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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왕국 제19대 국왕 여호야킨 יְהוֹיָכִין | Jehoiachin | |||
<colbgcolor=#0038B8,#467EFF><colcolor=#fff> 출생 | 기원전 616년경 | ||
예루살렘 | |||
사망 | 기원전 598년경 | ||
바벨론 | |||
재위 기간 | 제19대 남유다 왕국 국왕 | ||
기원전 598년 (약 3개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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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여호야김 | ||
후임자 | 치드키야 | ||
부모 | 여호야김 | ||
자녀 | 셔알티엘, 브다야를 비롯한 일곱 양아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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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다의 제19대 왕. 본명은 고니야로, 널리 알려진 왕명인 여호야킨(יְהוֹיָכִין, 성서 히브리어 기준 Yəhōyāḵīn[jəhoːjaːˈxiːn]으로 발음된다.)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개명한 이름이었다. 전임 국왕 여호야김의 아들. '야웨께서 성취하신다'라는 뜻이었다. 처음에는 석 달 동안 유다 임금으로 있다가 바빌론으로 끌려갔다가, 37년 수감생활 후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사망하자 후임 바빌론 왕 아멜마르둑이 호의를 베풀어 석방해줘서, 삼국지의 유선 비슷하게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게 된다.사료2. 생애
사실 당대 감각으로는 진정한 마지막 유대 국왕으로 여겨졌고, 여호야킨 뒤에 망하기 전까지 국왕이었던 치드키야는 일종의 섭정 쯤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부왕과 마찬가지로 다소 비현실적인 자주 정책을 주장한 선지자 집단에게 강경 정책[1]을 유지했기에 구약 성서 형성에 주로 관여했던 선지자 집단에게 부왕의 악평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치드키야는 상대적으로 이들에게 온화한 편이었기에 나중가선 그나마 치드키야가 평가가 올라가 정식 국왕 취급을 받게 되었을 뿐이다.3. 그 외
마태복음에 따르면 나자렛의 요셉의 조상이지만, 누가복음에 따르면 나자렛의 요셉의 조상은 여호야킨이 아닌 네리다. 이 부분은 유명한 성경상 난점이었고 여러 가설이 분분했으나 최근 밝혀진 바빌론 고고학이 이 모순의 비밀을 일부 밝혀냈다. 마태복음은 법적 족보고, 누가복음은 혈통이 우선되는 족보라는 종래의 가설이 더욱 확실해졌기 때문이다.일단 요셉은 법적으로 여호야킨의 후손인 건 맞지만, 혈연상으론 아닌 게 분명하다. 여호야킨의 일곱 아들은 바빌로니아로 사로잡혀가서 전원 거세당한 후 환관이 되었기에[2], 여호야킨의 혈통적 계보는 끊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호야킨은 촌수로는 상당히 먼 네리의 일곱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들였는데 그중 네리의 둘째 아들 브다야의 아들이 바로 즈룹바벨이다. 즉, 여호야킨은 즈룹바벨의 양할아버지다.
성경 계보에서는 셔알티엘이 여호야킨의 장자로 나와 있으나, 셔알티엘은 본디 네리의 장자였고 그 또한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기에 셔알티엘의 바로 아래 동생이자 여호야킨의 또 다른 양자인 브다야가 형사취수제로 낳은 게 즈룹바벨이었다.[3] 고로 즈룹바벨의 법적 아버지는 셔알티엘, 법적 조부는 여호야킨이 맞다. 한편 여호야킨의 먼 친척동생이자 즈룹바벨의 친조부 네리에 대해 말하자면, 네리는 솔로몬의 동복동생 나단[4]의 후손이므로 다윗의 후손은 맞다. 다만 촌수만 따지면 상당히 먼 건 사실이다.
[1] 그나마 이르메야(=예레미야)의 신바빌로니아 투항론은 역설적으로 당대에 가장 현실적인 외교 정책이긴 하였으나, 선지자 집단의 기득권을 비판하는 사회개혁론 및 자주 정책론에 진절머리냈던 기득권층 입장에선 이르메야도 그 전 있었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짜증나는 존재에 불과했다. 사회개혁을 주저하던 당대 유대 기득권층이 성경에선 상당한 저주와 질타의 대상이긴 하지만, 강대국과의 친선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그때까지의 선지자 집단의 외교정책안이 상식적인 위정자 입장에선 대단히 비이성적으로 여겨질 소지는 높았다.[2] 최근 고고학적 자료에서 확증됨. 국내 발간된 IVP 성경난제주석 저서 참조[3] 브다야는 역대하 족보에서는 등장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건 이것이 이유다. 형사취수로 낳은 양자는 거의 그냥 친아들 대우라서 그냥 입양한 양자 사이에는 또 다른 격차가 있었기 때문이다.[4]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우리야의 아내 밧쉐바 소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