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31:20

아스카르 아카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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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 초대 대통령
아스카르 아카예프
Аскар Акаевич Акаев
<colbgcolor=#E8112D><colcolor=#ffff00> 출생 1944년 11월 10일 ([age(1944-11-10)]세)
소련 키르기스 SSR 키질바이라크
국적
[[키르기스스탄|
파일:키르기스스탄 국기.svg
키르기스스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재임 초대 대통령
1990년 10월 27일 ~ 2005년 3월 24일
배우자 마이람 아카예바
자녀 2남 2녀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 개요2. 생애3. 1990년 대통령 선거4. 대통령5. 아짐벡 벡나자로프 사건6. 실각7. 영향과 재평가8. 근황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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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르기스스탄의 정치인으로,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2. 생애

추이주 키질바이라크[1]의 집단 농장 직원의 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 때인 1961년 금속공으로 취업했다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였다. 이 시절 마이람 아카예바를 만나 슬하 2남 2녀를 두었으며, 자녀들 모두 레닌그라드 출신이다. 대학 졸업 이후에는 모교에서 강사 및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1977년 고향인 키르기스스탄으로 돌아왔다. 1984년 키르기스스탄 과학원에 가입한 이후 1987년 과학원 부원장이 되었으며, 1989년에는 원장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최고 소비에트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90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 1990년 대통령 선거

그가 정계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소련은 개혁·개방이 진행 중이었고, 소속 공화국들의 자치권이 보다 확대되면서 내부적으로 독립의 목소리가 보다 더 커진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각 공화국들의 대통령직들이 신설되어, 실권을 지역 공산당 제1서기에서 대통령으로 서서히 옮겨가려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90년 10월 27일 키르기스스탄 역사상 첫 대통령 선거가 열렸고, 아카예프는 여기에 출마를 선언했다. 허나 선술한 그의 경력을 고려할 때 그는 정계에 갓 입문한 신인이었고, 공산당 제1서기도 아니었다. 1서기직은 1985년부터 압사마트 마살리예프가 쥐고 있었는데,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처럼 그 당시에 공산당 제1서기직을 맡고 있던 인물들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듯이 키르기스스탄의 대통령직도 마살리예프가 유력한 상황이었다. 허나 이러한 이변이 무색하게, 정치 초보에다가 인지도도 낮았던 아카예프가 대통령에 선출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물론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이변은 그의 앞날에 대한 선견지명이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4. 대통령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 당시 키르기스스탄과 소련은 해체될 지도 모르는 위기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반소 감정이 극에 달했던 발트 3국이나 몰도바 등 유럽 쪽에서는 독립파들이 대거 소련 정계에 진입하는 등 독립 분위기가 극도로 고조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소련 자체를 해체하자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었다. 물론 중앙아시아 주민들은 소련 해체를 강경하게 반대했고, 키르기스스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소련 존속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도 키르기스스탄은 95.98%가 소련 유지에 찬성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해당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선거는 결국 무의미해졌고, 최종적으로 8월 쿠데타를 거치면서 소련은 더욱 더 위태로워졌다. 그래도 어떻게든 소련 해체를 막으려고 발악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중앙아시아 지역 + 정치 신인이라는 메리트를 갖고 있던 아카예프에게 부통령직을 제안했으나, 소련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아카예프는 이를 거절했다. 마침내 소련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고, 아카예프는 소련 공산당을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단독 후보로 출마해 독립 키르기스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소련 공산당 출신이었고 1991년 당시만 해도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하였지만, 소련 해체 이후에는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민영화 추진 및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등, 우파 자유주의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소련 공산당 제1서기 출신으로서 완벽한 소련 서기장 마인드를 갖고 독재 통치를 일삼은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아카예프는 정치 신인 출신이라는 특이한 배경 탓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유연하고 개혁적인 인물이었으며, 당시 서방 언론에서도 그를 "민주적인 지도자"라고 치켜세웠을 정도였다. 당시 범국민적으로 인기가 폭발적이었으며, 극소수의 러시아계 주민들의 지지까지도 받는 등 그의 재선은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재선에 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초창기의 평가가 무색하게, 그도 여느 중앙아시아 지도자들처럼 서서히 독재의 길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1991년 5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대선은 1996년 8월에 치러져야 했지만, 그는 이 대선을 1995년 12월로 앞당겨 치렀다. 물론 내각제에서는 예상보다 한참 일찍 조기 총선을 치르는 사례도 있기 때문에 뭐가 문제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키르기스스탄은 엄연한 대통령제 국가였고, 대통령제 국가에서 현직 대통령의 궐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선거를 대통령 임의로 앞당겨 치르거나 하는 행위는 독재로 의심 받을 여지가 충분했다. 항간에서는 전술한 폭발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키르기스스탄 민족주의를 앞세워 키르기스어가 딸리는 유권자들의 참정권 제한 등의 행보로 인해 러시아계들을 중심으로 민심 이반의 조짐이 보이자, 이를 노리려는 야권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거를 "급조"한 게 아니냐는 평이 있을 정도. 실제로 수많은 야권 후보들이 석연찮은 이유로 대법원과 선관위의 퇴짜를 맞는 등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었다. 물론 이런 거 다 제쳐두고, 그는 한때 자기 대신에 대통령이 될 뻔했던 마살리예프를 압도적으로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재선으로 만족하지 않은 그는 2000년 3선에 도전하는 등 노골적으로 권력욕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물론 헌법 상 3선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2000년 대선에 원칙적으로 출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아카예프가 초선(1991년)한 이후인 1993년 5월에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새 헌법 치하에서 당선된 이력은 1995년 대선 딱 한 번이므로 그가 2000년 대선에 출마하는 것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 말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현행 헌법은 1993년 5월에 제정되었고 채택 이후인 1995년 대선에 당선된 것은 "초선"이니 2000년 대선에 출마하는 것은 "재선" 출마이므로 법적으로 아무 하자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개헌을 통한 꼼수는 적잖은 독재자들이 장기집권을 정당화하려는 행위로 자주 애용되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뻔한 변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연히 야권은 반발했으며 그의 대항마들이 아카예프를 심판하려는 목적으로 출마를 시도했지만, 아카예프는 이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반격했다. 일례로 이 중 하나였던 톱추벡 투르구날리예프는 아카예프 암살 미수 혐의로 징역 16년 형을 선고 받고 투옥되었다. 물론 이번에도 아카예프가 압도적으로 연임에 성공했지만, 경쟁자였던 오무르벡 테케바예프는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으면 자신이 이겼을 거라고 밝히는 등 극대노하였다.

이렇게 각종 꼼수와 편법을 가리지 않고 장기집권을 획책한 아카예프였지만, 그의 장기 독재에 슬슬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 또한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5. 아짐벡 벡나자로프 사건

그러던 중 2002년 3월, 야당 의원 중 한 명인 아짐벡 벡나자로프가 특권 남용 혐의로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독재자의 전형적인 야당 인사 탄압으로 보이겠지만, 여기에는 좀 복잡한 일이 얽혀져 있다.

사건의 발단은 벡나자로프의 개인사가 아닌 무려 중국과의 국경 문제 때문인데, 이 문제를 굳이 따지려면 186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키르기즈스탄이 생기기도 전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청나라가 지배하고 있던 키르기즈인 구역 일부를 떼갔는데, 아편전쟁홍콩 섬을 떼간 영국이 그랬듯이 청나라를 상대로 한 전형적인 늑약이었다. 당연히 청나라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지만 방대한 영토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콩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을 잃어버린 영국 앞에 당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국력은 너무나도 약했던 탓에 당시에는 청나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리하여 약 수십년 동안 이 문제는 사그라드는 듯 싶었다. 그런데 국공내전 이후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고, 대만으로 쫓겨난 중화민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킬 정도로 강력한 패권국으로 급부상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홍콩 반환까지 성사되면서, 키르기스스탄 영토 문제도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분쟁은 소련 시절부터 불거졌지만, 당시에는 냉전 시대라 중국과 소련 사이가 아무리 좋지 못하다 하여들 서로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대놓고 제2세계가 미국 등을 위시한 제1세계에게 패했다고 대놓고 자랑하는 꼴이었기 때문에, 이 때는 이 문제가 있어도 분쟁으로 일으키지 않기 위해 조용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도 종식되고, 키르기즈스탄이 이 문제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중국은 다시금 이 문제를 태클 걸기 시작한다. 이에 1996년 양측이 1차 합의를 하여 1998년부터 적용시키기로 하였지만, 결과가 영 신통치 않았는지 재합의 끝에 1999년 다시 합의를 타결했다. 당시 아카예프와 장쩌민은 분쟁을 완전 종식시키려는 목적으로 양측 간의 영토를 일부 교환하기로 합의했는데, 문제는 여기에 무려 9만 헥타르, 즉 900㎢에 달하는 영토를 중국에게 넘기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저 900㎢가 얼마나 큰지 감이 잘 안 온다면, 군위군 편입 이전의 대구광역시 영역 만큼의 영토를 중국한테 넘기겠다는 것이다.

이에 내부적으로 크게 반발이 일었고 벡나자로프는 이 문제를 꺼내들며 이건 완전 대통령 탄핵감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러나 아카예프는 자신을 강하게 비판한 벡나자로프를 좋게 볼 리가 없었고, 그를 "국회의원으로서 누리는 특권을 남용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워 구금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에 대한 재판이 2002년 3월 잘랄아바드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벡나자로프를 지지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아카예프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경찰은 15분 안에 해산하지 않으면 강경 진압하겠다고 엄포를 내놓았다. 당연히 시위대는 해산을 거부했고, 이에 경찰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5명이 사망하고 경찰 및 시위대를 포함해 총 6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비슈케크에서도 벡나자로프를 지지하는 시위가 열렸지만 이 또한 진압되었다.

비록 두 시위 다 강경하게 진압되었고 독재적인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의 대규모 집회는 벌어질 수 없었지만, 이후에도 산발적으로 벌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아카예프 실각의 서막이나 마찬가지였다.

6. 실각

이렇게 국내외로 비판이 지속되고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자, 아카예프는 2005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어차피 백 번 양보해서 2000년 대선이 재선이라고 쳐도, 2005년 대선은 빼박 3선이 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불출마 선언 또한 적잖은 독재자들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뒤집고 재출마해서 연임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그의 불출마 선언에 의구심을 제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2005년 총선을 앞두고 딸 베르메트 아카예바전진하라, 키르기즈스탄이여!(이하 전진당)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아들 아이다르 아카예프[2]까지 가세해 출마하여 기어이 당선되었다. 비록 전진당은 75석 중 17석 밖에 차지하지 못했지만, 무소속인 아카예프를 지지하는 무소속 의원들이 대거 당선되었고, 이 때문에 전진당이 고작 17명 밖에 당선시키지 못한 것은 누가 봐도 뻔한 쇼였다. 게다가 이 선거 자체가 부정으로 얼룩져서, 수 많은 야권 후보들의 낙선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정황들이 발견되기까지 했다. 결정적으로, 대통령이 자녀를 직접적으로 정계에 입문시켜서, 아카예프가 총선 이후에 치러질 대선에 불출마하더라도, 베르메트나 아이다르에게 대놓고 세습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질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는 아예 작정하고 개헌까지 해서 아카예프가 종신 집권을 꿈꾼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이에 오쉬와 잘랄아바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오쉬에서는 시위대가 오쉬 국제공항을 점거하는 일이 터졌다. 이 또한 정부의 강경 진압이 예상되었으나, 이렇게 했다가는 자칫 대규모 학살로 이어져 국제 사회의 거센 비난에 시달릴 것이 뻔했고, 아카예프가 노리던 외국인 투자자 유치에도 실패할 것이 우려되었다. 결국 아카예프는 강경 진압을 하지 말 것을 천명했고, 시위대와 대화의 준비가 되어 있다며 한발 물러선 모습을 보였으나, 야권은 대통령이 직접 협상에 나서지 않는다면 무효라며 반발했다. 결정적으로, 아카예프 본인이 사퇴를 거부했고, 바키르딘 수반베코프 내무장관과 믹티벡 압딜다예프 검찰총장을 "시위 문제 해결 실패"를 이유로 해임하면서, 국제 사회의 비판은 개나 줘버리더라도 외국인 투자자들만은 놓치지 않으려는 아카예프의 속셈이 그대로 드러난 꼴이 되어버렸다.

결국 참다 못한 전국민이 폭발하여 대규모로 들고 일어났다. 규모가 어찌나 컸는지, 수도이자 최대도시인 비슈케크를 점거했으며 비슈케크와 거리가 먼 남부지방의 대도시 및 중소도시들도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자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아카예프는 3월 24일 가족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로 떠났다. 일단은 사임을 거부했으나, 자녀들의 국회의원 당선도 무효 처리되었고 아카예프 일가의 각종 특권들 및 아카예프 본인의 초대 대통령 타이틀마저 박탈되자 공식적인 사직서를 제출했고, 4월 11일 국회는 사직서를 수락했다.

7. 영향과 재평가

이렇게 허무하게 몰락한 아스카르 아카예프였지만, 그래도 국민들의 반발에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을 사퇴했다는 점에서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인접한 우즈베키스탄에도 영향을 미쳐 안디잔에서도 이슬람 카리모프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나, 이 쪽은 결국에는 이슬람 카리모프 정권에 의해 유혈진압되었다.

민중 봉기로 아스카르 아카예프라는 독재자 한 명을 제거했지만, 이 것만으로 키르기즈스탄의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당 지도자이자 아카예프의 퇴진을 주도했던 인물 중 하나인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집권했지만, 그 또한 아스카르 아카예프와 다를 바가 없는 독재자로 흑화하여 범국민적인 반발을 샀으며, 결국 민중봉기로 실각하여 아스카르 아카예프 시즌 2가 되고 말았다.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까지 쫓겨난 후에야 키르기즈스탄은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서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하였고, 최종적으로는 특정 정당의 과반 의석 확보 금지 등의 극단적인 초강수를 단행한 끝에야 비로소 민주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헌데 민주주의가 정착하기에는 그닥 적합하지 않은 키르기즈스탄에서 이렇게 무리한 민주화는 독이 되었다. 아스카르 아카예프에서 쿠르만베크 바키예프에 이르기까지 민주화를 주도했던 야권세력은 한둘이 아니었고, 이들이 권력을 잡은 후에 키르기즈스탄은 수 많은 정당들이 난립하면서 되레 정치적 불안이라는 또 다른 문제를 안게 되었다. 여기에 오랫동안 소련식 일당 독재에 익숙했던 키르기즈스탄 정치인들은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도 그러한 마인드를 버리지 않아서, 다른 정당들을 무조건적인 적으로 돌리고 협력을 일체 거부하기까지 했으니, 정국 혼란이 고착화되었고, 이는 안 그래도 중앙아시아 최빈국인 키르기즈스탄의 경제를 더욱 나락으로 빠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이면서도 경제가 순항하던 아스카르 아카예프를 그리워하기 시작했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되레 독재 부활을 외치기 시작했다. 민생은 제쳐두고 나라를 말아먹는 민주정부보다는 민생과 나라를 위해 힘쓰는 독재자가 백 배 천 배는 낫다는 것. 이러한 민심과 향수를 잘 파악한 사디르 자파로프가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2021년에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키르기즈스탄은 아스카르 아카예프 시절과 비슷한 대통령중심제 독재국가로 돌아갔다. 국제 사회, 특히 서방에서는 키르기즈스탄의 독재 부활을 두고 안 좋게 보며 비판하지만 어차피 키르기즈스탄이 북한마냥 국제사회의 눈 밖에 날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만 존중해 준다면 독재든 민주주의든 상관 없으니 사디르 자파로프가 대형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실각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은 상황이다.

8. 근황

러시아로 쫓겨난 아스카르 아카예프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도움으로 러시아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게 되었고, 현재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쭉 근무하고 있는 중이다.

망명한 이후에는 역대 키르기즈스탄 정부는 아스카르 아카예프의 귀국을 일절 금지했으나, 2021년에 사디르 자파로프가 집권하고 나서 이러한 조치가 풀렸으며, 그에게 걸려 있던 각종 재판 및 범죄 혐의가 모두 다 기각되었다. 즉 사디르 자파로프의 사면을 받은 것. 덕분에 16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2020년에 아들인 아이다르 아카예프가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9. 여담

  • 아스카르 본인의 성씨는 "아카예프"지만, 정작 부친의 성씨는 "토코예프(Токоев)"다. 이렇게 된 이유는 원래 키르기즈스탄을 포함한 튀르크 지역이 전통적으로 성씨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성씨 대신 부계명을 쓰는 경향이 있었는데, 아카예프가 태어날 무렵이던 1940년대가 돼서야 소련이 성씨를 강제하는 정책을 펼쳐 비로소 정착했기 때문이다. 이 때 중앙아시아인들은 부계명을 러시아식으로 변형하여 자신의 성씨로 채용했는데, 하필이면 막 성씨 문화가 정착하던 시점이라 부모와 자녀의 성씨가 다른 경우들이 많았다.
    • 아스카르 본인의 풀네임인 "아스카르 아카예비치 아카예프"와 부친의 이름인 "아카이 토코예프"의 이름을 풀어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스카르의 성씨와 부칭에는 공통적으로 부친의 이름인 "아카이"가 들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이 "아카이"를 러시아식 작명법을 적용하여 "아카예비치"라는 부칭과 "아카예프"라는 성씨를 만들어낸 것이다. 부친 아카이는 "토코예프"라는 성씨를 통해 아카이의 부친, 즉 아스카르의 조부의 이름이 "토코이" 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아카이는 부칭이 없는데, 이는 러시아 법률 상 1세대는 러시아식 작명법이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3]
  • 친러 성향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러우전쟁)에서도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다. 다만 대통령 시절 나름 친서방 행보를 보이기도 했던 그의 친러 행보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애초에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쫓겨난 후 러시아에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이 누구인지 잘 생각해 보자. 게다가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쫓겨났던 당시만 해도 블라디미르 푸틴은 지금과는 달리 친서방으로도 분류되던 시절이었다. 즉 아스카르 아카예프 집권기의 친서방 행보도 현대의 친서방과는 결이 좀 다르다. 번외로 아스카르 아카예프를 사면해준 사디르 자파로프도 친러 성향이다. 이러니 아카예프가 더더욱 친러 성향을 띌 수밖에 없다.
  • 중앙아시아 5개국 초대 대통령들 중 유일하게 소련 공산당 제1서기를 거치지 않은 인물이다.
  • 나무위키 내 중앙아시아 5개국 초대 대통령 문서들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으로 작성되었다. 다만 소련 15개국으로 확대하면 가장 마지막은 아니다.


[1] 뜻은 "적기(赤旗)"이며, 이 지명을 가진 지역이 3곳이나 있다. 하지만 구글맵에 검색해 보면 추이주의 키질바이라크는 나오지 않는다.[2] 카자흐스탄의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딸 알리야 나자르바예바하고 결혼까지 했다.[3] 이는 이민자들도 마찬가지라서 러시아 이민 1세대들은 부칭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가령 안현수는 귀화 이후 러시아식 이름인 "빅토르 안"을 택했지만, 부칭은 없다. 안현수의 부친 이름은 안기원인데, 일부는 "기원"을 러시아화한 "키본"을 바탕으로 "빅토르 키보노비치 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 "키보노비치"는 법적 효력은 없다. 다만 러시아 태생으로 2세대인 딸 안제인부터는 이 법이 강제로 적용되며, 정황 상 안제인의 러시아식 이름은 "제인 빅토로브나 안" 혹은 제인의 러시아형인 이바나를 따서 "이바나 빅토로브나 안"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