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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수/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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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성남 일화 천마 코치 (1999~2005)3. 대교 캥거루스 코치 / 감독 (2006~2007)4. 대한민국 여자 대표팀 감독 (2007~2009)5. FC 서울 수석 코치 (2010)6. 부산 아이파크 감독 (2011~2012)7. 성남 일화 천마 감독 (2013)8. 대한민국 U-20 대표팀 감독 (2014~2016)9. 선문대학교 감독 (2018~2021)10. FC 서울 감독 (2021~2023)

1. 개요

대한민국축구 감독 안익수의 지도자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성남 일화 천마 코치 (1999~2005)

은퇴 후 친정 천안 일화 천마-성남 일화 천마의 코치를 맡으며 쓸 만한 2군 선수들을 여럿 발굴했는데, 대표적인 선수들이 바로 김철호, 장학영, 전광진, 박우현이다. 특히 2군을 전전하며 축구에 대한 의지를 잃어가던 김철호와 장학영을 발굴하여 리그 수위급 선수로 자리잡게 한 것이 안익수 감독의 공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부터 자료를 통한 분석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K리그 감독 시절에도 리그에서 유일하게 직접 분석 자료를 활용하는 감독이었다.

3. 대교 캥거루스 코치 / 감독 (2006~2007)

2005년 성남과의 코치 계약 만료 후 영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으나 당시 WK리그 대교 캥거루스의 감독을 맡고 있던 최추경 감독의 제안을 받고 고양 대교 코치로 합류했다. 2006년 대교의 전국체전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 더블에 기여했다.

원래 딱 1년만 맡으려 했으나 1년 뒤 최추경 감독의 죽음 이후 스승의 뜻을 잇고자 감독으로 부임하며 잔류했다. 2007년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을 이끌며 구단의 2연패에 기여했다. 대교 캥거루스의 토대를 다지는데 주력했으며 여러 가지 인프라 구축에도 많은 영향을 발휘했다.

4. 대한민국 여자 대표팀 감독 (2007~2009)

이러한 능력을 인정받아 2007년 12월 여자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여자대표팀 감독을 맡는 동안 본격적인 대표팀 세대교체를 시작했으며, 선수들에게 그동안 부족했던 대표 선수로서의 자세와 동기부여를 강조하고 조직력을 키웠다. 2009 베오그라드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는 여자축구 역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1]

1년 뒤 2010 FIFA U-20 여자 월드컵 4강 진출부터 2015 FIFA 여자 월드컵 16강 진출, 평양의 기적까지 이어지는 여자축구 황금세대의 밑그림은 안익수의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5. FC 서울 수석 코치 (2010)

파일:안익수서울코치.jpg

2010년, FC 서울의 수석 코치를 맡아 넬루 빙가다 감독을 도와 리그를 제패하는 데 일조했다. 젊은 선수들로 이뤄졌던데다 그나마 있던 베테랑들은 동료를 다독이기보다는 다혈질의 성격 때문에 먼저 폭발하거나 사고를 쳐버리는 탓에 07~09시즌 내내 부실한 멘탈로 결정적인 순간 패배해 결과를 거두지 못하던 서울은 이 시즌에 베테랑들의 대거 영입과 단결력을 중시한 감독, 코치의 지도 아래 강력한 조직력을 자랑하는 팀으로 재탄생했고 서울 복귀 후 첫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2]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재계약 없이 1년만에 팀을 떠났고, 이후로는 지도자로서 전국을 유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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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부산 아이파크 감독 (2011~2012)

파일:다운로드안익수25).jpg

2010년 FC 서울의 우승을 맛본 후, 정몽규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의 제안을 받고 황선홍 감독이 포항으로 옮기면서 공석이 된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을 맡게 된다.

감독 초반에는 아스날과 같은 유려한 패스축구를 구사하겠다고 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한 역습축구를 구사하는 팀 컬러를 구축했다.

이는 팀에 맞춰 전술을 짜는 안 감독의 성향 때문이다. 안익수 감독의 이상은 4-4-2를 바탕으로 한 전진패스로 이어가는 공격축구이다. 여자축구 대표팀에서도 비슷한 축구를 구사했다. 하지만 부산에선 팀 사정에 맞춰 쓰리백과 4-1-4-1을 사용하였다. 특히 리그 수위급 미드필더였으나 소속팀과 재계약이 실패로 끝나면서 선수 생활을 접으려던 김한윤을 데려오면서 안익수식 4-1-4-1은 빠르게 자리를 잡는다. 시즌 초반에는 수비축구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이후 강력한 수비력을 기반으로 상대팀을 옥죄면서 질식축구라는 질시 섞인 찬사를 들었다.

결국 2011년 리그 5위로 챔피언십에 진출시켰고, 리그컵 준우승을 달성한다.

2012년에는 리그 7위의 순위를 달성하며 부산 축구의 부활을 예고하는 듯 했다.[3]

7. 성남 일화 천마 감독 (2013)

2012년 말에 갑자기 친정팀 성남 감독으로 옮길 것이라는 루머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안익수 감독은 헛소리하지 마라는 식으로 대응하였으나 결국 2012년 말 뜬금없이 성남행이 확정되었다. 문선명 총재 사후 팀 해체 위기를 맞은 성남 프런트는 최악의 시즌을 보낸 신태용 감독을 선수 때와 마찬가지로[4] 헌신짝처럼 내쳐버리고 확실한 성과를 내줄 감독을 찾던 중 예전에 내팽개친 안익수 감독이 성과를 내는 것을 보고 정몽규 구단주에게 리그 발전을 위한 대승적 차원에서 허용해 줄 것을 여러차례 부탁했다. 하다 못해 같은 모기업 계열사 자매구단도 아니고 리그 경쟁팀에 유망한 감독을 내주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을 승낙할 사람이 어디있나 싶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정몽규 구단주가 흔쾌히 동의했다! 부산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상황이었으나, 2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안익수 감독과 정몽규 구단주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졌으며, 때마침 성남에서 제의가 들어왔기 때문에 얼씨구나 하고 제의에 응했다는[5] 소문이 있다.

파일:안익수 일화 감독 취임식.jpg

결국, 성남 일화 7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취임식에서도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바로 전임 신태용 감독처럼 FA컵 우승으로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파일:안익수 일화 천마 감독.jpg

비상하는 천마를 도화지에 그려내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안익수 감독은 이후 성남 일화에 피바람을 몰고 온다. 내보낸 선수만 해도 한상운, 윤빛가람[6], 홍철, 김성환, 남궁웅, 임종은, 전현철 등 지난 시즌의 주전 혹은 준 주전급 선수만 해도 7명을 내쫓고 대신 다른 선수들로 리그를 대체한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될 때까지 영입을 다 끝마치지 못해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결국 3월 말이 되어서야 리그 영입을 마무리 하였다. 시즌 초반에는 병신공의 재림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경기 내용을 보여 한때 리그 꼴찌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나 이후 전북을 시작으로 서울, 울산 등 강호와의 경기를 쓸어담는 위엄을 보이며 스플릿 전 시즌 전반기를 5승 3무 5패로 마감하였다.

후반기에도 약간의 호성적을 거두며 드디어 상위 스플릿에 드나 했더니 전남과 대구 같은 약체에 밀리더니 마지막 경남전에서 한 골밖에 못 넣는 동안 선두 포항이 부산에 패하며 득점 1 차이로 8위, 다시 하위 스플릿으로 들어갔다. 하위 스플릿에서 제주와 수위를 놓고 다투며 강등권과 격차를 벌리고는 최종 8위를 기록했다. 이미 신태용 시절부터 지원이 줄어들면서 선수층 측 스쿼드가 엷어졌는데 그 한계가 작용했다.

2013 시즌 후 일화가 지원을 포기하면서 한 때 K 리그 3연속 챔피언 클럽은 추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역대 K 리그 챔피언 클럽 중 인수된 건 대우 로얄즈가 처음이었고 이후 일화 천마였으며 이후 일화 천마라는 이름으로 최후의 감독이 되었고 성남 일화 축구단은 기업을 찾지 못해 결국 성남시 소속의 시민구단으로 전환되어 성남 FC로 바뀌게 되었다. 개편과정에서 일화 천마의 레전드 사령탑이었던 박종환 감독의 선임 발표와 함께 감독직에서 물러났다.[7]

8. 대한민국 U-20 대표팀 감독 (2014~2016)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김상호호 안익수호 신태용호(U-20)

김상호 감독의 후임으로 U-20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국내 개최가 확정된 2017년 FIFA U-20 월드컵에 참가할 연령대의 선수들을 지도하게 된다.#

2015 발렌틴 그라나트킨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에 출전[8]하여 1라운드에서 핀란드와 모스크바 선발팀을 상대로 1승 1무, 2라운드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선발팀에 2승을 거두어 결승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러시아로, 선제골을 넣었지만, 후반에 역전을 허용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으로 마무리 지었다.

2015년 수원 JS컵에 개최국 한국을 비롯하여 우루과이, 벨기에, 프랑스와 참가하게되었다. 22인의 최종멤버에서 이승우와 백승호가 발탁이 된 것에 대해서 화제가 되었다.

4월 29일 JS컵 첫 경기 우루과이전에는 후반 임민혁의 스루패스를 받은 이동준이 1골을 넣어 1 : 0으로 짜릿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전반전에 거센 우루과이의 압박에 고전하는 듯 하였으나 교체멤버들의 맹활약으로 후반전에는 흐름을 바꾸어 좋은 경기를 펼쳤다는 것이 포인트. 이 날 특히 빛났던 것은 수비전술이였는데 뛰어난 공격수를 가지고 있는 우루과이를 상대로 박스 안에서의 위협적인 슈팅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는것이 고무적이다. 특히 이 날 주목을 받았던 선수는 임민혁인데 넓은 시야와 준수한 킥력을 통한 스루패스로 공격에 활기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5월 1일 벨기에전에서는 우리가 상대방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마무리 부족으로 0 : 0으로 끝마치게 되었다. 미드필더로 출전했던 박한빈과 한찬희가 중원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 두드러진 점이었다. 또한 철벽수비로 이번 경기에도 무실점을 이어나갔던 것은 덤이다.

그리고 5월 3일 프랑스전에서는 0 : 1로 패했다. 이 날 다른 경기와 크게 다른 점은 이승우와 백승호의 투톱을 가동했다는 점인데, 프랑스의 강한 압박전술에 백승호-이승우의 투톱이 제대로 볼 배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컸다. 상대가 라인을 올리고 촘촘한 간격을 유지하여 강한 압박전술을 사용하는 것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빈 공간을 노리기 위해 강지훈과 임민혁 그리고 김대원을 투입하여 반격을 해보려고 하지만 오히려 1골을 실점하여 그대로 0 : 1 패배를 하였다. 이 날 패인 중에 하나는 한찬희와 박한빈 두 미드필더의 방전이었는데, 강한 압박을 풀어내고 백승호와 이승우에게 볼 배급을 해주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는 점이 컸다. 이 날 투톱 자리에 하나를 맡은 백승호는 전반 45분동안 뛰었는데 투톱 자리에서의 전술적인 이해도 부재와 부족한 경기감각 때문인지 활동폭이 줄어들었고 한찬희와 박한빈의 고립이 심화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날 안익수는 백승호와 이승우의 투톱을 이용하여 바르샤 듀오의 공격에서의 창의성과 파괴력이 돋보이는 움직임을 기대해보려고 하였으나 전술적으로 실패했다는 평이다.[9]

종합적으로 마지막 프랑스전에서의 전술적 실패로 숙제를 남기긴 했지만, 강팀을 상대로 1승 1무 1패를 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라 볼 수 있다.

2016년 JS컵에서는 이승우와 백승호를 소집하지 않았는데 이제 경기력도 충분히 올라온 선수들을 왜 뽑지않았냐고 해축팬들의 분노를 샀다. 허나 사실은 바르셀로나에서 입지를 더 다지라고 일부러 제외한 것이다. 물론, 뽑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명분일수도 있긴 하나, 그저 이 두명을 뺐다고 컵을 안본다느니 기대도 안한다느니 하는건 해축팬들의 막되먹은 팬심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브라질과 비기고 프랑스를 1 : 0으로 격파[10][11] 했다.
파일:이승모 프랑스전 결승골.gif
2승 1무로 우승하면서 성적도 우수했고, 2살을 월반한 고교생 공격수 조영욱을 발굴하는 등[12] 실리도 챙겼다.

2016년 10월에 열릴 AFC U-19 선수권을 한 달 남기고 준비차 참가한 카타르 4개국 친선대회에선 1승 2무 1패로 3위를 기록했다. 다만, 안익수 감독은 친선대회가 선수들의 경기력을 확인하기 위한 대회로 어디까지나 거쳐가는 과정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AFC U-19 대회에서 우승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2016년 AFC U-19 챔피언십 16개국 본선 조별리그에서는 2승을 거두었으나 결국 16강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에 1 : 2로 패하면서 2승을 거두었음에도 똑같이 2승1패를 기록한 바레인, 태국에 밀려 U19아시안컵 9위로 광탈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2승1패 대회 9위로 탈락했으니 다소 억울하다는 평도 있으나 2승을 거둔 상대가 바레인, 태국인지라... 참고로 바레인은 8강에서 홈어드밴티지를 등에 업고도 베트남한테 털렸다. 차라리 바레인전에 먹힌 오프사이드 오심 실점을 핑계로 대는 게 더 설득력있다. 그 오심이 없었으면 같은 2승1패라도 골득실로 조1위로 진출하는 거였기 때문.[13] 그리고 만약 2017년 FIFA U-20 월드컵이 대한민국에서 개최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출전도 못하고 광탈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국축팬들에게는 나노 단위로 까이고 있다.

결국 10월 24일,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처음에는 경질 기사가 나왔다가 나중에는 부랴부랴 하루 전에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다고 기사가 떴지만, 정황상 짤린 게 맞다.[14] 그럼에도 안익수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계속 맡겼으면 내년 U-20 대회에서 4강에 올랐을 거임"이라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노답에 빠진 팀을 신태용 감독이 잘 추스려 비록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짧은시간 내에 U20 최다우승팀 아르헨티나를 격파하며, 16강에 진출시키며 16강 10위를 기록했다.

9. 선문대학교 감독 (2018~2021)

청소년 대표팀에서 물러난 후 2018년 선문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며, 3월 23일 U-리그 5권역 개막전에서 신경대에 2대0으로 승리하며 선문대 감독 부임 후 첫 승을 거두었다. 2018 시즌 최종 성적은 권역 4위.

2019년 5월 사임한 김현수 감독의 후임으로 서울 이랜드 FC 감독 부임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정정용 감독이 부임하였다.# 2019년 8월 KBSN배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 준우승을 차지했다. U리그에서도 권역 2위와 왕중왕전 4강 진출에 성공했다.

2020년 U리그 왕중왕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선문대 부임 이후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선문대의 첫 번째 U리그 왕중왕전 우승이기도 하다.

2021년에는 춘계대학축구연맹전과 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명실상부 대학 최강팀으로 거듭나게 됐고, 대학 무대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아 2021시즌 중반 다시 한번 프로 무대에 도전하게 되었다.

후임 감독으로 최재영 감독이 부임했다.

10. FC 서울 감독 (202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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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는 지소연을 비롯해 조소현, 전가을, 권하늘, 김도연, 심서연, 임선주, 유영아, 이은미, 김수연 등 여자축구 황금세대의 주역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2] 때문에 일부 축구팬들은 2013년 대표팀 내분 사태가 불거지자 안익수 감독이 대표팀 맡아서 뜯어고쳐야 한다고 탄식했다.[3]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후임은 수원 삼성 출신의 윤성효가 되었고 부산 아이파크는 K리그 사상 첫 기업클럽에서 2015년 첫 강등의 굴욕과 수모를 당하게 된다.[4] 현역 시절 K리그와 성남의 레전드이자 프렌차이즈 스타인데도 은퇴식도 치러 주지 않고 유니폼을 벗겼다.[5] 이 시기 대한축구협회 회장 선거를 앞두고 한창 허승표 후보와 접전을 벌인 만큼 축구팬들 사이에선 모종의 딜이 있었으리란 설이 지배적이다.[6] 이들은 마음도 없는 구단에 남아 있는게 독이 되었다.[7] 그때 마침 프로축구연맹에서 후원하는 지도자 연수차 영국에 가있던 상태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박종환 감독은 폭행논란 끝에 또 다른 제자인 김학범 감독이 후임으로 돌아오며 2014년 FA컵 우승과 2015년 K 리그 클래식 상위스플릿으로 선전했으나 2016년 성적부진에 따른 사퇴 이후 대행체제의 촌극과 함께 강등을 당하게 된다.[8] 한국과 개최국 러시아를 비롯,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그리스, 일본, 카자흐스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18팀이 참가했다.[9] 안익수는 U-18 대표팀을 맡으면서 미드필더를 원톱이나 투톱 자리에 자주 기용을 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에서 열린 유소년 축구 대회에서 한찬희를 주로 원톱으로 기용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10] 대한민국 모든 연령팀 처음으로 프랑스전 첫 승리[11] 그 전에 프랑스는 일본을 3 : 1로 이겼다.[12] 2016년 들어 안익수가 소집훈련에 꾸준히 소집하며 관심을 보인 선수. 이후 FC서울에서 재회를 하게 된다.[13] 최종수비보다 거의 5미터를 앞서 있는 선수가 골을 넣었는데 승부조작급 오심으로 득점이 인정되었다. 35초경부터[14] 국내 축구계의 고질적인 병폐이기도 한데, 감독이 자진사퇴를 하면 잔여연봉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구단이나 협회에서 경질하더라도 표면상으로는 자진 사퇴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훗날 2022년 강원 FC김병수 감독이 "경질"되었다는 뉴스에 많은 국내축구계가 놀란 이유기도 하다.