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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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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의 연고지 역사
<rowcolor=#a38848> 기간 1984~1989
(총 6년)
1990~1995
(총 6년)
1996~2003
(총 8년)
2004~
연고지 충청남도/충청북도[1] 서울특별시 (동대문) 경기도 안양시 서울특별시 (마포)
1. 개요2. 지역 연고제 미시행기 (1984~1986)3. 충청도 연고 시절 (1987~1989)4. 서울(동대문) 연고 시절 (1990~1995)5. 안양 연고 시절 (1996~2003)6. 서울(마포) 연고 시절 (2004~ )

1. 개요

본 문서의 이름은 "FC 서울/역사"이지만, FC 서울의 역사 중에서도 복잡한 연고지 역사를 중점으로 서술한 문서이다. 시즌별 자세한 역사를 알고 싶다면, FC 서울 역대 시즌 문서에서 개별 연도를 골라 읽기를 권고한다.

2. 지역 연고제 미시행기 (1984~1986)

파일:럭키금성 황소 엠블럼.svg
1983년 ~ 1990년 구단 공식 엠블럼[2]
1983년 12월 22일, 럭키금성럭키금성 황소라는 이름의 축구단을 창단하여 이듬해인 1984년부터 슈퍼리그에 참여하였다. 본래 럭키금성은 창단 준비 과정 때부터 서울 연고를 희망하고 있었지만,[3][4] 연맹 측이 연고지를 충청도로 배정함으로써 럭키금성의 초기 구상은 어그러졌다. 다만 1984~86년도 당시에는 현재처럼 연고 지역에서 홈/원정 경기로 리그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대학 스포츠의 토너먼트 대회나 전국체전과 유사하게 전 구단이 특정 지역을 순회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연고지에 대한 의미가 없었다.[5]

파일:115695931_993068961125878_4676992019665052211_o.jpg

3. 충청도 연고 시절 (1987~1989)

프로축구는 1987년부터 광역 연고제를 도입하여 모든 구단이 각자의 연고지에서 홈경기를 하도록 하였다. 사실상 이 시기부터 프로축구에 연고지 개념이 정착되기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의 경기가 각 구단의 연고지에서 치러졌으나 몇몇 경기는 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주 연고지는 원래 대전이었지만 대전한밭운동장이 88 올림픽에 사용되면서 사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1988년부터 럭키금성 황소의 홈 경기는 청주에서 많이 개최되었다.
광역 연고제 시행기의 FC 서울(럭키금성 황소) 홈경기 개최지
연도 연고지 내 개최 횟수 연고지 외 개최 횟수 연고지 내 개최 비율
1987년 청주 6회
대전 6회
천안 3회
잠실 1회 93.8% (15/16)
1988년 청주 8회
천안 3회
동대문 1회 91.7% (11/12)
1989년 청주 10회
천안 3회
잠실 4회
전주 2회
광주 1회
65% (13/20)
총계 청주 24회
천안 9회
대전 6회
잠실 5회
전주 2회
광주 1회
동대문 1회
81.3% (39/48)

4. 서울(동대문) 연고 시절 (1990~1995)

파일:LG 치타스 엠블럼.svg
LG 치타스 엠블럼

1988년 초부터 서울로 연고지 이전을 추진중이었으며 1990년에 도시 지역 연고제가 시행됨에 따라 서울로 첫 번째 연고지 이전을 하여 동대문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1991년도에 모기업의 명칭 변경에 따라 구단명을 LG 치타스로 변경하였다.
도시 연고제 시행기의 FC 서울(럭키금성 황소/LG 치타스) 홈경기 개최지 (정규리그만 계산)
연도 연고지 내 개최 횟수 연고지 외 개최 횟수 연고지 내 개최 비율
1990년 동대문 11회 제주 1회
마산 1회
구미 1회
천안 1회
73.3% (11/15)
1991년 동대문 15회 부산 1회
구미 1회
공주 1회
청주 1회
마산 1회
75% (15/20)
1992년 동대문 11회 여수 1회
청주 1회
구미 1회
마산 1회
73.3% (11/15)[6]
1993년 동대문 9회
잠실 1회
여수 1회
구미 1회
창원 1회
공주 1회
청주 1회
66.7% (10/15)
1994년 동대문 9회 창원 1회
평택 1회
수원 1회
구미 1회
제천 1회
여수 1회
60% (9/15)
1995년 동대문 8회 원주 1회
수원 1회
안동 1회
문경 1회
공주 1회
영주 1회
57.1% (8/14)
총계 동대문 63회
잠실 1회
30회 68.1% (64/94)

도시 지역 연고제를 시행하며 연고지 내 홈경기 개최 비율이 70%대 밑으로 하락했는데 이는 당시 동대문운동장을 3개 구단이 사용함에 따라 원활한 홈 경기 개최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대문운동장은 서울지역 기후 특성상 잔디 보호 때문에 남부지역과 달리 3월에 리그가 개막하더라도 4월 말이 되어서야 경기장 사용이 가능했다. 또한 국가대표팀 경기와 프로 이외의 국내 대회 결승전과 같은 주요 경기들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동대문운동장은 연간 최대 경기 횟수를 제한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대우, 현대, 포철과 같은 남부 지방 연고팀의 연고지 내 홈경기 비율이 90퍼센트 이상인데 반해 서울 연고의 일화, LG, 유공은 더 많은 비율의 지방 순회 경기를 치러야 했으며, 3개 구단 중 LG가 가장 많은 지방 순회경기를 개최하였다. 참고로 이러한 지방 순회 경기가 특수한 경우를 빼고 완전히 없어진 것은 2002년 월드컵 이후 각 구단의 경기장 시설 인프라가 완비된 이후이다.
[clearfix]

5. 안양 연고 시절 (1996~2003)

파일:안양 LG 치타스 엠블럼.svg
안양 LG 치타스
Anyang LG Cheetahs
<colbgcolor=#be0055><colcolor=#FFFFFF> 정식 명칭 안양LG치타스프로축구단
구단형태 기업구단
창단 1983년 12월 22일([age(1983-12-22)]주년)
연고이전 연도 2004년 3월 11일([age(2004-03-11)]주년)
마지막 경기 2003년 11월 22일, 고려대학교 녹지운동장, vs 고려대학교 축구부
소속 리그 K리그
연고지 변천 충청남도/충청북도[7] (1983~1989)
서울특별시 (1990~1995)
경기도 안양시 (1996~2003)
홈구장 변천 대전공설운동장 (1987~1989 / 17,371석)
청주종합경기장 (1987~1989 / 16,280석)
천안오룡경기장 (1987~1989 / 20,000석)
동대문운동장 (1990~1995 / 22,706석)
안양종합운동장 (1996~2003 / 17,143석)
구단명 변천 럭키금성 황소 (1983~1990)
LG 치타스 (1990~1995)
안양 LG 치타스 (1996~2003)
라이벌 수원 삼성 블루윙즈 - 지지대 더비
매각 당시 주요 인물
감독 조광래
주장 김성재
우승 기록
K리그1
(3회)
1985, 1990, 2000
FA컵
(1회)
1998
슈퍼컵
(1회)
2001
전국축구선수권대회
(1회)
1988

2002 월드컵 유치와 이를 위한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명분을 앞세운 프로축구연맹에 의해 서울 연고지 구단들을 모두 없애는 방안이 추진되었고 1995년 2월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강제로 의결[8]되었으며 이후 계속해서 서울 연고팀들이 연고지 잔류를 위해 저항했지만 1995년 11월 청와대의 서울 연고 3팀 연고지 이전 지침이 하달되면서 1996년 시행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에 의해 일화 천마, 유공 코끼리 등과 함께 강압적으로 서울 연고지에서 쫓겨나 안양시로 다시 연고지를 옮기고 팀명도 안양 LG 치타스로 바꾸게 되었다. 1995년 1월 김기복 사무총장 인터뷰 기사-월간축구, 1995년 2월 이사회 직전 김기복 사무총장 인터뷰기사-스포츠신문, 청와대 개입 관련 기사 LG 구단은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노리고 도봉구를 답사하는 등 어떻게든 서울 연고를 지키려 용을 썼으나 연고지 이전을 막지는 못했다. LG의 서울 사수 의지를 담은 신문기사. 이때 서울 구단들이 받아든 선택지는 서울에 동대문 아닌 곳에 신구장을 건설하고 서울 연고를 유지하느냐 아니면 서울을 떠나느냐였는데 LG, 유공, 일화 모두 연고지 이전을 선택하고, 이 신구장 건설 조건부 서울 연고 허가는 추후에라도 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할 경우 서울로의 연고 복귀를 허용한다라는 단서 조항으로 이어진다.[9]
안양 시대의 FC 서울(안양 LG 치타스) 홈경기 개최지 (정규리그만 계산)
연도 연고지 내 개최 횟수 연고지 외 개최 횟수 연고지 내 개최 비율
1996년 3회 동대문 10회
원주 1회
진주 1회
문경 1회
18.8% (3/16)
1997년 7회 진주 1회
제천 1회
77.8% (7/9)
1998년 9회 없음 100% (9/9)
1999년 12회 창원 1회
동대문 1회
85.7% (12/14)
2000년 13회 없음 100% (13/13)
2001년 4회 목동 9회 30.8% (4/13)
2002년 14회 없음 100% (14/14)
2003년 21회 창원 1회 95.5% (21/22)
총계 83회 27회 75.5% (83/110)

안양 연고 원년인 1996년과 안양 종합 운동장 개보수 문제로 인해 9경기를 목동종합운동장에서 치러야 했던 2001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홈 경기를 안양에서 치렀다.

[clearfix]

6. 서울(마포) 연고 시절 (2004~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끝난 뒤 수도 서울에 축구단이 없는 것에 대해 수도에 축구단이 있을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일차적으로 시민구단 형태의 서울 유나이티드를 창단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으나 서울시 측에서는 신생팀 창단에 따르는 비용을 들어 난색을 표하였고[10], 당초 KT, 금호아시아나그룹, 한화그룹,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의 대기업들을 유치해서 신규 서울 연고팀을 만들기 위해 축구계에서 다각도로 유치 노력을 하였으나 과도한 서울 입성금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대기업들이 참여 의사를 철회하면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2003년에 이어서 계속해서 서울월드컵경기장이 활용되지 못할 것을 우려한 서울시에서 서울 연고팀 창단을 희망하는 대기업을 모집하는 신청까지 받았지만 역시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편 당시 서울시와 서울시장 이명박은 그래도 부산과 안양 중에서 부산 역시 대한민국 프로스포츠 시장에서 서울 다음으로 큰 빅마켓인데 서울 연고팀을 만들기 위해 부산 팀이 없어지는 것보다는 과거에 서울 연고 시절이 있고 서울 근접 수도권 팀인 안양 LG가 오는 것이 한국 프로축구 발전을 위해 낫다는 의견을 피력하며 안양 LG의 손을 들어주기도 하였다.서울시, 안양LG 연고구단 선정 그 후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서울로 연고지를 옮겨서 서울 연고팀을 만드는 것으로 방침을 변경하였으며 전 구단에 2월 25일까지 서울 연고지 이전 의향서를 받았다. 이에 안양 LG 치타스와 부산 아이콘스가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 의향서를 마감일인 25일에 제출하였으며 3월 10일 부산 아이콘스가 연고지 이전 신청을 철회하여 2004년 3월 11일, 한국프로축구연맹 이사회에서 안양 LG의 서울 연고복귀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11][12][13][14]

그리고 LG그룹이 2004년 LG와 GS로 분할을 시작하면서 LG가 농구단야구단을 그대로 운영하고, GS가 여자배구단과 축구단을 가져가게 되면서 2004년 6월 1일 GS 스포츠가 공식 출범하여 현재의 모기업은 GS이다.

공식적으로는 한국프로축구연맹과 정부가 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해 전국적인 축구 열기를 확산시킨다는 명목으로 시행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강제로 안양으로 연고를 옮긴 축구단이 서울로 연고복귀한 것이다. 한편 철저한 유럽식 연고제를 주장하던 다른팀 서포터와 팀을 잃게 된 안양 서포터즈의 원한은 북패라는 비칭을 만들고 이른바 패륜 논쟁이라는 K리그가 없어질 때까지 이어질 갈등을 촉발시켰다.


[1] 충청 지역의 광역연고인 대전광역시, 청주시, 천안시를 포함하고 있으며, 1984년부터 1986년까지는 모든 클럽이 연고지에 정착하지 않고 전국의 경기장을 투어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하던 시절이라 실질적인 충청도 연고 기간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단 3년간이다.[2] 엠블럼 디자인은 원로 만화가 박현석이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3] # 경향신문, 1980년 03월 19일자[4] 구단 창단 주체가 창단을 희망하고 추진해 온 연고지에 자리잡지 못하고 연맹에 의해 연고지가 배정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기업이 흥행과 홍보에 유리한 서울 연고를 희망하기 때문에 연고지 분배를 하는 협회와 연맹의 입장에서는 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 KBL이 1996년 출범할 때 초기 서울을 공동 연고지로 묶은 것도 같은 이유. 이는 야구 등의 타 종목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창단 당시 서울로 가고 싶어했던 OB 베어스에게 차후에 보내준다는 조건으로 임시로 충청도로 보냈다던가, 해태의 리그 참가가 확정되자 서울을 고집하던 롯데가 제과 라이벌로서 부산을 승낙한 것 등의 사례가 있다. (당시 KBO에서는 각 분야별로 1개 기업씩 참가하도록 계획 했지만, 서울을 연고로 했던 실업야구팀가지 가진 롯데는 서울이 아니면 안된다며 버티고 있다가 호남지역을 맡을 기업이 없어서 난항을 겪던중 해태가 맡게 되자 부산경남 연고지를 승낙해서 제과 기업의 라이벌전이 생성 되었다.)[5] V-리그의 첫 번째 시즌도 이런 방식이었다.[6] 당시 홈에서 같은 팀을 3번 만나도록 대진이 짜여졌는데 LG vs. 일화 경기가 2회, 일화 vs. LG 경기가 4회로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홈 경기 개최 횟수 기록 상으로 LG 14회, 일화 16회, 타 구단 15회로 기록되어 있다. 같은 연고지를 사용하던 두 팀간의 경기이므로 기록 입력에 오류라고 판단하여 LG의 홈 경기 개최 횟수를 하나 늘려 15회로 계산하였다.[7] 1983년부터 1986년까지는 순회 경기 시절로 명목상으로만 연고가 있던 때다.[8] 이사회는 각 구단 구단주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LG 포함 서울 연고구단의 구단주들 역시 의결과정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이사회 의결당시 서울 연고 구단들의 반대가 있었다는 정황은 다양한 자료들로 입증되었다. 대표적인 자료로는 1995년 1월 당시 사무총장인 김기복 사무총장이 원래 1994년 12월에 의결되어야 하지만 서울 연고 3개팀 특히 LG의 반대가 심해서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는 인터뷰를 하였으며 1995년 2월 이사회 바로 직전 계속해서 서울 연고 3개팀의 반대가 있을시 다수결로라도 강제로 통과시키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와 관련된 당시 월간축구와 스포츠 기사들은 나무위키 토론창에 있는 리그 시절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의 강제성 vs. 자발성 토론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9] 경기장 건설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과 기간, 조건 등을 고려해볼 때 사실상 구단 입장에서 서울에 남는 것이 불가능한 조항이며 '시키는대로 나가라'라는 표현을 돌려한 것에 불과했다. 당시 포스코가 순수 모기업 자금으로만 이미 전용구장을 두 곳이나(포항, 광양) 지은 전례가 있지만, 모두 포스코 공장 내 부지로 지방과 서울의 경기장 부지 매입비부터 차원이 다르다. 또한 LG그룹에서 1994년 뚝섬 돔 경기장 건설을 계획 중이었던 것을 보고 서울 시내의 축구 전용구장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돔 구장은 1993년 115만4308명의 관중을 모은 LG 트윈스와 당시 400만 이상 총관중을 기록한 프로야구 1차 전성기 시절 인기를 뒤에 업고 추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기를 뒤에 업고도 프로야구 홈경기만으로는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레저 시설 등을 갖춘 복합 스포츠 타운을 계획하게 되었다. 하물며 기업 구단 단독으로 서울 시내에 축구만 할 수 있는 축구전용구장을 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10] 당시 운영 중에 있었던 서울시청 축구단조차 "남자축구는 이미 활성화될 대로 활성화되었으니 대신 여자 축구를 육성하겠다"는 명분을 들어 해체시킬 정도였으니 당시 서울시가 축구에 쓰는 돈을 얼마나 아까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시립대학교 재학생으로 구성된 특이한 팀이었던 서울시청 축구단은 1999년을 끝으로 체육 특기자 제도가 개정되면서 더는 체육 특기생을 받지 못해 겨우 연명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체가 합당하다는 주장도 있다.[11] 당시 YTN 뉴스 보도 전문 - 한국프로축구연맹은 부산아이콘스의 연고지 이전신청 철회에 따라 긴급 이사회를 열고 안양LG의 서울 연고복귀를 만장일치로 최종 승인했습니다. 지난 1995년 이후 9년만에 서울로 복귀하는 LG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 시민구단으로 거듭나기 위해 유명선수 영입과 구단의 수익구조 개선에 힘쓰겠다고 밝혔습니다. LG는 앞으로 서울시와 연고협약을 체결한 뒤 다음달 3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부산 아이콘스와 K리그 개막전을 갖습니다.[12] # 안양 LG 치타스의 연고복귀 공고문[13] FC 서울은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연고복귀를 하며 서울월드컵경기장 사용료 75억원을 납부하였다. 위에 언급된 축구전용구장 건설시 서울로의 연고 복귀를 허용하겠다는 당초의 조항을 백지화한 것.[14] 당초 서울시에서 책정한 서울 월드컵 경기장 건설비 중 서울 연고 프로구단의 분담금은 총 150억이므로 나머지 75억원을 납부하는 또 다른 팀이 나오고, 그 구단이 서울 월드컵 경기장을 홈 구장으로 결정한다면 서울 월드컵 경기장은 2팀이 사용하는 구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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