만 야쿱은 다라아 협곡의 마킬 베두인 반란 진압에 총력을 기울인 후 1285년 4월에야 군대를 편성해 지브롤터를 건널 수 있었다. 바누 아쉬킬룰라 평정에 나선 무함마드 2세는 코마레스를 점령한 상태였는데, 야쿱은 그 마지막 거점인 과디시를 구원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후 타리파에 본대가 도착하자 야쿱은 이들을 이끌고 헤레스를 포위하였고 분견대를 파견해 메디나 시도니아, 카르모나, 에시하, 세비야 일대를 습격하였다. 산초 4세는 세비야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재건된) 함대를 과달키비르 하구로 보내어 마린 함대의 세비야 공격을 방지하였다. 헤레스 포위는 장기화되었고 8월 산초 4세는 대군과 함께 구원에 나섰다.무리한 회전에 임하는 대신 야쿱은 포위를 풀고 알헤시라스로 철수한 후, 협상에 나섰다. 10월에 양측은 5년 간의 휴전에 합의하였고, 마린 조가 카스티야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카스티야 역시 마린/나스르령 안달루스를 공격하지 않기로 서약하였다. 호의를 표하기 위해 산초 4세는 기존 레콘키스타 전쟁으로 교회가 획득한 안달루스 장서들 중 아랍어 책들을 선물하였고, 야쿱 역시 습격과 약탈로 인한 카스티야 측의 피해에 금전 보상을 해주었다. 카스티야와 휴전한 후 1286년 3월 야쿱은 무함마드 2세와도 휴전 협상에 나섰다. 후자가 마린 조의 타리파, 알헤시라스, 론다, 과디시 영유를 인정하는 대신 야쿱은 기타 안달루스 마을들을 반환하고 그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양측간 갈등의 핵심인 바누 아쉬킬룰라는 모로코로 추방되며, 나스르 왕가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단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협상이 한창이던 3월 21일 고령의 야쿱은 알헤시라스에서 병사하였고, 아들 아부 야쿱 유수프가 계승하였다. 그의 유해는 자신이 라바트에 건설한 셸라 능원에 안장되었다.
8. 여담
우연인지 한세기 이전 무와히드 왕조의 3대 칼리파 아부 유수프 야쿱 (야쿱 알 만수르)과 나사브 (부친명)를 제외한 이름이 같다. 다만 '칼리파' 야쿱의 부친이 아부 야쿱 유수프 (유수프 1세)인데 반해 아미르 야쿱은 아들 이름이 아부 야쿱 유수프이다.- 마린 조
- 4대) 아부 유수프 야쿱
- 5대) 아부 야쿱 유수프 (아부 야쿱 유수프 앗 나스르)
[1] Abu Yusuf Yaqub ibn Abd al-Haqq.[2] 이미 1248년 카스티야의 세비야 포위 시에도 수비대가 돌대포를 사용했다고도 하나 화약 사용 여부는 애매하다[3] 무함마드 2세는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누뇨 곤살레스의 머리를 향수에 담아 몰래 코르도바에 보내어 그곳의 성당에 몸과 함께 안장되게 해주었다[4] 말라가 태수가 산초를 참수하고 주교 반지가 있는 그의 손을 잘라냄. 수급은 모로코 측에, 손은 그라나다 측에 주어짐[5] 전령 비둘기[6] 그는 군대를 버려 희생을 키운 아들 페드로 대신 애꿎은 유대인 징세관 이샤크의 재산을 압수하고 처형하는 졸렬함을 보인다. 한편 1270년 해군 중심으로 창설된 산타 마리아 데 에스파냐 기사단은 이듬해인 1280년 산티아고 기사단에 흡수되어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