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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왕국 제16대 국왕 요시야 יאשיהו | Josiah | |||
요시야 왕과 율법서를 발견한 대제사장 힐기야 | |||
<colbgcolor=#0038B8,#467EFF><colcolor=#fff> 출생 | 기원전 648년경 | ||
예루살렘 | |||
사망 | 기원전 609년경 (향년 39세) | ||
예루살렘 므깃도[1] | |||
재위 기간 | 제16대 남유다 왕국 국왕 | ||
기원전 640년 ~ 기원전 609년 (3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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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 | 아몬 | ||
후임자 | 여호아하즈 | ||
부모 | 아버지 아몬 어머니 여디다 | ||
배우자 | 하무달, 스비다 | ||
자녀 | 여호난, 여호야김, 여호아하즈, 시드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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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경의 등장인물로 남유다의 16대 왕. 사실상 남유다의 마지막 왕.[2] 성경에 따르면 남유다에서 히스기야왕과 더불어 몇 없는 선한 왕으로, 시조인 다윗처럼 야훼를 신실히 섬기면서 종교 개혁을 이루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그 뜻을 다 펼쳐보지 못하고 씁쓸히 비명횡사했으며, 요시야 이후 남유다는 외세의 간섭과 무능한 군주들의 콤보로 멸망하고 만다.2. 즉위와 역사적 배경
아버지는 아몬이었으며 할아버지는 므낫세, 증조부는 히즈키야였다. 할아버지 므낫세가 죽은 뒤 아버지 아몬이 왕이 되었지만, 재위 2년만에 궁정 쿠데타로 인해 살해당했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요시야는 쿠데타 세력을 척결한 뒤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할 때 그의 나이는 고작 8세였다. 요시야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으로도 성경을 비롯한 유대 기록에서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는 무관하게, 므낫세 시대에 재건된 국가 경제의 성장과 인구 증가는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다.[3]요시야의 치세는 새로운 국제 질서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오리엔트의 초강대국 신아시리아 제국은 긴 흥성기가 끝나고 쇠퇴 일로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아시리아 최후의 명군 아슈르바니팔의 통치 말기부터 아시리아는 스키타이와 이란 고원의 엘람, 메디아와 끝없는 항쟁을 벌였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국력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627년 아슈르바니팔이 사망하면서 제국을 분할상속한 그의 두 아들은 왕위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이는 아시리아의 쇠퇴를 가속화하였고, 끝내 제국을 멸망으로 이끌게 된다.
아시리아가 쇠퇴하자 중동 전체는 힘의 공백에 빠졌고, 새로운 강국들이 아시리아를 대체하기 위해 일어서기 시작했다. 동쪽의 이란 고원에서는 아시리아의 적국이던 메디아가 반격에 나섰고, 아슈르바니팔에게 정복당한 엘람 역시 다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신흥 강국은 따로 있었다. 고대의 전통적인 강국이었던 이집트와, 아시리아에게 정복당한 뒤 끝없이 독립을 추구하던 숙적 신바빌로니아였다. 독립에 성공한 신바빌로니아는 메디아와 연합한 뒤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아시리아는 동지중해 지역(시리아와 레반트 지역)에 배치했던 병력을 동쪽으로 빼내야 했다. 아시리아가 물러난 동지중해는 이집트 제 26왕조의 파라오 프삼티크 1세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4]
그의 즉위(기원전 641년)부터 그의 치세 전체는 이러한 중동 전체의 격동기와 정확히 겹친다. 이는 요시야의 고조부 아하스 시절부터 시작된 남유다에 대한 아시리아의 종주권이 끝났다는 것 뿐만 아니라, 오래 전에 멸망한 뒤 아시리아의 직할령이 된 옛 형제국 북이스라엘의 고토가 무주공산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치세는 많은 남유다인들에게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가 온 시대였다. 북이스라엘의 고토를 회복하여 히스기야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왕국을 재건할 절호의 기회를 잡은 시대였던 것이다. 요시야 역시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읽고 있었고, 통일 이스라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매진하기 시작했다.[5]
3. 종교 개혁
요시야 시대의 가장 큰 치적은 바로 종교 개혁이었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요시야의 치세 이전부터 남유다 백성들의 대다수는 혼합주의(Syncretism)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이들은 현대 유대교처럼 오직 야웨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야웨도 믿고 가나안의 토착신이나 다른 지방의 신들 역시 함께 믿고 있었다.[6] 그러나 북왕국의 고토를 회복하여 통일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사업 자체가 "야웨의 뜻"이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는 일이었고, 이를 위해 국가의 역량을 결집하고 백성들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정신적 고양과 선전이 필요했다. 따라서 요시야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규모 사업을 일으켜 혼합주의를 뿌리뽑고 야웨만을 섬기는 일신주의를 확고히 정착시키려고 했다.종교 개혁의 시작은 율법책의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열왕기하에 따르면 요시야 재위 18년에 폐허가 된 성전을 수리하던 도중 대제사장 힐기야가 우연히 성전 안에 있던 율법서를 발견했고, 이를 읽은 왕이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고 이를 어찌해야 할지 힐기야 등을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내 자문했으나, 훌다는 "거듭된 이스라엘족의 배신으로 이미 야훼의 진노하심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달했고, 그 징벌이 기록의 한 치도 다름이 없이 내려질 것이나, 요시야만은 야훼의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순종했으니 그는 그 징벌을 보지 않고 평안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에 요시야는 율법서를 기반으로 이방 신상의 철거, 우상 제사장 처단, 예배 방식의 정화, 유월절 같은 유대교의 절기 준수 등의 대규모 개혁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때 "발견된" 율법서는 구약 성경의 핵심인 모세오경 전체, 혹은 그 중 신명기의 원형으로 여겨지는데, 모세오경 중에서도 신명기에서 묘사된 성소에서의 유월절 제사가 율법서 발굴 이후 그대로 재현되기 때문이다.[7] 이러한 종교 개혁은 옛 북왕국의 영토였던 벧엘에서도 이루어졌다.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시조인 여로보암 1세가 초기에 수도로 삼았던 곳으로, 여로보암 1세는 이곳에 자신만의 성전을 세웠는데, 요시야는 이 성전의 제단과 산당을 헐고 무덤을 파내 해골을 제단 위에서 불태우면서 우상에 대한 철저한 고인드립을 시전했다.[8] 이러한 퍼포먼스는 오직 예루살렘의 성전만이 야웨 일신주의 신앙의 정통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자연스럽게 권력을 예루살렘에 있는 왕에게 집중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또한 이를 통해 요시야 시대 남유다가 북왕국의 고토를 어느 정도 수복하였고 그 배경이자 원동력에는 종교적 열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상당히 강력했던 요시야의 개혁도 근본적으로 민중들의 영적 세계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민중들의 일상생활 속에 혼합주의적 다신교는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당장 아버지인 아몬은 물론이고, 할아버지인 므낫세조차 역대기에 따르면 "악행으로 벌을 받아 바빌론에 잡혀갔다가 회개한 덕에 돌아와서 우상을 제거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여전히 우상을 섬겼다"고 기록한다.[9] 그 이전에 당대에 주변국은 죄다 다신교였던 점을 감안하면 유일신 종교개혁은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정말로 성경에 기록된 것만큼 크고 철저하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위에서 서술한 정화 의식이 행해졌던 벧엘의 제단과 산당은 현재까지도 전혀 발굴되지 않고 있기도 하고. 또한 7세기 말엽의 거주지에서는 여전히 가슴을 손으로 받친 채 서있는 여신[10]의 작은 조각상이 발굴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남유다 민중들의 신앙을 하루아침에 일신주의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11]
오히려 종교 개혁은 요시야 당대가 아닌 후세에 더 잊혀지지 않을 업적이 되었다. 이 시대에 확립된 모세오경은 이후 유대교가 체계적인 일신교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 유대교를 뿌리로 한 기독교와 이슬람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종교 개혁의 의의는 정치적, 사회적인 성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먼저 요시야의 종교 개혁은 각 지방에 흩어져 있던 종교적 권위를 통합하여 예루살렘으로 이전하였다. 이는 종교적인 중앙집권화이자 왕권의 강화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신명기에서 나타나듯, 종교 개혁은 사회 제도의 개혁을 동반하였다.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서에서 이야기하듯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나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빈부의 격차,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 힘 있는 자들의 횡포가 문제가 되었는데, 신명기에서는 약자를 보호하고 법에 따른 사회 정의를 구축하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신명기가 요시야 시대에 쓰여진 것이라면, 종교 개혁은 단순히 신앙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복지와 정의, 공정함을 세우려고 했던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 씁쓸한 최후
요시야의 치세는 그 이전 어떤 유다 왕의 치세보다 성공적이었다. 그는 벧엘과 같은 옛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어느 정도 영토도 확장하고, 이를 위해서 국가와 종교 시스템의 개편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업적으로 요시야는 야웨 신앙의 선지자들뿐 아니라 상당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야말로 남유다를 구원할 살아있는 메시아 수준으로 여겨진 듯하다.[12] 이 때가 말 그대로 요시야의 전성기였다.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하고 므기도에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끝나고 만다. 기원전 610년 이집트 제26왕조의 파라오 프삼티크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네코 2세가 뒤를 이었다. 이 당시 중동의 정세는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바빌로니아와 메디아 연합군의 공격에 망해가던 아시리아는 기원전 612년 결국 수도 니네베를 잃어 결정타를 맞았다. 아시리아의 잔당들은 현재 터키 동남부에 있는 고대 도시 하란으로 달아나 항거하며 이집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마침 프삼티크 1세가 사망하고 갓 네코 2세가 즉위한 이집트는 제때 구원을 갈 수 없었고, 결국 하란 역시 기원전 609년 함락되어 근교에 있던 이집트 주둔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네코 2세는 즉위 이후 정국을 안정시키자마자 군대를 끌고 동방 출정에 나섰다. 목표는 이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아시리아의 잔당과 힘을 합쳐 하란을 되찾고, 아시리아를 도와 상승세를 탄 신바빌로니아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파라오의 출정은 엉뚱하게도 남유다와 요시야의 운명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열왕기하의 기록에 따르면 네코 2세의 이집트군이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으로 가려고 할 때 요시야가 그를 만나러 갔으나, 므깃도에서 파라오가 그를 만난 뒤 죽였다고 서술한다.[13] 한편 역대하에서는 좀 더 자세하고 비장하게 기록되어 있다.
요시야가 이렇게 성전을 바로잡은 다음이었다. 이집트 왕 느고가 유프라테스 강가 가르그미스(카르케미쉬) 전투에 참가하려고 출병하였다. 그를 막으려고 요시야가 출동하자 느고는 사절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유다 왕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소? 나는 오늘 당신을 치러 온 것이 아니고 나와 싸움이 벌어진 왕실을 치러 가는 것이오. '어서 가라.'는 신의 명령을 받고 가는 길이오. 나와 함께 하시는 신의 손에 멸망하지 않으려거든 길을 막지 마시오." 그러나 요시야는 길을 비켜주기는커녕 도리어 변장하고 싸우려고 하였다. 느고의 말은 친히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는데 그 말을 듣지 않고 므기도(메기도) 골짜기로 진군하다가 요시야 왕은 적의 궁수들이 쏜 화살에 맞았다. 왕은 부하들에게 명하였다. "나를 여기에서 빼내어라. 내가 크게 다쳤다." 왕은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 병거에서 내려 부사령관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온 유다와 예루살렘이 슬퍼하는 가운데 선조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 역대하 35장 20-24절(공동변역 개정판)
- 역대하 35장 20-24절(공동변역 개정판)
위의 인용처럼 역대하에서는 요시야가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행군하는 네코 2세를 가로막았고, 이에 네코 2세는 요시야와 싸울 의지가 없음을 표하며 길을 내달라고 했지만, 요시야는 이를 듣지 않고 므깃도에서 이집트군과 전투를 벌인다. 전투 와중에 요시야는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기록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기록이 요시야의 진짜 최후에 가까운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성서학자들은 대체로 역대하의 기록처럼 므깃도에서 실제로 전투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으며, 일부는 요시야가 외교적인 혜안으로 신바빌로니아의 승리를 예견하고[14] 미리 신바빌로니아 쪽에 줄을 서서 네코의 이집트군을 막으려고 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학자들은 열왕기의 "만나다"라는 단어 역시 전장에서의 조우를 뜻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열왕기의 기록에 더 무게를 둔다. 이들이 열왕기의 기록을 더 신뢰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남유다의 군대는 당대 강국 중 하나인 이집트군과 전투를 벌이기에는 규모와 장비 면에서 크게 부족했다. 남유다는 이미 죽은 프삼티크 1세 시절에 사실상 이집트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다(물론 반독립 상태이긴 했지만). 남유다의 군비 역시 이집트에게 직접 통제를 받았거나, 직접적인 제한이 없었다고 해도 이집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크게 팽창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 역대기의 전투 묘사와 요시야의 최후가 지나칠 정도로 이전에 묘사된 아합의 최후와 비슷하다. 아합이 선지자 미가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벌였듯이, 요시야도 네코 2세의 전언을 통해 나온 야웨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투를 벌인다, 아합이 전투 직전 동맹인 남유다 왕 여호사밧을 자기로 꾸미고 자신은 일개 병졸로 변장했듯이, 요시야 역시 전투 전에 변장했다고 서술된다. 이뿐 아니라 둘 다 화살에 맞아 죽었으며, 화살에 맞은 뒤에 하는 말도 매우 유사하다.[15] 이러한 유사성을 봤을 때 요시야의 므깃도 전투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닌, 아합의 최후를 문학적으로 변주한 것에 불과하다.
- 아직까지 므깃도 전투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전무하다.
대체로 고고학자들은 열왕기의 기록을 신뢰하는 편이다. 에릭 클라인(Eric H. Cline)은 므깃도에서 실제로 전투가 없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핑켈슈타인이나 나답 나아만(Nadav Naaman) 같은 경우는 열왕기의 기록대로 아예 전투가 없었을 것으로 여기며,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네코와 만난 것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네코 2세가 동지중해 연안의 봉신들에게 주종관계를 재확인하고 충성 서약을 받기 위해 요시야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면, 왜 요시야가 살해당했는지는 알 수 없고,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요시야가 신바빌로니아와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가 슬금슬금 북이스라엘 고토로 영토를 넓히던 것이 파라오의 심기를 건드렸을지도 모른다. 바룩 핼펀(Baruch Halpern)은 네코 2세가 아라비아와의 무역에 독립적으로 뛰어들려던 요시야의 정책에 불만을 갖고 그를 죽였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이 모든 미스터리 중에서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시야가 네코 2세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이며, 그와 함께 통일 이스라엘과 메시아의 재림이라는 꿈은 그대로 끝장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요시야의 대망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이, 609년 므기또에서 파라오 느코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이 대망은 완전히 꺾여버린다. 이 비극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요시야는 과연, 동맹국 아시리아를 지원할 목적으로 바빌론과 맞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을 향하던 파라오 군대의 통행을 경솔하게 가로막고자 했던 것인가? 아니면 이집트의 지배를 거슬러 지나치게 자주적이었던 그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파라오에게 소환되어 응징되었던 것인가? 아무튼, 일화는 요시야의 이념적 기획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국과 이집트와 같은 강대국 사이의 불균형은 엄청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Jean-Daniel Macchi, "이스라엘의 역사. 기원에서 바빌론 지배 시대까지", 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1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103-104쪽
-Jean-Daniel Macchi, "이스라엘의 역사. 기원에서 바빌론 지배 시대까지", 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1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103-104쪽
BC 609년 요시야가 39세를 일기로 네코 2세에게 살해된(혹은 전사한) 뒤, 왕위는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 치세는 3개월 만에 이집트군의 공격을 받아 끝장났다. 네코 2세는 남유다에 엄청난 공물을 부과하고 여호아하즈를 폐위한 뒤, 그의 동생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하고 꼭두각시 임금으로 앉혔다. 이후 남유다는 독립적인 지위를 잃고 외세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놓였으며, 바야흐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5. 평가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 분명 시대는 잘 타고났고 요시야 본인도 그러한 시류를 잘 읽어 종교 개혁과 중앙집권, 영토 확장같은 업적을 남겼고,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다윗이나 솔로몬급의 명군이 되었을텐데도 결국 그가 가진 원대한 꿈을 아직 다 펼쳐보이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요절했고, 최후의 명군을 잃은 남유다는 급격히 멸망으로 기울고 말았다. 만약 요시야가 일각의 주장대로 신바빌로니아와 연계하여 이집트와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라면, 그가 조부 므낫세에 버금가는 외교적 혜안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16] 실제로 이후 오리엔트의 패권국이 된 것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신바빌로니아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판세를 읽었음에도 결국 국가간 체급의 차이와 군사력의 격차를 뒤집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을 듯. 물론 므깃도 전투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종교 개혁으로 내정을 정비하고 사회 제도를 재편했으며 영토를 확장해보려 했던 것은 분명한 치적이다.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치적을 남겼지만 성경에서는 폭군으로 단죄된 조부 므낫세와는 달리, 요시야는 완벽하게 선한 왕으로 성경에서 극찬을 받는다. 심지어 나름대로 선하다고 평가받는 왕들에 비해서도 흠집을 찾기 어려운데, 선한 왕의 귀감으로 취급되는 초대 군주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통, 인구조사 등으로 사고를 쳤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처음에는 그럭저럭 정직하게 살다가도 말년에 외국 출신의 첩들 때문에 이방 종교를 받아들였으며, 여호사밧은 악한 이스라엘 왕가와 친했다고 선지자한테 한소리 들었으며,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3대도 말년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대대적인 종교개혁으로 좋은 평가를 들었던 조부 히스기야조차도 외국에 자신의 재부를 자랑하는 바람에 꾸중을 들었는데[17] 요시야 만큼은 부정적인 행적과 평가를 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 그의 시대에 종교 개혁이 일어나 일신주의가 흥성하게 된 것을 보면 당연한 성경적 평가라고 할 수 있다.[18] 핑켈슈타인은 그의 시대에 모세오경이 쓰여졌던 점과 일신교적 성격이 강조된 것에 착안하여, 요시야 시대에 현재의 유대교가 처음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을 보면 성경 전체에서도 결코 무시하고 지나갈 수 없는 인물.
애석하게도 요시야의 자손들은 모두 아버지만큼의 능력이나 안목이 없었고, 한결같이 외세에 휘둘리다 보니 대부분 말로가 좋지 못했다.
- 각각 이집트, 바빌로니아에 의해 폐위되어 끌려간 여호아하즈와 여호야킨
-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 시달리며 왕좌만 겨우 유지한[19] 여호야킴
- 아예 망국의 군주가 되어 두 눈이 뽑힌 채 포로로 끌려간 치드키야
다만 이 부분은 자식들이 잘못한 것이니 요시야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어쨌든 이런 후손들의 말로를 보면, 요시야가 독립국의 군주로서 실권을 행사했던 실질적인 남유다(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참고 문헌
Finkelstein, Israel and Silberman, Neil A. The Bible Unearthed: Archaeology’s New Vision of Ancient Israel and the Origin of Its Sacred Texts. New York: Free Press, 2001. p243-250Hardmeier, Christof. "King Josiah in the climax of the Deuteronomic history (2 Kings 22-23) and the pre-Deuteronomic document of a cult reform at the place of residence (23.4-15) : criticism of sources, reconstruction of literary pre-stages and the theology of history in 2 Kings 22-23" in Good Kings and Bad Kings. Edited by Lester Grabbe, 2005.
Na'aman, Nadav. "Josiah and the kingdom of Judah" in Good Kings and Bad Kings. Edited by Lester Grabbe, 2005
Sweeney, Marvin A. King Josiah of Judah : the lost messiah of Israel. Oxford;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1] 므깃도 전투 중 전사.[2] 요시야 이후에도 4명의 왕이 더 있긴 했지만, 모두 외국의 입김에 의해 즉위하거나 폐위당했다. 결국 요시야는 독립국가의 군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마지막 군주였다.[3] 예시로 요시야의 업적도 므낫세 시대의 성장이 바탕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4] 아시리아가 포기한 지역을 이집트가 날로 먹었다고도 볼 수 있고, 이후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공조가 이루어지는 것을 바탕으로 양국 사이에 아시리아가 동지중해 지역을 이집트에게 할양하는 대신 군사 원조를 받기로 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5] 요시야 대에 유다가 옛 영토의 일부를 탈환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도 612년, 아시리아는 신바빌로니아, 스키타이, 메디아, 킴메르,유다, 엘람, 킬리키아 연합군에게 멸망했다.[6] 좀 더 부연하자면, 가나안의 토착신이며 주신이던 바알을 야웨로 동일시하거나 대체해서 믿는 등, 야웨를 아예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야웨를 주신(主神)으로 삼아 다른 여러 신들을 함께 섬겼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아예 초기 유대교는 다신교였으며, 야웨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여러 신들의 주신이었고, 일신교적 성향이 강해지면서 다른 여러 신들은 천사 등으로 격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극단적인 의견으로는 모세의 전통이 북왕국에서만 전해졌고 남왕국에서는 단절되었다가 북왕국 멸망 후 북왕국의 유민들이 남왕국으로 오면서 다시 부활했다는 시각도 있다.[7] 많은 학자들은 신명기가 BC 7세기 경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 시기에 그 핵심이 구성되었다는 부분에 동의한다(Rofé, pp.4–5). 아마도 요시야의 치세에 발견된 율법서는 이때 구성된 신명기의 원전, 원형에 해당했을 것이다. 비록, 신명기의 핵심을 이루는 12-26장의 율법 컬렉션이 요시야 왕 시대의 것인지, 그 이전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컬렉션 그 자체가 아닌 개별 법률은 분명 컬렉션 자체보다 오래된 것이다(Knight p66).[8] 이는 여로보암 1세가 벧엘에 신당을 세우자 한 선지자가 했던 다윗 가문의 '요시야'에 의해 제단이 무너지고 사람의 뼈를 그 위에 태울 것이라는 저주가 정확하게 이뤄진 셈이다.[9] 물론 역대기는 후대에 쓰인 책인데다 기록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에즈라였기 때문에 종교적인 사상이 더 짙으므로 다소 감안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아시리아 기록에는 므낫세가 조공을 바치러 스스로 입조하였고 무사히 돌아갔다고 기록돼있다.[10] 보통 가나안의 토착신인 아세라로 여겨진다.[11] 그래서 기독교 측에서는 요시야의 개혁이 불완전했으며, 야훼의 용서를 받아 멸망을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12] 할아버지인 므나쎄는 철저히 친아시리아 외교를 추구하고 이와 함께 실지 회복을 노리지 않고 이방신 숭배를 추진하여 야훼 일신교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모두에게 비판을 받았고 이를 억누르기 위해 므나쎄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손자인 요시야가 이들의 소원을 어느정도 들어준 것. 허나 현대에는 이러한 요시야의 성공은 44년에 걸친 재위기간동안 친아시리아적 외교정책으로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고 아시리아에 기대에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므나쎄가 마련해준 기반에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도 므나쎄 즉위 전 유다의 상황은 개판이라서 전대인 히즈키야가 괜히 아시리아와 분쟁을 벌이는 바람에 나라 전체가 아작이 나버렸다. 성서에는 마치 히즈키야가 이긴 것처럼 묘사했지만 고고학적 증거나 정황증거는 유다의 패배 쪽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13] KJV나 개역개정 등에서는 요시야가 네코(한글 성경에서는 느고로 나옴)와 "맞서러 나갔다(went against)"고 서술되어 있다. RSV와 NRSV에서는 단지 만나러(meet)라고 써 있고, 불가타 역본에서는 occursum(만나다, 조우하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대체로 열왕기의 묘사가 요시야가 네코와 싸우러 올라갔다기보다 단순히 만나러 갔다고 해석한다.[14] 네코 2세는 요시야를 죽인 뒤 북상하여 아시리아의 잔당과 합류하고 하란을 탈환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했다. 기원전 605년 다시 출정한 네코 2세의 이집트군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직접 끌고 온 신바빌로니아군과 카르케미쉬에서 전투를 벌여 대패했다. 이것으로 아시리아는 완전히 멸망하고, 네코 2세는 이집트로 철수했다. 이후 시리아와 동지중해는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되어 이집트의 패권은 무너졌다.[15] 둘 다 "내가 부상을 당했으니 나를 전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한다.[16] 조부 므낫세는 아시리아에 순종하는 길을 택했는데 그 당시 아시리아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고 이미 므낫세의 선대왕인 히즈키야는 자국과 아시리아의 격차도 모른채 무턱대고 덤볐다가 전국토가 쑥대밭이 된 바 있었다. 무엇보다 므낫세의 업적도 아시리아와 잘 지낸 덕도 있으니 뭐...[17] 꽤나 심각한 잘못이었는지, 이 때에 선지자 이사야는 앞서 자랑한 재부들이 모두 약탈당하고 왕의 후손은 환관으로 끌려갈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이때 자랑을 듣게 된 외국 사신들은 신 바빌로니아 사람들이었고, 남유다가 신 바빌로니아에게 망할 때 여러 보물들을 약탈해가면서 이뤄지게 된다.[18] 물론 요시야가 아무리 열심히 야훼를 섬겼어도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화가 단단히 난 야훼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다만 야훼는 요시야 시대에 나라가 망하는 꼴만은 면하게 해 주었다.[19] 역대하에서는 바빌로니아로 끌려갔다는 기술이 있으나, 열왕기에서는 조상들과 함께 잠들었다고 기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