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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왕국 제12대 국왕 아하스 אָחָז | Ahaz | |||
<colbgcolor=#0038B8,#467EFF><colcolor=#fff> 출생 | 기원전 763년경 | ||
예루살렘 | |||
사망 | 기원전 727년경 | ||
예루살렘 | |||
재위 기간 | 제12대 남유다 왕국 국왕 | ||
기원전 736년 ~ 기원전 720년 (약 16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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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요담 | ||
후임자 | 히즈키야 | ||
부모 | 아버지 요담 | ||
자녀 | 히즈키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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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하스는 20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16년 간 다스렸다.[1]
그는 다윗처럼 야훼의 눈에 드는 바른 정치를 펴지 못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전철을 밟아 우상을 부어 바알들을 섬기기까지 하였다.[2]
역대하 28:1~2
그는 다윗처럼 야훼의 눈에 드는 바른 정치를 펴지 못하고
이스라엘 왕들의 전철을 밟아 우상을 부어 바알들을 섬기기까지 하였다.[2]
역대하 28:1~2
유다의 제12대 왕. 할아버지는 웃시야, 부친은 요담이었다.
2. 생애
2.1. 우상 숭배
아하스의 종교적 죄악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자신의 아들을 우상 몰록의 제물로 바치는가 하면, 선조들이 힘들게 없앤 우상들을 다시 제조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마스쿠스의 신들을 의지하였다. 또 유다의 각 성읍마다 산당을 만들기도 했는데 야훼 신앙관의 시각으로 볼 땐 엄청난 죄였다. 어찌나 많이도 했는지 아들인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이 사람이 행한걸 되돌리는 작업이었다고.2.2. 다메섹 & 북이스라엘 연합군, 에돔의 침입
이 시기에 아람-다마스쿠스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유다에 쳐들어왔다.[3] 그리고 이 틈을 틈타서 남쪽의 에돔까지 침입하였다. 이미 아람과 연합을 해야 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많이 약화된 북이스라엘[4]만으로도 아하스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며 결국 아시리아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때 아시리아에게 보낸 친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아하즈는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간청하였다. "나는 왕의 신하이며 아들입니다. 내가 지금 시리아 왕과 이스라엘 왕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셔서 나를 그들의 손아귀에서 건져주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16:7 (공동번역성서)
열왕기하 16:7 (공동번역성서)
즉 당시 아시리아의 왕이었던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열왕기 및 역대기 번역판에는 디글랏빌레셀)에게 칭신을 한 것. 고대에 한 국가가 강대국에 종속당하거나 신종할 때 군신 내지 형제관계를 맺는 건 흔하디 흔했기 때문에[5] 그렇게 한 것이다. 이에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연합군을 완파하고 아람-다마스쿠스 왕 르신도 죽여서 유다 왕국에 도움을 주었다.
이때 이사야의 예언이 압권.
그에게 일러라. '진정하여라. 안심하여라. 겁내지 마라. 르신과 그가 거느린 시리아인, 그리고 르말리야의 아들이 격분한다고 해서 정신을 잃지 마라. 그들은 연기나는 두 횃불 끄트머리에 불과하다. 시리아인들이 너를 치려고 에브라임 사람 르말리야의 아들과 공모하여 말하기를, 유다로 밀고 쳐들어가 점령하자, 그리고 타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자고들 하지만, 주 야훼가 말한다. 그것은 그렇게 될 수도, 그럴 수도 없는 일,
(ㄱ)시리아의 수도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고작 르신이다. (ㄴ)육십오 년만 지나면 에브라임은 망하여 민족으로서의 구실을 못하게 되리라.
(ㄱ)에브라임의 수도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우두머리는 고작 르말리야의 아들이다. (ㄴ)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
이사야 7:4~9 (공동번역성서)
(ㄱ)시리아의 수도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고작 르신이다. (ㄴ)육십오 년만 지나면 에브라임은 망하여 민족으로서의 구실을 못하게 되리라.
(ㄱ)에브라임의 수도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우두머리는 고작 르말리야의 아들이다. (ㄴ)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
이사야 7:4~9 (공동번역성서)
3. 죽음
이후 아하스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를 만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들렸다가 다마스쿠스에 있던 제단의 양식을 제사장에게 보내서 만들라고 지시한 것을 시작으로, 성전 기물을 치우며 성전 문을 봉쇄하는 등 성전을 개조하였다. 위 그림에서의 아하스는 바로 이 성전 기물들을 치우는 모습이다.아하스는 B.C 716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후 아들 히즈키야가 왕위를 계승한다.
4. 평가
성경에서는 야훼 신앙을 소홀히 하고 성전을 강대국의 비위에 맞춰 개조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서 당연히 엄청나게 악한 왕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역으로 외교적으로는 현명한 왕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그 시대의 강대국들을 잘 파악하고 그들에게 잘 대해 주는 왕이었다는 점에서 말이다.[6][7] 무엇보다 북이스라엘이 아하스 시절에 멸망했다.[8] 즉 잘못했으면 남유다도 북이스라엘처럼 이 시기에 사이좋게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어영부영 이 시절을 잘 넘겨서 남유다는 므낫세-아몬-요시야 시절의 중흥기라도 맛보고 무려 100여년 동안 더 지속될 수 있었다.다만 그렇다고 해도 마냥 올려칠 수는 없다. 아시리아에게 굴복한 것까지야 외교적 성과라고는 할 수 있으나, 아시리아를 제외한 주변국들에게 두드려맞고 에돔이 독립해나가 경제적인 손실을 본 것을 타개하지 못한 것도 그렇고, 이전 남유다 왕인 웃시야처럼 무슨 내적인 치적을 남긴 것도 아니니 종교적 관점을 떼어놓고 봐도 명군이라고 평가받기엔 부족한 임금이다.
유다에서 해시계[9]를 만든 왕으로 아들 히즈키야도 이 해시계를 사용했다.
한편, 무려 만 11세 정도에 자식, 즉 훗날의 헤제키야를 낳아 당대 많은 이에게 놀라움을 준 임금이기도 하다. 당시 헤제키야의 어머니가 만 16세 정도였고, 현대 의학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나[10] 적어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많이 놀랍게 생각한 건 분명하다.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한 예언의 당사자는 사실 예수가 아니라, 바로 헤제키야였기 때문. 다만 아하즈의 아들 헤제키야는 첫 아들인 메나쉐를 무려 만 49세에 보았기에 손자와는 나이차가 딱 약 60년이 되어, 조손간 세대차는 거의 맞춰지게 된다.[11]
[1] 이 중 12년은 아들 히즈키야와 공동 통치한 것으로 추정한다.[2] 남유다 역사상 바알 신을 섬긴 왕은 많이 없었는데, 이렇게까지 얘기할 정도면 그의 우상숭배의 정도가 정말 심각했다는 뜻.[3] 이 때 유다에서 12만명이 죽었다고 역대기에 쓰여져 있으나, 열왕기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다.[4] 이 시기의 북이스라엘 왕국은 툭하면 군사변란이 일어나 왕이 시해되는 혼란기였다. 당장 이 때 침략했던 왕 베가도 전왕 브가히야의 부관 출신이었으나 브가히야의 목을 따고 왕위에 오른 상태였다. 그리고 그 베가도 호세아에게 피살되는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그 호세아마저 아하스 재위기에 아시리아에게 항복함으로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한다.[5] 세계사까지 갈 것도 없이 한국 역사에서도 이런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6] 실제로 아하스와는 달리 아들 하즈키야는 아하스와는 정 반대로 행동하다가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개털린다. 그나마 운이 좋아서 나라가 망하진 않았다. 만일 이 때 유다가 망했다면 요시야 같은 군주는 없었을 것이고 바빌론 유수는 니네베 유수가 되어 유대인의 역사도 많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7] 특히나 아하스 시절, 아람, 북이스라엘, 에돔이 다구리를 쳤는데 북이스라엘조차 홀로 감당 못하는 국력상 살아남으려면 아시리아의 도움을 받는건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8] 아하스 재위 후반부에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북이스라엘이 멸망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아하스를 곤경에 빠뜨린 북이스라엘이 너무 빨리 멸망한 것이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아하스 시절에 재위한 북이스라엘 왕만 2~3명이며 그 2~3명의 왕조도 서로 다를 정도로 혼란기였다.[9] 개역한글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일영표(日影表), 공동번역에서는 아하즈의 계단으로 나온다. NIV와 NASB에서는 stairway로 다온다.[10] 실제로 약 2200년 뒤 조선의 세자가 만 11세에 아들을 본다.[11] 물론 헤제키야가 세대차 맞추려고 메나쉐를 늦게 낳은 게 아니라, 낳으려고 노력했지만 계속 딸이 태어나는 등으로 아들을 보지 못했을 개연성이 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